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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향진도신문 2020 정월 경자년 귀성(歸省) 묵상
예향진도신문 2020 정월 경자년 귀성(歸省)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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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1.21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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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차례와 제사의 차이점

매년 설날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 한다. 추석에 지내는 제사도 차례라 한다. 제사와 차례의 차이가 있을까? 제사의 종류를 크게 기제, 차례, 묘제 세 가지로 나눈다. 돌아가신 분의 기일에 지내는 제사는 기제(忌祭)다. 4대봉사가 끝난 후 묘지에 가서 지내는 제사는 10월 묘제(墓祭)다. 진도지역에서는 주로 시향(時享)이라 하는데 지역에 따라 시제(時祭), 시사(時祀), 묘사(墓祀) 등 다양하게 부른다. 본래 묘제는 음력 3월에 지내던 제사이고, 사계절의 해당 달마다 신주를 모신 사당에서 지내던 제사가 시제였다. 차례는 명절과 절기에 지내는 제사다. 절기 차례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설과 추석 명절만 차례로 남아있을 뿐이다. 명절 차례는 ‘속절(俗節)제사’라 했다. 민간에서 전승되던 것이기에 가례(家禮) 등 예법에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왜 차례라고 했을까? 순서를 지킨다는 절차의 뜻에서 온 용어일까?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명절의 차례는 “초하루와 보름의 참례 중 보름에는 차를 올린다.”는 가례(家禮)「사당(祠堂)」의 기록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욕재계한 후 상을 차리고 절하며 음복까지 이어지는 절차를 준수하니 순서를 지킨다는 차례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세시 절기를 보는 눈

나는 여러 지면을 통해 시간의 마디에 이름을 붙인 것을 명절(名節) 즉 마디의 이름이란 이치를 설명했다. 그 중 더 중요한 마디 이름을 들어 설이니 추석이니 따위의 이름을 내세웠을 뿐이다. 명절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세시절기들도 사실상 시간을 분할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마디의 이름임은 불문가지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기 외에도 불기, 단기를 비롯해 힌두력 이슬람력 등 다종다양한 역법 체계들이 있다. 예컨대 동남아시아의 설날은 4월 13일이다. 중국의 춘절을 비롯한 우리 설날은 음력 정월 초하루다. 본래의 우리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시기 양력으로 바뀌었다. 고종 32년인 1896년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양력설을 쇠다가 1988년에 다시 공식적으로 음력설을 인정했다. 지금 구정이니 신정이니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만 있나? 태음력에서 역법 전체의 기준이 되는 날은 사실 동짓날이다. 중국 장강 유역 형초(荊楚)지역의 7세기경 연중세시기인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동지팥죽 얘기가 나온다. 공공씨(共工氏)의 바보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 역질 귀신이 되었는데 생전에 팥죽을 두려워했으므로 팥죽을 쑤어 이를 물리쳤다. 붉은 팥이 악귀를 예방하는 의미가 있다고 알려진 이유라 한다. 그럴까? 동지는 설날, 보름날 혹은 입춘처럼 한 해를 시작하는 시간의 분기점이고 팥죽의 새알은 새해 첫날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용알 뜨기의 용알 곧 태양의 의미다. 여기에 해당 지역의 생태적 환경, 문화적 영향, 정치적 이데올로기 등이 덧입혀진다. 예컨대 설날은 1년의 시간을 단위화 한 마디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다. 설날을 말하는 여러 가지 이름들을 보면 이해가 쉽다. 원일(元日),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 단월(端月), 신일(愼日) 등 시대에 따라 문화적 변동에 따라 부르던 이름들이 달리 나타난다. 모두 한 해를 시작하는 으뜸임을 드러낸다.

신일(愼日)의 귀성(歸省), 무엇을 해야 할까?

설날이면 도시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찾아 돌아온다. 이를 귀성이라 한다.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며 설빔을 입고 웃어른들께 세배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 년을 단위로 매듭짓기 하는 설날의 종속변수들이다. 시간이 지나면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대개 대보름까지의 기간을 정해두고 윷놀이며 널뛰기며 연날리기를 했던 풍속들도 사실은 가변적인 것이다. 나는 윷놀이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진도지역 상가 풍속의 예를 들어, 삶과 죽음의 문제로 접근해 풀이한 바 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올 수 없다. 이를 불가역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계절은 순환하여 다시 온다. 작년에 왔던 봄이 올해 또 오는 이치다. 여기에 설날이라는 큰 기점을 만들어 불가역적인 세월을 가역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설날의 의례들이 어떤 형태 어떤 형식으로 구조화되건 본질적인 맥락은 여기에 있다. 그래서다. 가변적인 설날의 특성을 들어 마치 전통의 본질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지난 명절을 보내며 귀성의 의미를 캐어물은 적이 있다. 진정한 명절의 의미가 바로 나 자신을 성찰하는 귀성(歸省)에 있다고 말이다. 시간을 이런 저런 형식으로 쪼개 마디를 짓고 그 매듭에 이름을 지어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무엇을 성찰하고 무엇을 매듭지어야 할까? 대개의 기점을 이루는 의례들처럼 옛것을 죽이고 새것을 시작하는 의미들 말이다. 설날은 다른 많은 의미들을 넘어서는 귀성(歸省)의 시간이다. 나의 뿌리인 과거의 조상을 살피고 미래의 후손을 살피며 현재의 나 자신을 살피는(愼) 날(日)이 설날이다. 어두웠던 옛날들을 죽이고 화창할 새날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60년 만에 한 번 온다는 흰쥐의 해 경자년 설날, 귀성한 자녀들, 부모님들과 둘러앉아 설날의 의미에 대해 얘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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