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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소멸 진도 대책 (6) 진도 향토지식재산(문화유산 분야)
지역소멸 진도 대책 (6) 진도 향토지식재산(문화유산 분야)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4.07.08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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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사적 제126호 진도 용장성

 

                                                                                                                       박주언 (본지 지역소멸 진도연구소장)

 진 진도 고려정부와 온왕을 내세우자

 

- 용장성의 재발견 -

 

삼별초와 배중손에 가려

 

 

<진도에 정통 고려 있었네>

 

 

20여 년 전 ‘진도에 또 하나 고려 있었네’라는 연극이 진도뿐 아니라 전국 순회공연을 돌았다. 진도사람들의 민요창극 기량을 자랑한 소설가 곽의진 작품이다. 크게 호평을 받은 그야말로 동네연극이었다.

그런데 언뜻 보아도 오류가 있었다. 진도에 세워진 고려는 ‘또 하나’의 양립하는 고려가 아니라 유일한 정통 고려였기 때문이다. 강화도 고려처럼 도망가 숨거나 사위네 고려가 아니고, 제주도처럼 왕이 없는 고려도 아니다.

완전한 자주 국가 고려를 세운 지 1년도 못 되어 류큐 왕국을 건설해서 후방지원 국가를 만들어 놓았다. 바둑 같으면 신의 한 수를 포석한 것이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호응을 받는 나라를 세웠다. 따라서 <진도에 고려 있었네> 또는 <진도에 정통고려 있었네> 라 했어야 옳았다.

이제부터 진도사람들은 정통고려의 수도사람들임을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향토지식재산의 효과적 활용을 위한 창의적 연구와 과감한 실행을 경제적으로 추진해야 된다. 이 또한 중요한 진도의 소멸대책이기 때문이다.

 

<진도로 가는 배 1천 척>

1232년 강화도에 들어가서 40년간 버티던 고려정부가 몽골에 두 손을 들었다. 강화도에서 나와 개성 옛수도로 돌아가는 것과 임금이 몽골에 가서 무릎을 꿇는 절차를 받아들인 것이다. 동시에 삼별초 해산명령이 내려졌다.

삼별초는 이러한 정부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1270년(원종 1l년) 6월 1일 역사적으로 봉기했다. 이틀에 걸쳐 강화도의 보물과 사람들을 모두 챙겨서 6월 3일 배 1천여 척에 싣고 진도로 향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끈질기게 나돌았던 해도재천론(海島再遷論)이 단행된 것일까? 개성과 가까운 강화도로는 몽골에 끝까지 버티기가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13년 전(1257년)에 죽은 최항이 제기했다고 보아진다. 그는 일찌감치 남쪽으로 내려가 순천 송광사에서 승려생활을 했고 말사인 화순 쌍봉사 주지를 거쳐 진도 용장사에서도 살았다. 뒷날 그이는 형편없는 무뢰승으로 재물만 탐했다고 기록되지만, 남쪽지방에서 쓸만한 청년들과 무신정권의 재정확보에 큰몫을 감당했음이 틀림없다.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된 최씨네 농장이 경상도와 전라도 남해안에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특히 전라도 승주, 보성, 강진 등과 진도에 최씨농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최항이 기생에게서 태어난 서자이지만 최씨정권의 3대 집권자가 된 배경에는 이같은 공헌이 아버지 최우로부터 후계자로서의 자질로 인정받았던 때문이라 하겠다.

 

 

<진도 배씨 배중손 장군>

가끔 배중손 장군의 출생지가 거론되는데 강화도에서는 그곳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러나 최항이 진도에서 걸출한 총각 배중손을 발견할 수는 있다. 게다가 진도에는 진도 배씨 토성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개성에 따라가서 최항의 호위무사로 성장하다가 8년간의 최항 집권기에 핵심 무사가 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특히 바다 이야기를 할 때 손벽이 제대로 맞았다. 강화도 바다나 진도 바다나 물은 하루에 두 번씩 써고 들고, 조금과 사리가 흐름의 속도를 만든다. 그리고 바다는 어려서부터 배중손의 것이었다.

최항과 배중손은 내륙세력인 몽골과 3면이 바다이면서도 안에서만 싸우는 몽골의 꼬봉들을 치우고, 고려 해양제국을 건설하자는데 뜻이 맞았을 것이다,

 

 

<전 왕온의 묘>

진도읍에서 의신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왕무덤재다 왕의 무덤이 있다. 그런데 안내판은 ’전 왕온의 묘‘ 즉 왕온(王溫)의 묘로 전(傳)하는 무덤이라 했다. 1988년 12월 28일 의신면 침계리 산45번지 이곳을 전라남도가 기념물 제126호로 지정한 이름이다.

실증되지 않았다 하여 전할 傳자를 붙인 내력은 많은 역사문화유산에 해당되어 앞으로 재검토 대상이다. 그러나 명색이 고려정부의 임금인데 본명 그대로 왕온의 무덤이라 했다. 온왕(溫王)도 아니다. 진도 고려정부가 몽골에 대항한다는 의미로 온왕을 황제라 하여 제(帝)를 썼다는 점이 거론된다. 묘 앞에 놓인 커다란 상석에 글자가 없으니 걸맞는 내용을 새길 필요가 있겠다.

강화도에서 배중손 노영희 유존혁 등 삼별초 지도부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승화후 왕온은 고려의 정통 왕족이다. 본관이 개성이며 승화(전주) 제후에 봉해졌다. 현종의 8대손으로 영녕공 왕준(王綧)의 큰형님인 그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올 때 아들 환(王桓)과 함께 했다.

용장 왕궁이 무너지던 날, 왕은 말을 타고 읍내 남산을 넘다가 붙잡혀 계곡으로 끌려갔다. 연합군의 몽골 대표 홍다구(洪茶丘)와 고려측 왕준의 두 아들 왕희 왕웅과의 논쟁이 벌어졌다. 희와 웅 형제는 진도로 출발할 때 아버지 왕준으로부터 명령받은 것이 있었다.

“이유 없이, 너희 큰아버지를 살려 개성으로 모시고 오너라!”

그런데 홍다구는 목을 쳐야 한다고 날뛴다. 사연이 있었다. 홍다구의 아버지 홍복원은 그집안 혈통대로 고려인으로서 몽골에 붙어 과도충성으로 몽골의 벼슬아치가 되었다. 홍다구의 조부 홍대선도 고려 고종 때 몽골에 투항한 고려로 보자면 배신자이다.

영녕공 왕준은, 여몽전쟁에서 이긴 몽골이 왕자를 보내라 하자 몰래 대신 보내진 왕족이었다. 그렇게 고려 왕자로 살다가 몽골 황족의 딸과 결혼했다. 그런데 홍복원이 왕준을 너무 모함하자 속상한 부인이 참다못해 뭉케 칸에게 고했다. 뭉케 황제는 버럭 화를 내더니 황실병사들에게 당장 가서 보이는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라고 명령했다. 홍복원은 발로 채이고 밟혀서 비참하게 죽었다. 아들 홍다구가 왕준과 두 아들에게는 손을 댈 수 없어 그의 형님 왕온을 죽이겠다고 진도정벌에 자진한 터였다. 논쟁을 벌이던 홍다구는 눈이 뒤집혔는지 온왕과 아들 환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 골짜기를 뒤로 한 동네가 의신면 사천리 논수동(論首洞) 마을이다. 논수골로 불리던 곳이다.

 

<왕자의 묘>

왕무덤재 온왕의 묘 바로 밑에 말무덤이 있다. 왕이 탔던 말의 무덤이라 전한다. 그런데 왕자의 무덤은 없다. 왕환은 진도에 오면서 왕자가 되었다가 아버지와 함께 논수골에서 죽었다. 진도사람들이 두 분의 무덤을 몰래 만들었지만 개경정부로 보자면 역적이라 너무 위험하여 아들 묘는 말무덤이라 한 듯싶다. 물론 왕의 무덤도 한참 지나서야 구전으로 등장했을 것이다.

당시 온왕이 48세였으니까 왕자 왕환은 20대였다고 보아진다.

 

<굴포리 전쟁 이야기>

굴포리에는 전쟁 이야기가 전해온다. 도망 온 자도 쫓아온 자도 누군지 모르는 그저 이전 지전 이야기다. 굴포리는 윤선도가 막았다는 현재의 원둑 이전에도 신동 쪽에 뿔치가 있어 가까운 거리였다. 도망치는 무리가 굴포로 모두 건너온 뒤에 추격 무리가 도착했는데 그때는 물이 들고 있었다.

굴포 사람들은 공격측과 맞서 싸웠다. 여자들은 치마에 돌맹이를 담아왔고 남자들은 그 돌을 던져 물을 건너오는 공격자들을 저지했다. 전쟁이야 어떻게 끝났던 이때부터 마을 안에 할머니당을 만들어 정월 보름날이면 원둑에 있는 할아버지당과 함께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한편 서쪽으로 멀지않은 곳에 국가사적 127호 남도진성이 있다. 입구 안내판에는 삼별초 전쟁 때 배중손 장군이 이곳에서 최후를 마쳤다고 소개했다.

 

<류큐왕국을 세운 진도 고려정부>

배중손 장군은 굴포 전투에서 또는 남도포에서 죽었다는 말도 있고, 남도에서 배를 타고 류큐 즉 오키나와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떻든 류큐왕국을 세운 세력이 진도 삼별초였다는 주장을 그곳 사람들이 먼저 하고 있다. 우라소에 성과 류큐의 수도 슈리성 등 여기저기서 고려 흔적들이 보인다. 용장궁터 기와하고 똑같은 수막새 기와들이 나온다.

어떤 암기와에는 계유년에 고려 기와쟁이가 만들었다(癸酉高麗瓦匠造)고 새겨있다. 1273년이 계유년이니 이미 수년 전 고려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남산, 중산, 북산 3개의 세력이 중산국을 중심으로 류큐왕국을 세우도록 정리를 했다고 보겠다.

그들은 그곳 사람들에게 기와 제조뿐 아니라 축성, 조선, 건축과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 삼별초가 진도에 오기 전에 이미 궁궐건물을 세웠는데 그것은 장차 진도를 중심으로 해양제국을 건설한다는 계획이었음을 뜻한다. 이때 개척기술진이 오키나와로 진출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는 강화도 정부의 실권이 배중손 장군에게 집중해 있었다고 본다.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

진도 고려정부는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냈다. 동경대학교 사료편찬소에는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라는 문서가 있다.

1271년 가마쿠라 막부에서 삼별초 진도(珍島)정부가 보낸 외교문서를 12조목으로 정리한 보고서이다. 일본의 연대기인 『길속기(吉續記)』기록에는 1271년 9월 2일 고려첩장(高麗牒狀)이 도착했다고 하여 삼별초 정부와 원종(元宗) 개경정부를 구분하지 못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1268년과 1271년에 외교문서를 보낸 것이 몽골과의 관계 등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두 정부, 즉 몽골과 강화(講和)한 원종의 정부와 그에 반기를 든 삼별초 진도 정부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두 외교문서가 몽골에 대한 태도 등에서 상반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해가 되지않는 점들을 조목별로 정리한 것이다. 몽골은 매우 위험한 나라다. 고려가 수도를 옮긴다. 진도로 천도했다 등의 요지를 말하는 문서로 진도 고려정부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진도 고려정부가 일본정부에 국서를 보내 대몽항쟁에 연대 내지는 동맹을 제안했던 것이다.

 

명량해전

 

<1271년 이전부터 울두목이었다>

진도 고려정부가 남해안의 해운로를 장악하자 고려 조정이 얼마나 타격을 받았는지가 원종 12년(1271년)에 몽골에 보낸 국서의 한 대목에 나온다.“경상도와 전라도의 공부(貢賦)는 육로로 운반하지 못하고 반드시 수로로 운반하는 것이나 그 인후(咽喉) 좁은 목을 삼별초가 차지하고 있으므로 배가 지날 수가 없습니다.”가끔 논란되는 울돌목, 울둘목, 울도목, 울두목, 울둠벙 등의 지명이 당초 ‘울두(咽喉)’에서 기인함을 알 수 있다. 물이 울면서 돈다하여 울돌목이라 했다지만 옛날부터 울두목이라 한 것은 이처럼 최소한 고려 때로 거슬러 간다.

진도사람들은 그 전부터 울두목이라 하여 고려의 문서도 그에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우수영 초등학교 교가는 ‘울도목’이라 한다.

 

<전국적으로 진도고려에 손 내밀어>

삼별초 중심의 고려정부가 진도를 거점으로 자리를 잡자 그 세력은 제주도를 포함한 남해안 일대에 뻗쳤다. 30여 개의 섬이 삼별초 수중에 있었는데 남해도에는 대장군 출신 유존혁(劉存奕), 완도에는 송징(宋徵)이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다. 합포(마산)·금주(김해)·동래·거제·장흥·나주 등 전라·경상 연안의 내륙지역을 점거하는 등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는 일종의 해상왕국이었다. 진도에 입거한 지 3개월 후인 원종 11년 11월 삼별초군은 제주도를 함락하여 안전성 높은 후방지역까지 갖게 되었다.

이처럼 남부지역에서 삼별초가 정통 고려정부를 자처하면서 독자적 세력을 확보하고 있을 때 내륙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농민·천민들의 집단적 움직임이 있었다. 원종 12년 정월 경상도 밀양에서는 박경순, 방보, 계년 등이 군민들을 불러모아 밀성과 금주의 수령을 죽이고 청도감무를 목베는 등 경상지역 일대를 점거하면서 세력을 확대했다. 이들은 민란봉기 이후 장차 진도의 삼별초정부에 호응하려 했다.

경남지역에 뒤이어 개경에서는 관노 숭겸 공덕 등이 무리를 모아 몽골에서 파견된 다루가치와 개경정부의 고위 관직자들을 살해하고 진도에 투항하고자 했다. 이러한 개경에서의 봉기소식이 전해지자 경기도 대부도(大部島)에서는 주민들이 몽골인 6인을 살해하고 봉기했다. 이처럼 내륙의 여러 지역에서 반정부세력이나 반몽골 항전세력들이 일어나 진도정부와 연결하고자 했다. 삼별초정권의 위세가 떨쳐지자 여러 지방에서는 관원들이 진도에 들어가 삼별초정부의 요인과 온왕을 알현하는 형편이었다.

 

<진도 고려정부가 무너지던 날>

여·몽연합군의 최후작전은 좌·우·중 3군으로 나눈 공격이었다. 삼별초는 몽골군에 대한 연이은 승리와 내륙 각 지방에서의 호응 등으로 기세가 너무나 고무되어 있었다. 그런 나머지 여·몽군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을 가졌다.

1271년 5월 15일, 김방경과 흔도는 중군을 이끌고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으로 상륙해 삼별초의 주력을 모두 끌어냈다. 흥다구와 왕희 왕웅의 좌군은 노루목(獐項)으로, 김석 고을마 우군은 동편 군직기미로 상륙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기습공격에 성안의 지휘부는 크게 혼란에 빠져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50채 넘는 궁궐건물들이 불타고 있었다.

몽골은 진도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위하여 사전 상세한 정보를 확보하고 면밀한 작전으로 삼별초군의 허를 찌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게다가 화약을 사용한 최초의 폭탄을 본국에서 가져왔다. 이러한 무기는 수년 후 일본정벌 때 사용되어 진도 공격에서 먼저 시험되었다고 알려진다.

 

<만길재 고려둠벙>

첨찰산 산골물이 영산리 침계리로 지나는 우항천은 창포리에서 더욱 커진다. 물길은 만길재 아래 바위벽 밑을 돌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둠벙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도굿대를 넣으면 금갑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었다.

고려 몽골 연합군이 용장으로 넘어오자 왕실에서는 서둘러 여인네들을 먼저 피난시켰다. 높은 분들의 부녀자들이 모이자 일개 부대가 되었다. 남쪽 금갑포로 도망가는데 만길재에 이르러 뒤돌아보니 멀리 먼지가 보인다. 추격하는 공격군이겠다. 시녀가 양쪽에 붙은 한 부인이 일행을 정지시켰다.

“ 여러분! 남자들이 우리를 살리려다 지체되면 어차피 붙잡힙니다. 우리도 결국 잡혀서 죽임을 당하든가 몽골 놈들에게 몸을 더럽히게 됩니다. 우리가 남자들을 살리고 대업을 돕는 길은, 그리고 고려를 위하는 길은 저 고려 둠벙으로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저와 뜻이 같다면 함께 갑시다!”

말을 마친 여인이 선두로 내려가더니 합장을 하고는 둠벙으로 뛰어내렸다. 모든 여인들이 뒤따랐다.

남자들이 이곳에 당도하니 둠벙은 시체로 가득했다. 사연을 전해들은 그들은 여인들의 염원대로 기어이 고려 해양제국을 세우겠다고 더욱 다짐했다.

배중손 장군은 삼별초를 이끌고 가다가 만길 고개를 넘은 뒤 김통정 장군을 불렀다.

“ 김 장군! 나는 저 앞 죽청에서 연합군 추격부대를 오른쪽 길로 유인할테니 당신은 우리 주력을 이끌고 탐라로 가시오! 금갑 포구에서 배를 타시오! 탐라나 류큐에 가서 부디 우리의 뜻을 이루시오!”

“ 그쪽은 어디로 가는 길이요? 배장군!”

“ 내가 잘 아는 길이니 걱정 말고 빨리 달려 배를 타시오!”‘

이렇게 하여 삼별초 주력은 무사히 금갑을 떠나 제주도로 향했고, 배중손 장군은 기다리고 있다가 연합군이 보이자 죽청에서 오른쪽으로 공격군을 유인했다. 용호리로 해서 굴포쪽으로 힘껏 달렸다.

배중손 장군은 만길재를 넘으면서 우항천 깊은 둠벙이 여인네 시신으로 가득한 것을 목격했다. 그녀들은 자기들을 챙기느라 남자들까지 모두 죽는다고 판단하여 과감히 몸을 던졌음을 짐작했다. 진도 고려의 대업을 달성하도록 목숨을 버린 여인네들이었다. 순간 그는 삼별초 주력부대를 온전히 살리기 위해 김통정 장군에게 실권을 넘기기로 했다. 그리고 자기는 대장군 깃발을 더 높이 세우고 공격군을 서쪽으로 끌고 갔다. 대업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궁궐 여인네들의 고려둠벙 집단자결은 이를 목격한 모든 무사들에게 집단맹세의 결기를 더욱 크게 안겨 주었다.

근년까지도 여인네 울음소리 때문에 해가 지자마자 오가는 사람이 끊어지던 곳이다.

 

 

용장성의 재발견과 활용방안

우리는 지금껏 삼별초와 배중손 장군을 앞세웠는데 진도 고려정부와 진도 고려를 이끈 온왕을 보다 테마로 삼아야 된다. 진도에 정통고려가 있었음을 보다 자주 거론해야 한다.

왕권 위주의 해석인 ’삼별초 난‘ ’동학 난‘ ’광주 폭도‘ 등의 시각으로는 진실을 크게 벗어난다. 정확한 진단과 분별력이 다음 세대들에게 넘겨줄 자산임을 알아야겠다.

예컨대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퇴각하던 용장성 안의 궁궐은 강화도에서 내려온지 9개월 만이었다. 우선 국가의 질서를 잡아야 하고 항몽정신을 키워야 했다. 역사 깊은 나라의 궁궐처럼 여기, 급창, 궁녀들이 제대로 갖추어질 리가 없다.

강화도에서 살던 온왕의 부인으로부터 삼별초 지도층 부인들과 모든 상류층 인사들의 부인이 함께 도망치다가 유력한 어느 부인의 제안에 따른 것이다.

여인들 간수하다가는 남자들까지 다 죽는다고 판단하여 여인들이 함께 자결을 택했다는 얘기다.

그런대 삼별초 난을 일으킨 폭도라는 기존개념으로 비하하여 지도층의 여인들을 여기, 급창, 궁녀로 몰아버렸다. 이에 따라 여기 급창 둠벙에서 궁녀둠벙으로 바꾼 것을 ’고려 둠벙‘으로 바꾸어 보았다. 진도에 고려정부가 있었는데도 ’고려‘간판 하나 찾을 수가 없다. 그야말로 다시 잃어버린 왕국이다.

이제부터 진도 용장성, 진도 고려정부, 정통 고려정부 등 방대한 용장성 콘텐츠를 지역소멸 진도대책 1호로 삼아야 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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