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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아리랑 - 예도(藝都:문화예술 수도) 진도 문화·예술은 으뜸 -
진도아리랑 - 예도(藝都:문화예술 수도) 진도 문화·예술은 으뜸 -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4.09.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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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아리랑

- 예도(藝都:문화예술 수도) 진도 문화·예술은 으뜸 -

 

박영관 편집위원

 

무더위가 식을 줄 모르는데 한가위 보름달은 유난히 밝다. 저 높은 곳에 떠서 멀리 비춰주는 신비한 달의 모습을 보면 경이롭다. 때맞추어 사)한국한시협회진도지회(지회장 박정석)에서는 이번에 전국 한시지상백일장을 개최하는데 시제(詩題)가 찬인류무형문화유산진도아리랑(讚人類無形文化遺産珍島阿里娘)이다. 시제의 운(韻)에 맞춰 생의 언저리에서 한스러워 눈물 머금고 졸시(拙詩)를 지어 읊조린다.

옥주탁관산명향(沃州卓冠産名鄕) 진도는 뛰어난 사람이 태어난 명향으로

창작종기아리랑(創作鍾基阿里娘) 박종기 선생은 진도아리랑을 창작했네

허련운림재격계(許鍊雲林才格繼) 소치 선생 운림산방 재격은 이어지고

소전전첩예서장(素荃戰捷藝書藏) 소전 선생 예서는 전첩비가 품고 있네.

내빈갈채환반락(來賓喝采歡般樂) 내빈 갈채와 환호로 크게 즐기고

탐상칭사감조장(探賞稱辭感助長) 탐상객의 칭찬으로 감응이 조장되네.

양토민생요선동(壤土民生謠煽動) 양토는 민생을 민요로 부추겼으니

문유세계영선양(文遺世界永宣揚) 문화유산은 세계에 영원히 선양되리라.

매헌(梅軒) 박영관(朴英寬) 음(吟)

 

대한민국의 민요이자, 명실상부한 한국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노래, 아리랑은 지역마다 수많은 버전이 존재한다. 유네스코에 의하면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전승되는 민요는 약 60여 종, 3,600여 곡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리랑의 어원이나 의미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아직 정설로 확정된 건 없다. 구전으로 전승되고 재창조되어 온 아리랑은 한국의 전통민요다. 2011년에 아리랑을 국가문화재로 지정했다. 그리고 2012년 12월 6일(5일 현지 시간), 유네스코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7차 무형유산위원회(Intergovernmental Committee For The Safeguarding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에서 우리 정부가 신청한 아리랑의 등재를 확정했다. 전해오는 여러 아리랑 중에서 정선·밀양·진도아리랑을 3대 아리랑이라 부른다. 장단·박자·가사가 서로 다른 수많은 아리랑이 한국은 물론 우리 민족이 사는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다양한 가락과 넋두리 같은 2행시 표현으로 사회와 시대의 변화를 증언하고 제기한다. 우리 문학사와 예술사에 질기고 굵은 맥을 전승해오고 있다.

「정선아리랑」은 원래 「아라리」로 일컬어지던 노래이다. 정선을 비롯하여 이웃 영월과 평창에 집중적으로 분포된 「아라리」는 이 지역의 민요적 음악언어를 충실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정자소리 토리권인 영남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밀양아리랑」의 경우에도 그 음악언어의 특성이 정자소리의 음악언어에 대하여 다소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밀양아리랑」의 분포는 밀양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남도 동북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진도 출신 박종기(朴鍾基, 1880년∼1947) 선생은 조선 고종, 일제강점기 때의 대금산조 명인이다. 대금연주에서, 정악(正樂)에 김계선(金桂善, 1891∼1943, 서울), 민속악(民俗樂)에 박종기 선생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당시 삼남지방(三南地方)의 유명한 ‘박젓대’가 박종기 선생이다.

진도아리랑의 전래와 창작은 박종기 선생이 신청의 여러 사람과 그 가락을 정비하고 이름을 「진도아리랑」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조선신궁 건립에 맞춰 조선 총독 앞에서 「진도아리랑」을 대금으로 불었다고 한다. 본래 「남도아리랑」이라 부르던 곡을 대금 악사인 박종기 선생이 편곡하여 「진도아리랑」이라 이름하였다. 이 곡이 취입된 첫 음반은 1928년 오케판 「진도아리랑」이다. 선생은 부모의 중병에 살을 도려 약에 쓴 효행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긴 기인(奇人)이기도 하다. 「진도아리랑」의 선율은 남도 음악의 여러 악곡에서 일종의 공식구로 활용되고 있다. 남도잡가 가운데 “삼산(三山)은 반락청천외(半落靑天外)요 이수중분(二水中分)은 백로주(白鷺洲)로구나”로 노랫말이 시작되는 「삼산은 반락」과 「물레타령」은 「진도아리랑」에서 나온 악곡이다.

아리랑마을

아리랑에 대한 기록으로는 1883년 일본인 관리와 1895년 일본인 기자에 의한 것과 1886년 방한한 미국인 선교사 H·B.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가 1896년 채보한 것이 있다. 또한 대한제국 조선왕조 말기의 선비이며 우국지사인 황현(黃玹, 1855∼1910)이 1894년에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에 고종이 들었다고 하며 “아리랑타령(阿里娘打令)”으로 기록한 것이 있다. 그런데 황현의 기록이나 두 일본인의 기록에는 노랫말과 해설 밖에는 없다. 아리랑을 역사상 최초로 서양 음계로 채보한 사람은 헐버트이다. 1886년 조선에 당도하자마자 어린이들이 부르는 아리랑에 흥미를 느껴, 1886년 10월 아리랑에 악보를 붙여 누이동생에게 전해주었다. 1896년 「조선의 성악(Korean Vocal Music)」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아리랑을 소개하여 역사상 최초로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에 서양 음계를 붙이고 가사도 채록한 채보자다. 그는 “아리랑은 조선인들에게 쌀과 같은 존재다”고 아리랑을 정의했다. 그는 한민족은 음악성이 뛰어난 민족으로 “즉흥곡의 명수이자 조선인들이 노래하면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 영국) 같은 시인이 된다”라고 한민족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했다. 고종의 밀사로도 활약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역사의 양심 헐버트를,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는, 1909년 뤼순감옥에서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정부 수립 후 1949년 국빈으로 초대되어 내한했으나, 병사하여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헐버트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건국훈장’과 ‘금관문화훈장’ 두 훈장을 수훈했다.

그의 어록을 살펴보면,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일본 외교는 속임수가 전부다”, “3.1운동은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했다.

「진도아리랑」 가락에 취하니 어깨춤이 절로 난다. 진도아리랑보존회[회장 박병훈(朴秉訓), 1936]는 1985년 7월 13일 조직되어 향전(鄕田) 박병훈 회장의 열정으로 꾸준하게 이어가고 있다. 예도(藝都:문화예술 수도) 진도 문화·예술은 으뜸이다. 삶의 질을 바꾸는 자부심이다.

 

참고문헌

『珍島 아리랑打令 가사집』, 박병훈, 진도인쇄소, 1896.

『아리랑 시원설 연구』, 김연갑, 명상, 2006.

『아리랑……역사여 겨레여 소리여』, 김열규, 조선일보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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