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르게 나무가 무성한 산의 모양을 닮은 맑고 깨끗한 한시 700수 -
[2024. 08. 16(금) 10:00 진도문화원 회의실에서 출판기념회]
한시집에서 발췌한 한시인(작가)의 말을 보면,
필자의 생애를 회고하면 식량난으로 몹시 살기가 어려웠던 일제 식민지 시절의 유년기, 동족상잔의 6.25 전란에서는 이웃 사람끼리 살상하여 처참한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현장을 보았다. 소년기는 어려운 일로 고생이 많았다.
청년기에 들어선 19세 때에는, 맏형이 22세에 요절하여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을 맛보았다. 부모님의 권고로 22세에 학문에 정진하지 못하고 일찍 결혼하고 그 이듬해 가을에 양친께서 한 달 간격으로 귀천(歸天)하여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으로 장례식에서 처절하게 통곡하였다. 이후 가족의 살길을 맡아 생활전선에 몰두하였다. 29세의 늦은 나이에 전남도에서 시행한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진도군 산하 공무원으로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부지런하고 정성스럽게 30여 년 봉직하다가 IMF 시기인 1998년에 명퇴(名退)하였다. 퇴직 후 외따로 떨어져 가난하고 누추한 집에서 생활하다 신병으로 1년여 동안 고생하다 증상이 호전되어 각종 사회활동에 참여하였다. 벽지한촌(僻地寒村)에서 일도 없이 소일하다가 친한 벗의 권유로 국화 배양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뜻밖에 신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다행히 일 년이 지난 후 증상이 호전되어 군정(郡政) 각종 자문역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진도문화원 이사, 감사 역에도 선임되어, 오랜 기간 대대로 살아온 진도의 문화예술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진도향교의 장의(掌議), 감사 역에 수년간 선임되었으며 2013년 성균관유도회 진도지부장에 선임되어 사문진작(斯文振作:유학을 떨쳐 일으킴)을 도모하였다. 또한 진도의 풍습 순화에 일조하였다. 그러나 홀여과극(忽如過隙:갑작스럽게 틈을 지나가는 듯한 세월의 빠름을 비유)한 세월의 빠름에 성사된 것 없이 2년 후에는 미수(米壽)에 이르게 되어, 탄서(歎逝:세월이 지남을 탄식)하다가 지난 십여 년 자음한 한시를 상기하고 한시집 발간에 착안하였다.
노경에 소일거리도 없이 오늘에 이르렀는데, 2009년 전남대 평생교육원 진도 캠퍼스에 한시 과정이 개설되어 서울에서 서예와 한시를 다년간 습득한 후 귀향한 고산(高山) 김민재(金珉在) 선생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한시를 학습하여 입문 3년 차에 한시 1백수 자음 기념 송축시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한시 학습 이후 자신의 행동과 심성이 개량(改良)됨을 인지하였다. 사물을 심도 있게 관찰하고 심사는 적려(寂慮:쓸쓸하고 조용한 생각)한 상태를 지니게 되었다. 한시 습득 후 약 700수 가까이 졸시(拙詩)를 모아 한시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끝으로 소생의 시첩 발간에 축사를 보내주신 사)한국한시협회 창해(蒼海) 지재희(池在熙) 이사장과 김희수 진도군수, 박금례 진도군의회의장, 오판주 진도문화원장, 박정석 사)한국한시협회진도지회장에게 감사드린다. 본 시첩발간(詩帖發刊)에 음양으로 애써주신 스승 고산 김민재 선생님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무송출판사 허갑균 대표와 임직원 여러분의 노고에도 감사드린다. 본 시첩의 독자 여러분께서도 명철보신(明哲保身:이치에 밝고 분별력이 있어 적절한 행동으로 자신을 잘 보전한다)으로 안빈낙도(安貧樂道: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킴)하기를 기원한다.
2024(甲辰). 8월 16일 진도 의신면 초사리 취람정사(翠嵐亭舍)에서 욱정(旭亭) 신주생(申周生) 돈수(頓首: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
한시집을 넘기다 눈에 띄는 한시 한 편을 감상하면,
雲林池避暑(운림지피서)
小暑猛威炎帝催(소서맹위염제최) 더위를 재촉하는 소서 절기에
雲林古澤熱廻徊(운림고택열회회) 피서 차 운림산방 연못을 찾아갔네
堤塘細柳靑葱動(제당세류청총동) 못 둑에 수양버들 하늘거리고
淵沼荷蓮紅白猜(연소하련홍백시) 못 안의 연꽃은 홍백을 다투네
樹格黃鶯羅杼織(수격황앵라저직) 황조 버들가지 사이 북질하여 비단 짜는데
池心錦鯉蕾婆豗(지심금리뢰파회) 물속의 잉어는 꽃대를 흔들어 춤추게 하네
適時少雨凉風伴(적시소우양풍반) 때마침 가랑비는 양풍 따라 내리니
轉滴英脣洗淨埃(전적영순세정애) 꽃잎에 물방울 굴러 맘속 티끌도 씻어주네
2016년 병신 7월7일 於雲林山房(어운림산방) 蓮池(연지)
신주생(申周生:1939, 진도 의신면) 선생은 본관(本貫)이 평산(平山)이다. 아호(雅號)는 욱정(旭亭), 초정(草亭)이며, 당호(堂號)는 취람정사[翠嵐亭(精)舍]다. 1954. 월남 한학자 송암(松菴) 김달식(金達植)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57. 목포 문태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960. 하가월 여사와 결혼하였다. 1962. 육군에 입대하여 1964. 육군 병장으로 제대하였다. 1968. 전라남도 지방공무원 5급 공채에 합격하였다. 1968∼1998.(30년간) 진도군청 산하 공직에 근무하였다. 1993∼1995 전남 진도군 의신면장으로 근속했다.
명퇴 후 2008. 평산신씨 진도화수회장을 선임되어 역임하였다.
2009. 고산(高山) 김민재(金珉在) 선생 문하 한시 수학 입문, 2011. 제3대 옥주시사(沃州詩社) 회장 선임, 2013. 성균관 유도회 진도지부장, 2016. 진도군 목우회 부회장 역임
수상 경력은, 공직기간 중 진도군수 표창 5회, 전남도지사 표창 3회, 총무처 모범공무원 1회 선발, 대통령표창 1회, 성균관유도회 전라남도 본부장 표창
예술 분야의 수상은, 사)한국예총 문화예술인상 수상(진도지회장), 전남 문화원연합회 회장 표창장 수상,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원장 표창장 수상, 진도문화원장 공로패 수상, 전국한시백일장(진도) 가작 5회, 참방 1회 입상,
사)한국한시협회 공모전(시협풍아) 가작 1회 입상, 사)한국한시협회 회장 감사장
욱정 신주생 선생의 자녀는 3남 2녀다. 선생은 현재 전남 진도군 의신면 초사리 129에서 살고 있다. “이웃과 더불어 살자. 모든 사람과 다투지 말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살자는 인생관을 가지고 노력하자”라는 인생철학을 갖고 있다.
기뻤던 일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무원 시험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한 일이며, 슬펐던 일은 19세 때 22살인 형님이 돌아가셨다. 그 후 2년 뒤 한 달 간격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시어 슬픔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인생을 끝마치는 순간까지 누구에게나 도움을 주고 싶고 가족들이 큰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소박한 꿈을 피력하였다.
출판 업무에 도움을 준 사위(광주, 김동국)는 “이번 한시집 발간으로, 장인어른을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되어 기쁩니다”는 말로 고마움을 표하였다.
전남대 평생교육원 진도 한시 과정은 고산 김민재 선생의 뒤를 이어, 도곡(道谷) 변흥연(邊興淵) 선생이 튼실하게 지도하고 있다. 진도 한시 문화가 끊임없이 계속 이어져 훌륭한 한시인 들이 배출되기를 바란다.
※ 기사 내용은 신주생 선생의 한시집에 기재된 내용을 발췌하여 재편집함.박영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