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을 오른다. 이 언덕은 세기의 언덕이다. 19세기의 불꽃과 죽창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를 바람속에서 들으며 올라가야 한다. 삶은 언덕이다. 노래는 굽이굽이 그 언덕을 타고 오르며 위무의 손길을 끊임없이 내민다.
미술관에서 현대는 더 이상 ‘모던’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당대를 현현하는 미술작품의 선율들은 세속의 색(色)과 형(形)의 일탈을 꿈꾼다. 여기에 걸린 초상화들은 우울한 자본주의의 그늘과 소외감을 거북스럽게 드러내기도 한다. 소리가 삭제된 베토벤의 비창 교향곡이 음각으로 새겨진 칼자국이 난무한다. 때론 뭉크의 비명이 우산 속으로 투과된다. 세상은 그렇게 들리지 않는 소리의 강을 건너왔다. 그리고 우리가 닿은 21세기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입고출신(入古出新)이라고 했던가. 유홍준은 추사 김정희의 평전을 쓸 때 이 한 단어로 코드를 잡았다. 물론 표지에서는 산숭해심(山崇海深)을 표제로 삼았다. 추사가 누구인가. 남종화의 종조 우리들의 허 소치가 바로 그 추사가 밝히고자하는 예론의 복심으로 읽히지 않았던가. 정치적인 판에서 벗어나 있는 제자에게 거침없이 시서화의 복심을 건내준 것이다. 물론 소치 앞에서는 “아직 멀었다” 하면서 정작 제자 친구들에게는 거리낌없이 “압록 이동에서 따를 사람이 없다”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묵매의 달인 조희룡이 울분을 느낄 정도로.
이곳 현대미술관의 미술작품은 하나 하나가 경전처럼 읽힌다. 옛 선인들이 독화법(讀畫法)을 배운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느 광고카피처럼 그림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의재선생도 평생 구도의 길을 걸었다. 서화는 물론 민족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무등산에 단군전 설립을 평생에 추진한 뜻.
미산(米山)은 뒤늦게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운림산방을 떠나 병영이 있는 강진으로 다시 개항을 맞은 도회, 목포항으로 옮겨 살았다. 밥벌이의 고난을 걸었지만 남농과 임인이라는 쌀(米)보다 귀한 자식농사에서 득의하였다.
19세기 중반까지 거세게 불었던 추사의 바람은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그것이었다. 제주에서 연경까지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피할 수 없는 골짜기가 있었다. 바로 정치의 질곡이었다. 두 번씩이나 유배생활을 거쳐야 했다. 러소치는 목숨을 걸고 남해 바다를 건너 제주 대정마을로 찾아갔었다. 소치는 적소(謫所)에 머무는 스승 앞에서 결코 붓을 들지 않았다. 단지 큰 아들 미산 허은(許殷)으로 소조귤수, 제주 귤농원 주인의 초상(전신좌상)을 그리라 하고 제를 붙여 주었을 뿐. 현대미술관에는 이와 비슷한 능호거사상이 소장되어 있다. 대미산의 희귀한 작품 중 걸작으로 알려졌다.
정양 박주생 관장은 이 능호거사상을 구입하면서 매우 기뻐하였다. 제주도는 소조귤수 작품을 이미 제주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반해 진도 운림산방의 초대 주인 허련의 운림각도(선면산수화)는 영인본에 불과하다. 소치의 또 다른 걸작 인물도인 추사선생해천일립상도 볼 길이 없다. 최근 한 소장자가 허 소치의 10폭 노송도를 중앙미술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진도 분관 유치에 몰두하고 있는 진도군은 늘 닭쫒는 개 신세를 면치 못하는 듯해 안타까움을 준다. 그 의욕이야 가상하지만 성과가 너무 없다. 작품은 산적하여 고산 김민재 부부 서예작품도 제대로 전시를 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소전미술관을 비롯한 옥산미술관 금봉미술관 백포미술관 전정미술관 등 많은 미술관 작품 해설을 전문적으로 해줄 전문성을 갖춘 해설사 배치도 너무 절실한 사안이다.
임회면 하미실 장전미술관
미술관에서 다시 길을 묻다
다시 현대미술관 계단을 오른다. 1895년 이 현대미술관 뒤 솔개재에는 동학농민들이 처참하니 일본군에게 사살된 시신들이 오래 동안 걸려있었다. 머리는 베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솔개재에는 역사의 오늘 위로 늘 눈이 내린다. 눈 속에서 소나무는 더욱 푸르기 마련이다.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동학군들은 이곳 진도 솔개재에서 마지막 항전을 끝으로 역사의 강을 따라 사라져 갔다. 미술관은 눈밭이다. 수묵이 번지기 앞서 펼쳐진 하얀 화선지 눈밭. 망적산이 멀고 가까이 오간다. 고개를 들면 망적바위, 고개를 내리면 솔개재 언덕이 하염없이 옥주의 눈을 기다린다. 화인들은 그 눈보라의 붓질을 멈추지 않는다. 이곳에 괴나리 봇짐 하나씩을 풀어 놓은 화가들의 연보는 그들이 밟아온 삶의 악보처럼 고유한 가락이 넘쳐난다.
사실 운림산방 소치와 의이 일가 3대, 5대까지 망라한 미술관에서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 관광객들에게, 특히 미술학도 애호가분들에게 꼭 솔개재 정양의 길 진도현대미술관을 놓치지 말고 둘러볼 것을 권한다. 그림은 물론 대형 벼루, 장롱 반닫이, 석물, 흑피옥, 불상, 소전선생의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대형 탁본과 고아한 글씨작품, 절지 사군자 등이 그야말로 진도라는 섬 속에서 어떻게 천하의 인연을 묵연으로 한 곳에 숨막힐 향(香)에 취하게 된다.
2019년 11월 22일 성동길 해인객사에서 남인.
나무들은 자꾸 바다쪽으로 쓰러진다.
세상 밖으로 쓰러져본 사람들은
왜 나무들이 그렇게 바다 쪽으로 한없이 쓰러지고 있는지 안다
바람이 된다는 것 바람 속에서 다 말라버린 눈물들이
저 깊은 바다 위에서 홀연한 노래가 되어 하늘 끝까지 수승하는지
홀로 바다를 건너는 달빛이 아니더라도
담팔수나무 잎으로 두른 치맛자락 하나뿐으로 남은 여인이여
저 수평선에 얼마나 많이 베였던 눈빛이여
속절없는 기다림들이여
오늘도 바다쪽으로 하염없이 쓰러지는 기다림이여
아아 나는 아침의 창을 열지 않았네
세한의 계절이 철썩철썩 대정마을 돌담장을 때리며 숭숭 뚫어놓은 사연도
연경에서 실어온 연뿌리 하나 싣고 세상의 모든 흔들림을 바로잡는 돌과 서적을 가져온
우선과 산 깊은 차나무 향으로 키운 재 자식을 기꺼이 공양하듯
세 번씩이나 바다를 건너 데려온 소치 자네야말로 남쪽에 오롯한 잣나무였음을
나는 북쪽으로 문을 낸 창에 차마 기대이지 않았네
내 또한 바다를 건너오는 저녁달같은 어머니를 여윈지 오래
무슨 은혜를 기다리겠는가
이미 넘치는 것들은 우선에 미리 보냈으니
세상은 나를 얼마나 더 쓰러트리고 홍염운월로 건너줄까
눈 녹는 백록의 사슴들이 새 봄이 오기 전에
그림자마저 주어먹던 구실잣밤나무에 예산 소식 감긴다해도
나는 순수비 빗돌 푸른 이끼로 남아 있으리
산숭해심!
아를르의 강가에 뜨는 고흐의 별처럼 타오르는 귤밭 다 지나치고
어찌 장무상망 백인장 찍어놓고 소나무 한 그루 화지에 심었다
이 어린 심정들도 나무들과 함께
바다로만 바다로만 쓰러져 물든 시절마다
한 구절 한 구절 다투어 피어날까.
정양의 미술관에는 옥주고을에서 가장 먼저 달이 뜬다고 한다.
보라 사람도 저 달과 같이 사라지고 또 사라져도 솔개재 언덕위에서 다시 뜨니
세상 사람들이여 사람은 미술관을 만들고 그 미술관은 생각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
남산 앞 욕실천을 흐르다 멈춘 고막뫼 바라보며 한 시절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였던 해창마을 앞은 이제 포구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창고가 있었던 고작굴에도 그저 들판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길은 바르고 사람은 그 길로 시절보다 더 빠르게 스쳐간다.
정양의 꿈과 이상이 깃든 미술관은 때로 밤깊이 바람결에 을미년 칼노래를 들으며 오늘도 망부의 흰 돌인 듯 진도의 그 많은 인연들을 품에 안고 서 있네.
이게 묵연인가 피의 혈연인가 한바탕 몽연이런가.
素荃. 새벽이슬과 빛을 머금고 사는 향초 소전선생. 조선 500년 동안 변함없이 벽파나루 언덕에 세워진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그 아홉글자. 이 바다 지나가는 이들 이마 숙으시오서 그 서체향 벽파바다 아침저녁으로 물들이며 저 멀리 대마도 건너 일본열도를 경계하는 깊은 뜻 헤아리소서.
삼백육십오일 진도는 언제나 예술의 기름진 밭이었다. 관찰사도 군수도 판서는 물론 도병마사 도 오를 수 없는 신분제한이 옥죄일수록 예술혼은 더욱 불타올랐다.
하여 얼마나 많은 소외와 또 얼마나 많은 기다림들이 소나무가 되고 첨찰산과 철마산의 삼선암 망적암이 되었던가. 저 솔바람 한 점에도 옷깃을 여미어야 하리라.
송현으로 가는 길 오른편 언덕. 포산 염장 장구포 그리고 고작리 해창 모두가 바다와 연관된 마을 지명들이다. 이 바닷물은 진도읍 남동리 남천교 아래까지 밀려왔었다. 밤이면 어화가 피어오르고 노랫소리가 울렸다. 잠못 이루는 무정 정만조는 십자로 관도시연을 읊었다. 득음에 오른 박덕인 옹의 대금소리에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 의재는 그에게서 호를 받았으며 자유당 광신학교(동외리)에서 글을 배웠다. 그림은 미산에게서 기초를 닦았다.소치 미산 의재로 이어지는 목단그림은 남농에게서는 보이지 않는다.
시련마저 꽃으로 승화시키던 진도의 문화를 60여년 지키고 바라보았던 오늘의 진도현대미술관. 미술관에는 당대의 인생을 뛰어넘어 시대를 확장시키는 놀라운 이적을 내보여준다. 미술관은 꿈이다. 바람이다. 산이요 바다가 된다. 모든 문들은 스스로 턱을 떼어낸다. 겨울 새들이 어처구니 흉내를 하며 처마 지붕에 내려 앉는다.
석현 박은용을 진도에서 만나고 싶다. 조각가 양 두환씨의 작품도 간절하게 보고 싶다.
사람이 돌아와야 한다. 헛껍데기의 이름만으로 사슴나루를 건너 금골의 혼을 훔치고 진도에 들어올 생각을 버려야 한다. 진정 사람이 돌아와야 한다. 시대를 사랑하고 그 시대를 가장 뜨겁게 껴안을 줄 알았던 사람. 벽파를 건너 돌아가는 길에 우수영 초등학교 교정을 가보라.
거기 과한 것들을 다 내려놓으라는 ‘방하착’의 법정스님 무소유 정신과 마주하여 “법정 선배님에게 길을 묻는다”라는 글귀가 사슬이 된 향기와 음률이 명량의 해조음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모두 하루하루 필사즉생의 길을 걷는다. 그 발걸음 하나하나 천길 낭떨어지 위를 걷는다. 여해 이순신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군수 임명장을 받고 마음 속에 그려보았던 진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도 질풍노도 직진의 길을 달리고 싶었을 것이다. 녹둔도를 떠난지 오래 그는 남해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쟁이 왔다. 전쟁은 그가 쥔 양날의 칼이었다. 승승중구의 길과 백의종군으로 내몰리다 마침내 받아야 할 사약의 길. 7년의 전쟁 내내 바다는 그에게 해중릉이나 다름 없었다.
진도는 그 자체가 미술관이다. 땅과 하늘을 잇는 걸게그림이다. 바다는 천년을 가는 관현악이다. 고개마다 중우바지 갈옷입은 사내들의 북소리가 맥놀이를 친다. 가난이 깊을수록 진도 아리랑은 매김소리가 치켜 올라간다. 이게 들노래다. 흥타령이다. 흥그레타령이다.
진도는 그래서 음악관이다. 대공연장이다. 보리밭물결이 민요소리가 된다. 바다라는 청치마를 두른 아낙네들이 나그네 앞에 자갈돌을 던진다. 소리 한자루 하고 가랑께. 남도의 아마조네스다. 뽕할머니도 그렇게 자식들을 얻었을 것이다. 석현 오누이고랑을 굴러가던 솥뚜겅도 그렇게 엎어졌을 것이다.
정양미술관을 지나면 곧 해미원이 기다리고 있다. 송정막걸리 주조장이 기다린다. 나는 빈 식초병처럼 흔들거리며 그곳을 찾는다.
장전미술관에서 장전선생
이성부는 이렇게 노래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림마저도 잊어버렸을 때에도 봄은 온다”라고. 그런 봄이 해마다 진도에 온다. 그것도 한 겨울 눈 속에서 푸름과 연두색을 번갈아 물들이며 진도의 봄은 외대파줄기에서 눈 속의 봄동 샛노란 속살을 떡 벌어지며 다가온다. 2월이 되면 조도 바닷가는 온통 쑥밭이다. 열두폭 수묵화 병풍이 도리산에서 어류포까지 푸르게 펼쳐진다. 그러고 보면 진도현대미술관은 반쯤 펴 놓은 열두자 병풍을 닮았다. 미네랄을 가득 공양한 바람만이 그 병풍을 채울 수 있다. 독거도에서 탑립마을 오봉산 타고 여귀산 줄기줄기 석교천 장구퐁서 몸을 풀어 소포만으로 들어가기 전 해창에서 뒤석이는 소리를 날마다 듣고 한 땀 한 땀 병풍에 새기는 곳 진도현대미술관. 미술관은 작가의 죽음을 그 생애를 먹고 산다. 어찌보면 상여집이다. 화장장의 그치지 않는 화염이다. 온갖 색상들이 출렁거리는 꽃상여다.
진도는 거대한 전복이다. 진주를 품은 조개다. 장전미술관. 나절로미술관이 영롱한 진주다. 상처가 없는 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진도에서 동학란의 사슴몰이사냥의 마지막 장소로 삼은 곳. 삼별초가 가장 처참하게 무너진 곳. 오룡의 꿈이 서둘러 금갑바다를 건너갈 때 수만 명의 백성들이 조기떼처럼 묶여 초원의 땅으로 끌려간 그 참혹한 꿈. 왕건이 후백제를 물리친 바다. 정유재란 순절묘역이 왜덕산과 함께 역사의 행간에서 신음소리를 내는 곳. 물고기밥 절반 뼈속까지 동백나무 거름이 된 갈매기섬. 이 징한 세상을 파헤쳐 속살 깊이 키운 진주가 왜 이리 현기증나게 빛나는지 왜 내 가슴은 한쪽만 그렇게 아파오는지.
더 잔인한 것은 입을 다물면 다 빠진 속이빨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 사랑도 명예도 아닌 옛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늙고 초쵀한 중년 사내가 서 있을 뿐.
가슴앓이를 느낀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누군가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그 소심함이 아침을 당당하니 지배하지 못하는 지병이 되어버렸다. 겨울을 앞두고 옛 그림에 깊이 몰입해보자. 가슴앓이의 치유법을 만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