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소멸 진도 대책 (9)
진도 향토지식재산(문화유산 분야/ 용장성)
박주언 (본지 지역소멸 진도연구소장)
「’25 진도 고려 개국축제」성공을 위하여!!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
- 진도 고려정부에서 일본정부에 보낸 국서 내용은?-
일본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 ‘고려첩장불심조조’ 라는 진도로 보자면 엄청 귀중한 한 장의 문서가 소장되어있다. 1271년(文永 8년) 9월 5일 가마쿠라 막부에 고려로부터 첩장이 전해졌는데 이전 것과는 내용이 완전히 다른 점을 비교한 보고문서다. 앞서의 국서에서 몽골의 위엄과 덕을 찬양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고려는 쿠빌라이 황제의 요구에 따라 일본으로 하여금 몽골에 사신을 파견할 것을 권하는 국서를 문영 5년(1268년)보낸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몽골 황제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나라가 없다는 것을 천하에 알리려 하니 통호하길 권유한다는 것이었다.
문영 8년(1271년) 일본측에 접수된 또 하나의 고려첩장은 원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고려첩장 불심조조’라는 문서를 통해 비교 설명되 있다. 몽골의 덕을 찬양하던 이전의 고려 국서와는 정반대로 위취(韋毳)니 피발좌임(被髮左袵)이니 하는 말로 몽골을 비난하며 또한 '진도'로 천도하였음을 알리고 일본에 병사를 청하는 내용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삼별초는 진도 정부가 고려의 '정통' 정부임을 강조하며 동시에 몽골 침략의 위기를 일본과 공동으로 타개해 나갈 것을 소망하고 있었다.
(원문)
一 以前狀【文永五年】揚蒙古之德 今度狀【文永八年】韋毳者無遠慮云云如何一 文永五年狀書年號 今度不書年號事一 以前狀歸蒙古之德成君臣之禮云云 今狀遷宅江華近四十年 被髮左袵聖賢所惡 仍又遷都珍嶋事一 今度狀端不從成戰之思也 奧爲蒙所使云云 前後相違如何一 漂風人護送事一 屯金海府之兵 先二十許人送日本國事一 我本朝統合三韓事一 安寧社稷 待天時事一 請胡騎數萬兵事一 達兇疏 許垂寬宥事一 奉贄事一 貴朝遣使問訊事(해석)
이전【분에이(文永) 5년(1268년, 원종 9년)】의 장(狀)에서는 몽골의 덕을 찬양했는데, 이번 서장【분에이 8년(1271년, 원종 11년)】의 서장에서는 '위취자(韋毳者, 짐승 가죽 걸친 놈)들은 멀리 내다보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다. 어찌된 일인가?
분에이 5년의 서장에서는 몽골 연호를 썼는데 이번에는 쓰지 않은 일.
전의 서장에서는 '몽골의 덕에 귀부하여 군신의 예를 이루었다' 하였는데, 이번에는 '강화로 천도한 지 40여 년'이나 되었다고 하고 '피발좌임(被髮左袵)은 성현이 꺼린 것'이라 하고 '또 진도(珍嶋)로 천도했다'는 일.
이번 서장 앞부분에서는 (몽골을) 따르지 않아 전쟁이 있게 된 까닭을 쓰고, 뒷부분에서는 '몽골이 고려를 부렸다'고 하니 전후가 서로 다르다. 어찌된 일인가?
'풍랑으로 표류된 자들을 호송한다'고 한 일.
'김해부의 병사 20여 명을 먼저 일본국으로 보낸다'고 한 일.
'우리 본조(고려)가 삼한을 통합했다'고 한 일.
'사직을 안녕케 하면서 하늘의 때를 기다린다'고 한 일.
'수만의 호기(胡騎)를 청한다'는 일.
'흉악한 상소가 도착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 한 일.
'예물을 드린다'고 한 일.
'귀조(일본)가 사신을 보내 방문하라' 한 일.
「고려첩장불심조조」 『한국상대고문서자료집성』(이기백, 일지사, 1987),
<삼별초/ 내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씨 정권의 집권기에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자 용사(勇士)를 모아 매일 밤에 순찰, 단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야별초(夜別抄)라 하였다.
도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야별초를 나누어 이를 잡게 하였는데, 그 군사의 수가 많아지므로 이를 나누어 좌별초와 우별초라 하였다. 또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 온 자들로써 편성된 신의군과 함께 삼별초(三別抄)라 하였다.
삼별초의 정확한 설치연대는 알 수 없으나,『고려사』에 보면, 야별초에 대한 기록은 1232년(고종 19) 처음으로 보이고 신의군 및 좌별초 · 우별초에 대한 기록은 1257년(고종 44)과 1258년에 각각 처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야별초의 설치는 최우 때라 할 수 있지만, 삼별초로 형성된 것은 최씨정권 말엽이라 하겠다. 별초라는 임시군대의 편성은 이미 1174년 조위총의 반란때 나타났다.
삼별초는 날쌔고 용감한 군대로 알려져 전투와 경찰, 그리고 형옥(刑獄)의 임무를 맡았다. 경찰의 기능에 있어서는 당초 삼별초의 출발이 야별초에 있었고, 야별초의 출발이 도둑을 잡는데 있었기 때문에, 삼별초가 도둑을 잡고 난폭(亂暴)을 금지하는 것은 원래의 사명인 것이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전국에 걸쳐 경찰권을 행사하였다. 형옥의 기능에 있어서는 죄인을 잡아서 가두기도 하고 죄를 심문하기도 했는데, 도둑뿐만 아니라 반역 죄인까지도 관할하였다.
군사 활동에 있어서 수도경비대 · 친위대 · 특공대 · 경찰대 · 전위대(前衛隊) · 편의대(便衣隊) 등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1253년(고종 40) 고종이 몽골의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강화에서 승천부(昇天府)로 갈 때 야별초 80명이 평복 속에 갑옷을 입고 뒤를 따랐다. 1260년(원종 1)에는 원종이 몽골에서 돌아올 때 태손(太孫: 후의 충렬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제포(梯浦)에 나가 왕을 맞아 호위하였다.
1254년 몽골의 차라대(車羅大)가 침입하자 경상도와 전라도의 야별초 각각 80명씩을 가려 도성(都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특히 몽골과의 전투에서 처음에는 정부 정규군의 활동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1253년 무렵부터는 정부 정규군의 활동은 거의 없어지고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것은 병제(兵制)가 문란해 정부의 정규군이 무력해진 반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야별초 내지 삼별초를 강화한 데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들은 전투에 있어서 결사적이었다. 야습(夜襲)으로 적을 무찌르기도 하고 복병(伏兵) 또는 협격(俠擊)으로 적을 쳐부수기도 하며, 최선두에 서서 적을 공격하기도 하고 적의 소재를 정탐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사』「병지(兵志)」에는 삼별초가 기동성이 강했기 때문에 권신(權臣)들이 자기들을 수호하고 보좌하는 부대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삼별초는 권신에 의하여 설치되고 권신에 의하여 지휘되었다.
삼별초는 경찰과 전투를 맡아 공적인 성격이 농후한 군대로서, 그 지휘자 도령(都領)· 지휘(指揮) ·교위(校尉)등 국가관료가 배치되었다. 이렇게 사병이면서도 관군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도방(都房)이나 마별초(馬別抄) 등의 사병보다 움직이기가 용이하였고, 이런 데서 김준(金俊)·임연(林衍)·송송례(宋松禮)등이 정변을 일으킬 때마다 중요한 무력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성격의 삼별초는 대몽강화(對蒙講和)가 이루어진 뒤에 이에 반발하여 1270년(원종 11)에 반란을 일으켰다.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우고 정부와 원에 대항하여 진도(珍島)를 본거지로 삼아 3년 동안 싸우다가, 1273년 고려 · 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섬멸당했다.
<삼별초 대몽항쟁과 강화 이후의 고려>
1231년부터 몽골침략이 시작되자 최씨 일가와 지배자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떠난다. 1258년 김준이 최충헌의 증손 최의를 살해함으로써, 최씨 일가 독재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그 뒤에도 지배자는 김준에서 임연, 그리고 다시 임연의 아들 임유무로 무신지배는 승계되었다. 이 와중에 원종은 결국 몽골에 굴복했다. 1270년 음력 5월 원나라에서 귀국길에 오른 원종은 개경환도를 단행하고 원 간섭기의 시작이었다. 임유무는 이에 저항했는데 원종은 삼별초를 회유하여 임유무를 암살했다. 이로써 100년간의 무인시대는 완전히 종말을 고한다.
1270년 개경환도가 임박하자 삼별초는 몽골에 굴복한 왕에게 운명을 맡길 수 없다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원종은 삼별초에게 해산령을 내리고 그들의 명단을 거둬오도록 지시했다. 이 연명부가 몽골군의 수중에 넘어가면 삼별초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삼별초 내에서 이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마침내 1270년 음력 6월초, 개경 환도를 앞둔 시점에서 삼별초의 지도자였던 배중손과 노영희등은 항전을 결정했다.
삼별초는 왕족인 왕온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강화도의 거의 모든 재산과 사람들을 태운 대선단을 이끌고 진도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강화도의 대부분의 시설은 불태워졌다. 당시 진도와 그 인근 지역에는 과거 최씨 정권이 소유한 대규모 농장이 그때까지도 존재했다. 동시에 진도는 경상도와 전라도지방의 세곡이 서울로 운송되는 길목을 끼고 있었다. 이는 세곡으로 운반되는 식량과 자금을 자체 군량으로 쓰는 동시에 군사적인 요충지를 확보하는 셈이었다.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고 해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건설한다. 그들은 또 고려 정통정부임을 자처하면서 일본에 사절을 교환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단행했다. 1270년 음력 11월에 삼별초군은 제주도까지 점령했다.
쿠빌라이는 고종이 죽자 원종이 왕위에 오를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쿠빌라이가 승리하여 5대 칸으로 즉위하고 원 제국을 수립하면서, 쿠빌라이로부터 '몽고는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약속받았다.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옷과 머리에 쓰는 관은 고려의 풍속에 따라 바꿀 필요가 없고
사신은 오직 원나라 조정이 보내는 것 이외에 모두 금지한다.
개경환도는 고려 조정에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압록강둔전과 군대는 가을에 철수한다.
전에 보낸 다루가치는 모두 철수한다.
몽고에 자원해 머무른 사람들은 조사하여 돌려보낸다.
원 세조 쿠빌라이는 불개토풍을 보장했으나 그 외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명칭 모두를 격하했다. 원종 이후 왕은 묘호를 사용할 수 없으며 시호 앞 글자에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에서 '충(忠)'자를 넣고, 황제가 본인을 지칭하는 1인칭인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황제를 부르는 칭호인 "폐하"는 "전하"로, 황제 뒤를 이을 아들인 "태자"는 "세자"로, 황제 명령을 담은 글인 "성지"는 "왕지"로 명칭을 격하했다. 이후 충렬왕 때 각종 관청과 관직 명칭도 모두 격하했다.
* 용장성 활용방안 (1)
‘진도 고려 개국축제’ (안)
축제명; 제1회 ‘진도 고려 개국축제’
주제; =몽골제국과 싸운 해양왕국 진도 고려 !!=
때; 2025년 음력 8월 19일(양력 8월19일 여름축제로 고정할 필요가 있음) - 1개월 축제(각종 한국전통무술 수련회)
장소; 벽파진, 용장성, 진도읍, 왕무덤, 고려둠벙, 굴포, 남도진성, 금갑항
주최; 진도군
주관; 축제 운영위원회(용장리 축제준비위원장, 진도군 번영회장, 전국 향우 회장, 개성 왕씨대종회장, 경주 배씨대종회장, 축제추진위원장, 축제 전 문인, 진도지역소멸대책위원장, 용장성 개발위원장, 국립남도국악원장)
추진; 축제추진위원회(용장리 이장, 진도예총회장, 진도무형문화재보존회 대 표, 진도학회 회장, 진도군립예술단장, 등 20명)
목적; 진도 지역소멸대책
올바른 진도 역사의식 정립
진도 용장권 도약
목표; 진도고려의 기상 다짐(몽골제국과 싸운 가장 작은 나라)
진도 고려의 해양 진출(한국해양산업의 발진기지)
한국전통무술 총본산 구축(한국전통무술의 총집합연수)
내용; 국제학술회의; 오키나와, 몽골, 중국, 한국
입성식; 벽파-용장/ 북 행렬, 온왕 수레, 대신, 삼별초, 진도 고려 백 성, 배중손 장군, 몽골, 일본, 중국(송)
공연; 북놀이, 혼건짐, 씻김, 외국 종목
한국전통무예; 수련대회, 발표회, 기타
왕위 옹립식; 온왕(왕씨 대표)
고려첩장; 사신 출발식
연극; 고려첩장불심조조(진도군립예술단)
공연; 남도국립국악원(기념공연)
백일장 대회; 진도문인협회, 시에그린 박물관
사진대회; 진도 사진협회
다큐영화; 제작 지원
진도 고려왕 알현식; 류큐국왕, 탐라국왕, 기타
만가; 온왕 상여, 배중손장군 상여, 제주삼별초 상여, 몽골군 상여, 오키나와 상여, 고려둠벙 여인들 상여, 진도 고려백성 상여
기타; 포인트 행사 개발
후원; 전라남도, 문화체육부, 해양수산부,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목포대 도서 문화연구원, 한국해양학회 등
기념사업; 진도 고려박물관 건립, 궁극적으로 용장궁터 복원
“진도 고려정부는 한국최초로 자주국가건설을 외쳤습니다. 이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려는 국내외 모든 단체와 개인의 동참을 기다립니다!”
* (가칭)‘진도 고려 개국축제’는 한국 대표축제가 되도록 긴밀히 연락하면서 많은 전문의견을 수렴해 가겠습니다.
<이 축제에 대한 제안이나 참고 지도말씀은 아래 전화로 연락주십시오>
hp 010-6255-5815, e메일 jepark2000@hanmail.net 축제기획실 박주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