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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孝와 禮를 세우는 고장이 되었을까?
왜 孝와 禮를 세우는 고장이 되었을까?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01.1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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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꽃이 피어나는 정원을 거닐고 있는가. 누군가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리며 잎사귀의 미세먼지를 닦고 있는가.

바다가 담이 될 수 있을까? 신분이 겨드랑이 밑 어디엔가 새겨진 주홍글씨가 되었을까? 벽파와 녹진과 해창 앞의 물길은 몸짓 하나로 건널 수 없는 해자로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가?

조선은 섬이었다. 중국 명대와 청대를 거치면서 조선은 일본보다 더 철저하게 섬이 되었다. 아니 섬을 자처하였다. 바다를 버려 일본에게 전 국토가 유린당했지만 반성의 모습은 없었다. 일성록이나 징비록은 그들만의 변명록이었다. 체제변화가 뒤따르지 않았다. 진도 바다에서 극적인 승리로 한양 도성이 안온해졌다 하지만 이는 곧 병자년의 난으로 이어졌다. 여전한 반상체제가 국토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면서 이미 허물어지고 있는 계급제도의 강화로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다른 나라들은 이미 인공지능시대였다. 거기다 첨단 교류 무역을 통해 부강의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총은 권력의 방아쇠이기도 하지만 문화의 발포 확산의 전진기지 깃발이었다.

진도는 섬이기 때문에 두 번이나 공도가 되어야 했다. 죽음과 맞교환한 공신녹권을 받았지만 여전히 신분제도는 벗어날 수 없었다.

노래를 들어보자.

우리는 빛이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수 있는

우리는 아주작은 몸짓 하나라도 느낄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소리없는 침묵으로도 말할수 있는

우리는 마주치는 눈빛 하나로 모두 알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연인.

기나긴 하세월을 기다리어 우리는 만났다

천둥치는 운명처럼 우리는 만났다

오 바로 이순간 우리는 하나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연인

우리는 바람부는 벌판에서도 외롭지 않은

우리는 마주잡은 손끝하나로 너무 충분한

우리는 우리는 기나긴 겨울밤에도 춥지 않은

우리는 타오르는 가슴 하나로 너무 충분한

우리는 우리는 연인

수없이 많은 날들을 우리는 함께 지냈다

생명처럼 소중한 빛을 함께 지녔다.

만날 수 없는 연인을 조국이라고 불렀다. 진도 사람들은.

건강장수 문화상과 효사랑 큰상을 선정하여 매년 시상하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진도는 청정해역과 기름진 옥토를 가진 고장이다. 당연히 어르신들은 즐겨 노래를 부르며 우울증 없는 팔춘기 적령으로 살아간다. 진도읍 북상리는 구기자와 관련해 장수마을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진도 주민들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한 장수 수치통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삶을 제대로 누리며 산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사고, 시서화가무를 적극적으로 수용 연마하여 보람과 성취감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진도군은 매년 진도아리랑축제 진도군민의날 행사에서 군민의상을 시상하고 있다. 각 분야별로 추천을 받아 심의를 거쳐 결정한다. 작년에는 화가인 옥산 김옥진 선생이 받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전례를 보면 수상자가 거의 나오지 않아 유명무실해졌다는 지적도 나왔다. 물론 상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하게 진도군의 명예와 봉사 헌신의 공로가 인정받는 분들이 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진도군수와 문화기관, 여성단체 등과 함께 건강장수 문화 및 효사랑 실천 사례를 찾아 선정하여 그 뜻을 기려준다면 더 많은 어르신들이 더 건강하게 오래 사시면서 진도문화의 향수를 누리며 가족애를 더욱 돈독하게 할 것으로 믿는다. 효사랑 실천은 단순하니 효부만으로 한정시키기보다는 아들 또는 딸 사위 손주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

효의 표본을 진도역사에서 찾는다면 누구보다도 대금국수로 일컬어지는 박종기 선생일 것이다.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장딴지 살을 베어 드렸다는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이로 인해 그 분은 평생을 다리 한쪽을 절으며 살아야 했다고 알려진다.

아버지 박덕인 옹과 함께 늘 어머니 묘를 찾아 절을 하고 함께 대금을 불었다고 한다. 산새들이 함께 내려와 춤을 추었다고 하니 그 애틋한 정경이 절로 떠오르게 한다.

이 밖에도 진도에는 여러 효자열녀각이 세워져 있다. 경주박씨인 박대형은 자(字)는 달수, 호(號)는 윤곡이라 하였다. 1532년 진도읍 북상리에서 태어난 그는 5살 나던 해 어머니로부터 자기가 유복자임을 알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침착한 달수는 아침저녁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요절한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호곡을 하는가 하면 홀로된 어머니에게도 극진한 효성을 다하였다. 날이 갈수록 부모에 대한 달수의 효행은 더하여만 가고 마을에서부터 이웃 마을까지 소문이 퍼지고 웃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러던 중 세월은 흘러 달수의 나이는 약관을 넘어 섰고 어머니는 노년에 이르러 병으로 앓아눕게 되었다. 달수는 좋다는 약을 모두 구하여 봉양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병세는 회복되지 않고 더욱 악화되어만 갔다.

그러던 중 하루는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가 숭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였다. 달수는 어리둥절 하였다. 생전에 어머니가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이 엄동설한에 어떻게 숭어 고기를 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달수는 어머니를 위한 일이면 무슨 일인들 못할 것인가 생각하고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을 헤치고 강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고 그 위에는 흰 눈이 덮여 있었다. 달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빙판 위에 한참 서서 생각하다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이 딱한 사정을 기도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온 몸이 꽁꽁 얼어붙은 듯 꼼짝 할 수 없는데 더운 기운이 하늘로부터 달수의 몸을 감싸듯 하여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하게도 얼어붙은 냇가 얼음을 깨고 싶은 충동에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근에서 돌을 주워 얼어붙은 강 얼음 치기를 수 십 번 하였다.

마침내 깨어져 나간 얼음 사이로 숭어 한 마리가 튀쳐 나오자 이를 본 달수는 너무나 반가워 숭어를 움켜 쥔 채로 하늘을 보고 감사한 후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와 그 동안에 캐놓은 약이 될 만한 산나물을 숭어와 함께 정성껏 다려서 어머니께 드렸더니 눈물을 흘리시며 숭어 고기를 잡수신 달수 어머니의 병환은 몇 일 뒤에 씻은 듯 나았다고 전해온다.

이 일은 평소에 아들의 효심이 극진하므로 하늘이 감동하여 내리신 복이라 하여 군민의 칭송이 자자하였고 이때 마침 전라감사 조공(趙公)이 지방 순시 차 본군에 들러 이 소문을 들은 후 조정(朝廷)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도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나라의 비용으로 효자 박대형(朴大泂)의 정려(旌閭)를 세우게 하였는데 현재의 진도읍과 군내면 경계선인 정거름재(군내면 산 155번지)에 세웠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군의 효자에게 처음 세워진 정려라고 전하여 온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전설 같은 일이나 다시 한 번 선조들의 지극한 효행을 살펴서 오늘의 세대들에 효도의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시대의 박대형 박종기를 찾는 효사랑 실천 장본인을 기리는 상을 제정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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