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9-13 19:27 (금)
박주언 (향토사학가)-지역소멸 진도 대책 (8)
박주언 (향토사학가)-지역소멸 진도 대책 (8)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4.08.22 17: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역소멸 진도 대책 (8)

진도 향토지식재산(문화유산 분야)

 

                                                                                                                       박주언 (본지 지역소멸 진도연구소장)

 

원래의 진도, 동북부 역사문화를 정리해야

고읍성, 용장성, 오산평, 배들이 해안 등의 진도선사부터


<진도사람들의 87년간 피난살이, “그랄랑 거이지라”>

1350년(고려 충정왕 2년) 정부는 왜구의 침탈로부터 섬주민들을 보호코자 진도, 압해도, 흑산도 사람들을 육지로 피난시켰다. 진도는 군수로부터 전체 백성들이 ‘진도군’ 간판을 들고 영암으로 떠났다.

진도사람들은 영암 달애기, 현재 시종면 월악리 일대에서 명산, 현재 시종면 구산리 일대를 옮기면서 살았다. 그리고 해남 삼촌, 현재 삼산면 일대로 또 옮겨 피난살이를 이어갔다. 무려 87년을 떠돌았다.

그동안 진도는 1409년 해남군과 합병하여 해진군이 되었다가, 옛고향 진도로 87년만에 다시 들어가 살도록 입도허락이 난 1437년에 다시 진도군이 되었다. 그러니까 28년 동안 해진군이었다.

1350년 전체 군민이 영암으로 피난을 떠날 때 3살짜리가 어머니 등에 업혀서 함께 갔다면 90세가 되어서야 돌아온 셈이다. 대부분의 진도 피난민들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보겠다. 한국전쟁 때 진도로 피난왔던 이북사람들을 보면 피난살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된다.

필자의 초등학교 친구 이한우는 황해도 장연군 장산곶에서 살다가 10세에 진도로 피난왔다. 처음 의신면 거룡리에서 살았는데 동네 아이들이 피난민이라고 놀리고 더러는 때리는 바람에 피난민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연구를 했다. 황해도 사투리는 금방 탄로가 나니까 진도 사투리를 배웠다. 맨처음 익힌 말이 “그랄랑거이지라!”였다.

그런데 남의 자리에 끼어들어 느닷없이 이 말을 하고 다녀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제 그 친구도 84세가 되어 서울에서 살고 있다.

지난 8월 13일 12시에 군내면 연산리 우정가든에서 진도 이북5도민연합회(회장 최성일) 총회가 있다고 연락했더니 먼길을 달려 참석했다. 60여 명이 모였는데 3세대까지 모였고 피난 당사자들은 모두들 노인이었다.

<진도의 뿌리는 동북방면, 군내면 동부와 고군면 북동부>

옛날 피난 이전에 진도에서 살았던 4성 즉 김해 김, 창녕 조, 밀양 박, 무안 박씨 토호후손들이 인척관계 등 연고자 지인들과 함께 복군운동을 벌였다. 보통 ‘조김박박’이라 한다.

따라서 이들은 진도 4대 성씨가 되어 당연하게도 실권을 장악했다. 유교사회에서 공자님 제사를 모시는 중앙 성균관 산하 전국 군현의 향교는, 중등교육기관으로서 향토 인재를 육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 서울에 종묘가 있어 열성왕조의 제사를 모시듯 전국 군현에도 조상을 모시는 향현사가 있다. 진도에서는 지금도 위의 4대성씨 입향조 제사를 이곳에서 모신다.

진도향교와 향현사 제사에서 제관은 당연히 이들 4대성씨들이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이들의 종가들은 거의 고읍이던 고군면 일대에 살아오고 있다. 진도 역사 문화의 뿌리가 진도의 동북방면을 토대로 한다.

 

진도읍 향현사

 

<고성은 흔적을 잃어가는데 학술조사 한 번 없다>

1990년대 초 필자가 발행하던 「진도사람들」에 역사편을 개설하여 저명한 역사학자에게 ‘진도의 역사’편을 의뢰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기는 그 글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왜냐면 진도는 한 번도 ‘선사 조사’에 대한 용역을 수행한 적이 없는데 누가 감히 ‘진도의 선사’부터 글을 쓰겠냐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주위에 드러나 있는 가시적 자료는 해마다, 아니 날마다 사라져가는데 학술조사를 하지 않는다. 결국 많은 것들이 당초부터 없었다는 얘기가 되어버린다.

그 무렵 필자는 광주박물관 모 연구원을 만나 이 문제를 알아보았다. 만약 박물관 같은 연구기관에서 조사를 한다면 현재 나타나 있는 자료의 20배 숫자의 결과를 얻는 것이 상례라고 했다. 따라서 조사가 늦을수록 그만큼 결과물이 빈약해진다는 얘기였다.

 

<진도에서도 동북부 선사조사가 시급해>

진도의 동북부 일대의 선사문화유적조사는 고성(진도향토문화유산 유형6호 고진도성), 오산리 입석(진도향토문화유산 유형1호) 및 고인돌, 마한시대 주거지, 향동 굴바위 마애여래불상, 원포리 도자기출토지로부터 근세에 이른다. 명량대첩 해전 및 해로연구, 전남도지정 문화유산자료 216호 진도정유재란순절묘역, 왜덕산과 유사한 구전지 조사, 그리고 현재의 마을제사나 민속자료, 민요 및 향토예능 등을 시급히 조사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고성(고진도성) 조사는 부분적으로 잔존하는 석축과 농경지에 매몰되었다가 출토되어 없어지는 성곽보전과 함께 고성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구전도 남아 있는지 알아볼 일이다.

선돌이 서 있는 땅주인 임모씨의 20여 년전 이야기가 떠오른다. 옛날 어렸을 때 자기 집에 있던 도장 이야기다. 도장에 반원형으로 손잡이가 붙어있는데 너무 무거워서 겨우 들었으며, 더욱 무슨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도장이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향동 굴바위에 새겨진 양각 마애여래불은 남방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이 역시 학술조사의뢰를 한 적이 없다.

오산리 가정에 산재한 고인돌도 발에 걸리고 생활에 불편을 주면 무심결 없애버릴 수 있다. 특히 중장비가 보급되면서부터는 사람의 힘으로 옮기기 어려운 커다란 바위덩이가 쉽게 다루어진다. 순간에 옮기고 깨뜨릴 수가 있다. 그래서 들판에 널려있던 고인돌들이 없어져버렸다.

 

<고성초등하교 학생들 이야기>

노인들은 시간을 미룰 수 없다. 고성초등학교 정문에 붙은 상점은 항일독립유공자 이기환 선생의 집이다. 필자의 친구 이광석의 부친이어서 오가는 길에 몇 차례 인사드리고 그분의 행적을 소개하는 취재도 했었다. 언젠가 여쭈어볼 일이 또 있어 알아봤더니 광주보훈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것이다. 마지막 인사를 놓칠까 싶어 면회를 했는데 기억이 거의 없으셨다. 몇 달만 빨랐어도 대화가 가능했으리라 싶어 또 후회를 했다.

이분이 항일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사유는 동창이었던 고 조재언 선생으로부터 필자가 들었다. 그날 전교생이 신사참배를 하려고 줄을 지어 교문을 나서는데 결석한 이기환 학생은 자기집 문을 열고 소리쳤다.

느그덜 시방 어디 가냐-?”

“신사참배 가는데 빨리 와!”

“신사참배? 신사에다가 절 할라먼 차라리 나한테 해라-!”

하고 악을 썼는데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이 모두 듣고 기겁을 했다. 결국 이 문제는 상부에 보고되어 퇴학처분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기환 선생처럼 고성초등학교를 다닌 학생들 가운데는 특출한 학생들이 있었다. 항일독립유공자 박종식 선생도 그런 분이다. 이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성초등학교가 배출한 인물들’이라는 책이 나올 만하다. 이 작업도 학교측과 서둘러 착수할 일이다.

벽파정

 

진도에서도 육지와의 관문인 벽파진과, 녹진이나 벌포처럼 왕래가 빈번한 진도의 동북부는 역사문화 측면에서나 사람의 활동면에서 그만큼 육지의 영향과 교류로 인한 수용의 폭이 컸다고 볼 수 있겠다.

여기에 정통고려 왕도이자 해양국 건설의 표상인 용장성을 내세운다면 새로운 진도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2025년 8월 19일 진도고려개국축제 발족과 준비에 진도군 번영회(회장 박종온)가 적극 나서고 있어 많은 군민 향우들의 합류가 예상된다. 이런 이야기들도 진도의 지역소멸을 막는 향토지식재산인 셈이다. 필자는 평생 하는 일이 노인들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서 특이한 것들을 여러 지면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진도를 연구하는 많은 국내외 학자들 사이에서 알려져, 요즘에는 외국에서조차도 진도 이야기를 듣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2024년 9월 21일 오늘도 일본에서 5명이 진도에 도착한다. 이 가운데 해양연구자가 있으니 진도의 바다 이야기도 해달라는 것이다.

팀장은 교토 분쿄대 야스다 히로미 교수로 문화인류학계에서 진도 연구자로 잘 알려진 분이다. 자기도 진도사람이라고 주장하는 편이다.

필자는 교토 코무덤 위령제를 열면서 이분의 도움을 받는다. 야스다 교수가 교토분쿄대 학생들을 행사에 참가시키고, 우리가 행사에 사용한 악기는 그 집에 맡겼다가 다음 해 행사에 다시 쓴다. ‘왜덕산 사람들의 교토 코무덤 평화제’라는 프랑카드가 코무덤 울타리에 붙는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