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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유배 문화역사의 전형 ‘진도’
한국 문화유배 문화역사의 전형 ‘진도’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19.11.27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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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유배문화와 그 활용 방안 모색」

전남 국립유배문화관 설립 추진해야”

“불모의 땅에 더 화사하게 핀 꽃”(김종회. 경희대 교수)

진도는 한 때 불모의 땅이었다. 한양이라는 도성과 가장 멀리 자리한 변방 진도. 나라를 지키는 수문(守門)의 역할을 천년이 넘도록 해온 의롭고 은혜로운 땅이었다. 가장 어려울 때 가장 앞장서 싸우고 지켰던 바로 그 백성들의 의기의 함성이 아직도 소용돌이치는 곳 그곳이 보배의 섬 진도였다. 그러나 정부는 기회를 박탈하고 거주를 제한시켰다.

아픔에 배인 땅은 역사의 향을 품는다. 사람도 꽃도 마찬가지다.

이곳 진도에서 지난 해 7월 12일 오전 10시 전남문화원연합회(회장 황호용)가 주관하고 진도문화원이 주최한 『호남의 유배문화와 그 활용 방안 모색』이라는 주제로 제30회 향토문화연구 심포지엄을 가진 것은 매우 뜻 깊은 행사였다. 이날 진도군에서는 진도민속문화예술단(예술감독 김오현)이 식전행사로 진도북놀이와 남도민요 등을 참석자들에게 선보였다. 유배문화가 단지 하향식이 아닌 지역주민과의 소통과 발양의 모색에서 진도처럼 가장 독특하고 특히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한국은 물론 인류문화를 한층 드높인 사례로써 더욱 주목받아야 하며 더 널리 알리고 다각적인 연구가 밑받침되어야 할 것으로 내 보인 것이다.

이는 이날 이동진 진도군수가 “전국 최초 민속문화예술특구로 진도가 지정”되었다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이는 단지 유배문화가 단순한 영향을 벗어나 수용자의 능동적 자세와 활용을 이제 문학은 물론 스토리텔링 등 문화융성 자원으로 더 높은 삶의 원동력으로 삼자고 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대목이었다.

이에 앞서 박정석 당시 진도문화원장은 “진도는 외세에 결연히 싸운 삼별초 항쟁과 명량대첩을 이룬 호국의 땅 진도”라는 것을 강조하고 “수많은 유배자들의 귀양살이 고초와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학문연구”가 진도 동시대 청년들의 학구열과 연계되어 많은 문화와 학문성과로 이어져 온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민속예술과 전통 시서화창으로 승화된 진도의 문화예술은 유배문화의 영역을 뛰어넘어 오늘 21세기에 인류의 전형적인 대동공동체 구현의 실례가 되고 있음을 알렸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는 ‘유배문화의 문화사적 가치’라는 주제로 “전남 국립유배문학관 설립을 추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김종희 좌장은 “무엇보다 옷감이 좋아야 한다”면서 질 좋은 자료 확보가 우선이다는 입장을 내보였다.

이는 매우 진도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공감을 주었다. 종합토론에 나선 박주언 진도 향토사학자이자 진도문화원 부원장은 “전국에서 진도군은 유일하게 진도학회를 구성 매년 학술회를 갖고 있다”면서 “조선시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유배자들이 진도로 왔다”면서 이는 문학적 자료가 될 수는 있지만 “낭만적 개념이 아니다”고 규정하며 특히 진도의 대표적인 유배자 소재 노수신을 거론하며 “개짖는 소리에도 사약이 내려오는가” 불안해 한 점도 있었으며 이미 발표한 진도유배자 수는 오류가 있는 것 같다며 221명에 현재 22명을 더 조사 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는 지역 향토문화사와 중앙 학계와의 더 긴밀한 관계소통이 필요하다는 뜻을 내보였다.

한편 이날 김경옥 교수(목포대)는 “유일한 역사 전공(공문서 중심)으로 진도에 관한 연구와 관심을 내보였다. 김대현 박사는 ”진도의 221명에 이른 유배자들의 각 마을마다 흔적과 표식이 뒤따라야 한다.”는 의견을 내보였다. 이는 진도군이 현재 진도유배문화관 설립과 진도문학관 건립 등과 관련해 지방지자체와 지역향토문화단체와의 더 적극적인 협력체제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였다.

이미 경남 남해군은 유배문학관을 설립 운영 중인데 대부분 서포 김만중에 치중되어 있지만 진도군 유배자중 최근 한국차의 활용방안을 최초 기록한 ‘동다기(東茶記)’의 저자 이덕리(李德履·1728~?)는 1776년 4월 정조 즉위 직후 진도에 유배 왔다. 불과 두 해 전 종2품 오위장(五衛將)의 신분으로 창경궁 수비의 총책임을 맡았던 그는 결국 진도 유배지에서 근 20년 가까운 유배 생활 끝에 비운의 생을 마친 듯하다.

그의 시문집 '강심(江心)'에 '실솔부(蟋蟀賦)', 즉 '귀뚜라미의 노래'란 작품이 있다. 그는 진도 통정리(桶井里)의 귀양지에서 거북 등처럼 갈라진 흙벽 틈에서 밤낮 우는 귀뚜라미 소리를 깊이 공감하며 들었을 것이다. 그 절망의 시간을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마음이 꺾이고 뜻이 무너지자 멍하니 식은 재 위에 오줌을 눈 것처럼 다시는 더운 기운이 없었다. 또 어찌 능히 귀뚜라미가 혼자 울다 혼자 그치면서 스스로 그 즐거움을 즐기는 것만 같겠는가?"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절망의 나락 속에 밀어 넣는 대신 그 골방 안에서 국방 시스템에 관한 놀라운 제안을 담은 '상두지(桑土志)'를 저술했다. 그 재원 마련을 위해 중국과의 차무역 구상을 제시한 '동다기(東茶記)'를 지었다. 다산은 그의 저술을 보고 놀라 자신의 '경세유표'에 인용했고, 초의는 '동다송'에 '동다기'를 끌어와 자기 주장의 근거로 내세웠다. 다산의 19년 유배 못지않게 이덕리의 긴 유배도 뒤늦었지만 이제 큰 성과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날 설진석 진도요양원 원장은 “오늘 호남 유배문화 연구에서 진도 유배자 연구가 좀 미흡해 보인다. 면사 조선시대 고려시대까지 236명이 넘는다.”며 학자들의 통계에 아쉬움을 지적하기도 했다.

학술대회라는 것은 단순히 발표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 많은 참석자들의 생각이며 이를 단순 담론에 멈추지 않고 유배가 과연 굴레가 아닌 ‘불모의 땅에 더 화사하게 핀 꽃’의 씨앗들을 어떻게 뿌려야 할 것인지의 과제를 준 심포지엄으로 볼 수 있었다.(박남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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