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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화인열전 내 삶이 차 한 잔처럼 향기로왔던가
진도의 화인열전 내 삶이 차 한 잔처럼 향기로왔던가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01.21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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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이 된 만인의 스승 의재 허백련

 

 

의재 하면 문득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떠오른다. 사람은 태어나면 자의와 관계없이 하나의 그림을 남긴다. 또 누군가는 서사시를 그려놓는다. 깊이 완상하거나 한 순간의 불쏘시개, 신청 의례를 마치는 소지가 되던지. 화인이면서 철인의 풍모를 평생 잃지 않았던 의재 허백련 선생. 진도읍 구 수협자리 앞에 의재선생의 생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진도에서 쉽게 만나보기 힘들다. 운림산방 안에 소허암(小許庵)이라는 판액이 걸려있을 뿐이다.

진도에서 태어난 소치 허련의 방계(傍系) 손자인 허백련은 구 한말 진도로 유배 온 무정 정만조(1858~1936)의 서당에서 한학과 글씨와 시문을 배웠다. 스승 정만조는 허백련에게 '떳떳하고 의연 하라'는 의미로 '의재(毅齋)'라는 호를 지어 준다.

이때 의재 허백련은 문인화가로서의 기본적 역량을 갖추게 된다. 묵화의 기본은 운림산방에서 문중 할아버지인 미산 허형에게서 배웠다. 20대에 신학문을 배우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그만두고 남종 산수화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화숙에서 그림을 배웠다.

귀국 후 31세가 되던 1922년에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출품한 <추경산수>가 1등이 없는 2등으로 입선한다. 이후 내리 5년간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입선한다.

남종화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수묵 산수화를 고집하던 의재는 제6회 조선미전의 특선을 끝으로 더 이상 선전에 출품하지 않는다. 화단의 찬사와 대중의 인기를 뒤로 한 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온다. 1938년에 시·서·화가들의 모임인 '연진회(鍊眞會)'를 발족하며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한다.

작년 가을 남종화의 마지막 거목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의재 허백련을 중심으로 호남화단의 큰 성취를 이뤘던 서화 동호단체인 연진회에 대한 본격적이고 집중적인 조명이 이루어진 전시를 기점으로 남도 한국화단을 향한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다.

이선옥 관장은 스승 의재를 향한 제자들이 평생을 간직한 존경과 사랑, 감사의 마음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춘설헌 제자들의 기억을 환기시켜 인터뷰한 직접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의재 허백련의 민족사상과 사회운동, 가르침의 방법 등을 알려지지 않은 일화와 함께 소개했다.

또한 1930년대~1960년대에 걸쳐 의재를 구심점으로 퍼져나간 광주 문인들의 풍류와 인문학적 아취, 민족자강에 힘을 보태는 의기로움 등 얽혀진인맥들의 숨겨진 부분들도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광주의 근현대 역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귀한 사료로서 특별한 날에 스승과 제자가 함께 그림을 완성한 ‘합벽도’를 소개하고, 그 의미와 용어의 쓰임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삶의 본이 된 의재, 실천적 삶을 산 예술가

남종화의 마지막 거목으로 일컬어지는 허백련 화백은 무등 자연의 일부가 되어 경계가 없이 사유하는 철학가이자 예술가로서, 민중을 걱정한 실천 운동가로서 삶을 견지한 거인이다. 1938년, 의재 허백련을 중심으로 36명의 서화 동호인들이 참여하여 창설한 <연진회(鍊眞會)>는 ‘참(眞)을 연마하여 인격을 도야 한다’ 는 목적으로 출발한 후, 1939년 광주시 금동에 연진회관을 마련함으로써 남도의 서화가들을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연진회> 회원 중에는 호남지역의 저명한 서화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정운면과 허행면 등은 춘곡 고희동, 이당 김은호, 소정 변관식, 고암 이응로 등 중앙 화단의 화가들과 지속적인 교류가 있을 정도로 개성 있는 화풍을 일군 작가들이다.

초기 회원 중에서 근원 구철우, 구당 이범재, 지봉 정상호, 동강 정운면, 목재 허행면과 찬조 회원인 소정 변관식의 작품도 만날 수 있었다. 허백련은 해방 이후 피폐된 농촌을 보고 농촌을 근대화 시켜야겠다는 강한 의지로 농촌 부흥운동에 뛰어든다. 일제 강점기에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민족주의자 허백련은 우리 시대에 추구해야 할 이념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주장했으며, 민족혼을 되살리고자 단군신전 건립을 추진했다.

해방공간을 지나면서 뿔뿔이 흩어졌던 연진회는 1950년대, 광주 호남동 완벽당 화랑에서 재결성하는데, 그 완벽당 화랑 사랑채에 걸렸던 「潁 沙 鬪 茗 讀 畵 之 室/ 毅道人」(영사투명독화지실) 편액이 이번 전시 공간에 걸린다. 글귀처럼 차를 나누며 서화를 즐긴 당시 모임의 분위기가 오래 묵은 글씨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후, 허백련은 본격적으로 후학 양성을 하면서 사군자를 가장 기초적인 화목으로 중요하게 다루었다. 또한 실기와 남화이론을 가르칠 때, 남화 정신의 계승을 강조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허백련이 농촌 근대화를 위해 설립한 삼애학원(1947)은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고 30여 년간 농촌 지도자를 양성했다.

해방이 된 1945년에 무등산에서 차밭을 인수해 그 밑에 화실을 짓고 당호를 '춘설헌(春雪軒)'이라 했다. 송나라 시인 나대경이 그의 시 '약다시(瀹茶詩)'에서 읊은 "한 사발 춘설차 우려 마시니 그 어떤 맛보다 좋구나"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 묵국. 종이에 먹 각 33cm?130cm

"내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 향기로웠던가"

의재는 만년에 20여 년 간을 춘설헌에 머물며 불후의 명작들을 남기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내 그림은 무등산 물로 그리고, 내 차는 무등산 물로 달인다"라고 할 정도로 일생을 무등산과 함께 했다. 무등산 기슭의 춘설헌은 '예향 광주의 태실'과도 같은 곳이다.

무등산에서 재배한 차를 '춘설차'라 이름 붙이고 "사람의 머리가 맑아야 나라가 발전한다"면서 차문화 보급에 앞장섰다. 농업학교를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으며 애천(愛天), 애토(愛土), 애인(愛人)의 삼애 사상(三愛思想)을 역설한 철학자였다. 광주 YMCA 창립 초기에 많은 기여를 하며 지역사회의 발전에 앞장서기도 했다.

▲ 생전의 의재와 제자들의 모습

화가이자 철학자이며 교육자였던 의재 허백련. 1977년 86세를 일기로 그가 타계하기 몇 달 전에 춘설헌에 누워 유언처럼 남긴 한 마디 말이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며 많은 이들의 가슴을 치고 있다.

"제자들은 철을 가리지 않고 무등산 그늘로 병든 나를 찾아와 준다. 그들은 춘설헌 남향 방에 누운 나를 보고, 나는 그들에게 춘설차 한잔을 권한다. 나는 차를 마시고 있는 그들을 보며 내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 향기로웠던가를 생각하고 얼굴을 붉히곤 한다···."

산수를 그리다 산수에 누운 의재 허백련. 두 아들 광득, 진득과 함께 지금도 무등산 기슭 춘설헌 언덕에서, 예에서 의를 찾은 도시 빛고을 광주를 내려다보고 있다.

▲ 의재로 초입에서 무등산을 바라보고 있는 의재 허백련 상. 광주광역시 학동에서 의재 미술관 까지의 거리를 의재로라 부른다. 운림동 아트밸리로 불리는 거리다.

무등을 사랑하고 무등에 묻힌 의재 허백련.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호남의 정취가 잘 담겨있는 그림과 글씨를 남긴 남종 문인화의 대가. 그가 머물렀던 무등산 기슭 춘설헌의 묵향과 차향은 오늘까지도 예향 광주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박남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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