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7:27 (목)
밀양아리랑, 진도를 찾다
밀양아리랑, 진도를 찾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19.12.28 18: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향전 박병훈씨 무형문화재전수관에서 아리랑 강연 ‘화제’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 좀 보소.”

지난 11월 7일. 입동을 하루 앞두고 경남 밀양에서 섬진강을 건너 진도로 관광버스 하나가 찾아왔다. 밀양아리랑보존회.

아리랑의 본향 진도! 항일 거꾸로 아리랑을 비롯 지난 해까지 팽목항에서 세월호 아리랑이 새로운 가사를 입혀 온 국민의 아픔을 달래주며 잊지말자하던 진도 아리랑.

진도는 이렇듯 아리랑의 선진지이자 끊임없는 발흥과 변화를 통해 시대의 가교역할을 수행해가고 있다.

진도아리랑보존회의 박병훈 회장이 이들 일행을 직접 맞아 진도의 무형문화재민속전수관으로 안내하였다. 20여 명의 회원들은 왜 진도아리랑인가를 직접 체험하고 듣는 자리였다. 가을 햇살이 등을 따스하니 내리쬔다. 팔순을 넘은 박 회장은 차분했다. 가을햇살을 담은 눈빛이 더 맑아 보인다.

한국 아리랑은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진도아리랑의 역할은 눈부셨다. 가장 민족정인 정서를 담고 그만큼 대중적이며 세계적이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걸림을 낳았다. 바로 진도아리랑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데 그 보편성 때문에 아직까지 정작 국가 및 광역지자체 예능보유자를 선정하지 못하고 있다. 정선아리랑은 국가보다 먼저 강원도지정 문화재로 보호를 받고 있다. 당연히 보존회원들에 대한 예우와 활동에 힘을 북돋우게 되었다.

 

이제 진도아리랑은 이미 진도의 대표적인 향토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전라남도청에만 가면 작아지는지 알다가다 모른다는 푸념이 나온다. 밀양아리랑은 그 향유자들이 많지 않고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연구자나 종사자들도 진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밀양아리랑보존회원들은 입을 모은다. 부러우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날 박병훈 회장은 차분하니 진도아리랑의 특성과 유래 등을 조리있게 설명해 나갔다. 진도아리랑은 뒷소리를 올리는 특성, 어려우면서도 자유분방한 가락과 800여수에 이르는 가사 수집은 책으로 발간되었으며 수많은 기고글과 논문을 발표하여 가장 풍성한 자료를 갖춘 민요아리랑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이날 향전 박병훈 옹은 밀양 탐방객들의 연이은 궁금증과 질문에 전혀 막힘없이 척척 답변하였다. 먼저 “진도는 유배지였다. 이는 그 사람들의 의식 삶의 양식에 영향 받았을 것”이라며 이런 역사를 통해 그림 노래 시 등이 군민들에게 알려졌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섬 주민들은 벼슬 등문인 문과응시에 제한을 받았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과거 응시 자체가 불가능한 또 하나의 신분 차별로 인해 결국 시서화와 노래를 즐기게 되었을 것이란 해석을 내놓았다. 삼별초의 영향도 무시 못 한다. 87년이라는 오랜 공도화와 제주도에 이은 말 목장화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막히고 왜구들의 침략이 빈번했으며 육지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도 부지기수있다고 한다.

"밀양도 삼별초와 긴밀한 관련을 거론하지만 정선도 마찬가지 검토해볼 부분 있다. 이는 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 무작정 동질화는 안된다”며 근거 없는 확장을 경계하였다.

진도는 지금까지 교육청과 민관이 합심해 체계적인 민요교습과 전승에 노력하고 있다. 진도 북도 여러 가지(세 가지). 또 아리랑과 관련해 정부로부터 1천억의 지원사업이 매년 시행되고 있다고 알렸다.

다른 문화원에 비해 민속 민요 등에 매우 활성화된 진도문화원은 민요반 다양한 교육 실시. 공연팀 지원. 교육 학생 지도에도 적극적이다. 진도군립민속예술단을 필두로 진도아리랑보존회, 각종 민속놀이 민요 민속단체가 많다.

밀양은 이에 비해 이제 보존회 결성 서두르고 있다. 이번의 진도방문도 교류 추진 중 하나의 일정이다. 전수관도 이제야 추진 중임을 알렸다. 이날 진도방문을 계기로 “진도를 벤치마킹 배우겠다.”는 각오를 다짐하였다.

박병훈 옹은 80년대부터 진도아리랑 가사수집(대교건설 계기)에 나선 것은 왜곡 손실 및 민속 민요 유실을 우려해 자료수집에 적극 나섰다. 아무래도 진도대교가 건설되어 외지, 즉 육지문화가 물밀 듯이 들어와 토종 민속민요에 혼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한 선견지명이었다.

또한 매년 진도군이 실시한 군민의 날 행사에서 최우수상 수상을 계기로 (아리랑) 보존회 결성이 급물살을 탔다. 이 모든 중심에는 향전 박병훈 씨가 있었다. 물론 진도 여성들의 적극적인 활동 참여가 큰 힘이 되어주었다. 수상실적에 따라 문예진흥기금도 지원받게 되었다.

진도아리랑과 달리 밀양아리랑 가사는 지금 현재 200여수로 수집 부족하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대하고 있다. “정선아리랑은 한자투 가사가 많다. 대중적 개념이 부족하다. 이를 지적하며 시정이 필요하다”고 박병훈씨는 의견을 내보였다. 즉 서민적인 편안한 말투 가사가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는 것. 밀양은 경상도에서 비교적 평야지대다. 정선은 깊은 골짜기 지형이라는 그 영향을 가락이 받는다.

 

강연 후반에 진도아리랑은 박종기 선생으로부터 정형화 되었다는 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고 알렸다.

1920년대다. 그 부친은 박덕인으로 무정 정만조 유배시절 함께 자리를 했다. 이는 매우 극적인 장면이었다. 이를 적확히 기록한 무정의 은파유필 자료 공로도 결코 배척할 수는 없다.

박덕인은 절대의 명인이며 지극한 애처가였다, 아들 박종기는 부친에 대한 끔찍할 정도로 효를 다 하였다. 장딴지 살을 베어 피와 고기를 바쳤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무정에게 박덕인은 다양한 민속 민요를 선보였다. 은퇴 후 수십년 만이라고 토로하였다.

진도아리랑은 이제 새로운 전기에 들어서고 있다. 단순한 민요의 격을 넘어서 국풍(國風)으로 잘리잡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예능보유자가 없다. 물론 특정 인물보다 단체가 지정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진도군이 먼저 장학생 제도를 도입 지원하고 향토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선발을 서둘러야 한다. 그래야 전남도와 정부에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에 나설 것이다.(박남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