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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가득한 섬이어라∼ 배롱나무 가락이어라∼’
‘묵향 가득한 섬이어라∼ 배롱나무 가락이어라∼’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02.1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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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를 건너오면 다리 밑 명량해협의 빠른 물살이 누구에게나 깊은 인상을 준다. 아 섬으로 가는 길은 마음 속의 물결과 역사의 회오리를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것.

우리는 무엇에 얶매였는가. 지난 한 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면 새해에는 좀 여유 있게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마음의 여유를 느끼기에는 여행만 한 것이 없다. 특히 예술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없던 여유도 갑자기 생길지 모른다. 남도의 보배섬 진도는 조선시대 한양(서울)과 멀리 떨어진 탓에 유배지로 자주 선택됐다. 당시 유배 온 양반들은 글과 그림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 덕분에 학문과 예술이 꽃피웠고, 그 유산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왕무덤재를 지나 빗기내 마을을 지나 운림산방의 집 앞 연못과 한가운데의 둥근 섬에 자리 잡은 배롱나무의 풍경이 그림으로 그려낸 듯하다.

진도 운림산방에서는 그림 같은 풍경과 수십 점의 그림을 보며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다. 운림산방이라는 이름부터 멋스럽다. 운림산방 뒤의 첨찰산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뤄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곳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1808∼1893)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소치에 이어 5대에 걸쳐 직계 화맥이 이어지고 있고 남종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1808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난 소치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문하에 30대 나이로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서화 수업을 받았다. 추사는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며 소치를 치켜세웠다고 한다. 소치는 왕실의 그림을 그리고, 관직을 받는 등 조선 제일 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당쟁에 휘말린 추사가 유배를 떠난 뒤 세상을 뜨자 고향 진도로 돌아왔다. 첨찰산 쌍계사 옆에 작은 집을 짓고 그 집을 ‘운림산방’이라 이름 지었다. 소치는 이곳에서 죽기 전까지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운림산방은 그 풍경만으로도 수묵화로 그려낸 듯한 멋을 지닌 곳이다. 작은 집 앞에 널찍한 연못(운림지)을 파고 한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었다. 소치는 손수 섬에다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배롱나무 아래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는데 나무와 한 쌍으로 어울리며 신비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운림산방의 멋진 풍경은 영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지만 곳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풍경을 보며 휴식을 취하는 것을 추천한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운림산방의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추운 겨울이라고 하지만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운림산방을 돌아보면 한 해를 좀 더 넉넉하게 계획할 여유가 생긴다. 운림산방 옆 소치기념관에는 50여 점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소치의 작품은 물론이고 그의 후손들의 작품이 있다. 또한 최근 금봉 박행보의 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또 다른 묵죽의 전가와 시를 만날 수 있다. 사철가 한 대목이 은은히 흐른다.

옥순봉을 바라보며 두목재로 가는 길에는 진도아리랑비가 자리하고 있다.

삶이란 본래 그런 것인가

진도 버스터미널에서 쌍계사 가는 버스에 오르면 승객이 별로 없다.

쌍계사 대웅전 쌍계사 대웅전은 신라 문성왕 때 도선국사에 의해 세워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숙종 23년(1697)에 중수된 것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이다.

버스에서 내린 후, 먼저 쌍계사로 향했다. 쌍계사와 운림산방은 거의 한 울타리나 마찬가지인데 지난번 왔을 때 쌍계사에는 가보지 못했다. 지난번이라고는 하지만 헤아려보니 무려 15년 전이다.

첨찰산 쌍계사 일주문을 지나 은행나무 길을 따라가니 곧 사천왕문이다. 처음 느낌이 왠지 소박하고 고졸한 분위기의 사찰일 것 같았는데 대웅전 앞에 서니 역시 느낌 그대로다. 노랗고 빨갛게 물든 단풍과 아기자기한 전각들이 서로 어울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다.

절 뒤의 첨찰산은 세상 모든 중생들을 포용하고도 남을 것처럼 그 모양이 후덕하다. 문이 꼭 닫힌 대웅전에서는 스님의 독경이 한창이다. 햇볕이 잘 드는 대웅전 한 귀퉁이에 앉아 독경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시왕전 기둥에 걸린 주련에 눈길이 닿았다.

若人欲知佛境界 누구든지 부처의 경지를 알고자 하면

當淨其意如虚空 마땅히 그 마음 허공과 같이 정갈하게 하고

遠離妄想及諸趣 망상도 버리고 잡념도 멀리하며

令心所向皆無碍 마음을 오직 무애(無碍)에 머물게 하라.

잡념을 버리고 집착 없이 사는 것이 부처의 경지임을 깨달으며 다시 길을 나서 첨찰산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바로 천연기념물 제107호, 진도 쌍계사 상록수림이 펼쳐진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참가시나무, 감탕나무,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등 302종의 나무들이 우거져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간간이 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 냄새도 맡아보고, 빨갛게 물든 단풍잎에 얼굴을 비춰보기도 하며 한 시간여를 걸어 오르면 마침내 첨찰산 정상, 멀리 진도대교가 있는 우수영으로부터 사방의 섬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첨찰산에 얽힌 사연들

첨찰산 봉수대 첨찰산 봉수는 진도 여귀산 봉수대에서 전달된 봉수를 받아 해남 일성산(日星山) 황원 봉수로 전달해주는 연변봉수(沿邊烽燧; 조선시대에 변경의 제일선에 설치한 봉수)였다.

▲ 첨찰산 정상에서 바라본 우수영 첨찰산은 해발 485m로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정상부에 서면 사방의 산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옛날 봉수대가 있던 자리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히며 생각해보면 첨찰산의 찰(察) 자가 아무래도 이곳 봉수대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했던 시절, 이곳 첨찰산 봉수대는 금갑진의 여귀산 봉수대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리라.

그러나 진도에서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던 소재(穌齋) 노수신(1515~1590)이 이곳을 찾았을 때, 봉수대는 이미 황폐한 상태였다. '홀로 삼성동에서 노닐며 다섯 수를 읊다(獨遊三聖洞五首)'라는 시에서 그는 "황량한 봉수대엔 횃불 밑동만 남아 있고, 황폐한 절에는 승려의 발걸음이 끊어졌네"라고 읊고 있다.

첨찰산을 내려오다 보면 아리랑비 못미처에 작은 무덤이 하나 있는데 특이하게도 비석에 남편 이름은 없고 경주 이씨라고 하는 부인 이름만 새겨져 있다. 이곳 진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무정 정만조와 관련이 있다.

정만조가 접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운림산방의 주인인 미산 허형이 그를 사천리로 모시고 와 관란재라는 서당을 열었는데, 이때 만난 여인이 바로 경주 이씨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하나 있었다. 정인용이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정만조는 서울로 돌아갔으나 경주 이씨는 끝까지 이곳에 살다가 첨찰산 봉화골에 묻혔다. 지금도 등산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정만조는 한말의 대학자인 강위(姜瑋)의 제자로 민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이곳 진도의 접도와 사천리 등에서 12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은파유필(恩波濡筆)> 등의 훌륭한 저서를 남기기도 했으나,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학자적 양심과 선비의 지조를 저버린 채 친일에 골몰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동생 정병조와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자(경학원 부제학, 대제학, 조선총독부 중추원 촉탁) 명단에 올라 있다.

운림산방의 백일홍 소치는 운림산방에 백일홍을 심어 스승 추사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을 표현했다. 운림산방에 들어서면 고적하니 소치의 옛집이 그 자리에 서 있다. 기둥에 걸린 추사 김정희의 주련도 옛 모습 그대로다. 집 앞 연못은 섬을 가운데 두고 사각형을 이룬 이른바 중도오방지(中島五方池)인데, 가운데 섬에는 백일홍 한 그루가 기품있게 서 있다.

이 백일홍은 운림산방의 초창주인 소치 허련(1808~1893)이 스승 추사의 은덕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심은 것으로 근 2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소치는 대둔사 일지암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으며, 추사의 제주도 유배 기간에는 세 번이나 바다를 건너가 몸소 스승을 모실 만큼 그 관계가 돈독했다.

 

그냥, 걷자

운림산방을 나와 바로 앞에 있는 남도전통미술관에 들러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진도 팔경'이라는 글씨가 눈에 띈다. 명량홍교(鳴梁虹橋), 금골부용(金骨芙蓉), 가계귀범(佳界歸帆), 모도용로(茅島龍路), 쌍계만종(雙溪晩鐘), 철마낙조(鐵馬落照), 서망조우(西望釣友), 관매해당(觀梅海棠)이 그것인데 그중에 쌍계만종(雙溪晩鐘)이 바로 이곳 쌍계사의 저녁 종소리이다.

본디 소치선생의 운림십경 중 계사만종을 말한다.

가다가 쌍계사의 저녁 종소리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마저도 집착이라는 생각에 혼자 너털웃음을 지었다. 멀리 첨찰산이 이런 내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귀산을 바라보며 다시 발길을 서쪽으로 가보자.

진도의 핫플레이스라고 한다면 가수 송가인의 집을 빼놓을 수 없다. 가수의 집에 누가 찾아간다고 할지 의아할 수 있지만 하루에 1000명 이상이 찾을 정도로 인기가 뜨겁다. 송가인 집이 있는 민속의 고향 지산면 앵무리로 가는 길은 찾기 쉽다. 도로에 설치된 표지판에 ‘송가인 집’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몇 km가 남았는지 상세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송가인 집은 주위에 많은 자동차들이 주차돼 있어 눈에 쉽게 띈다. 사람들로 북적여 지방 시골의 한 마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송가인 전신사진을 세운 모형 앞에서 송가인 팬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설치된 나무 덱에서도 사진을 찍는다. 집 앞에는 마을 사람들이 파는 지역 특산물도 만날 수 있다. 마을 주민들은 “아무도 찾지 않았던 마을에 송가인 덕분에 사람들이 찾고, 특산물도 팔 수 있어 좋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송가인 아버지는 팬들이 많이 모일 때 팬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한다. 또 집 앞 마당에 커피와 물을 마실 수 있게 했다. 진도에서 송가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많은 관광지와 식당에서 송가인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송가인 사인이 전시된 액자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진도의 랜드마크 진도타워.

아이들과 함께 찾았다면 진도개테마파크를 꼭 방문하자. 진도개를 가까이서 볼 수 있고 진도개에 대한 재미있는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라면 진도의 랜드마크인 진도타워가 제격이다. 진도대교 아래의 울돌목을 보면서 얼마나 물살이 빠르고 거친지 실제로 확인할 수 있고, 명량대첩과 관련된 전시물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이곳들에서도 송가인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대흥사 아래 설아다원

설아다원은 단순한 차 농원이 아니다. 봄이 되면 직접 찻잎을 따서 덖어 볼 수 있는 차 만들기 체험장을 운영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차를 따고 마시면서 차에 대한 흥미를 느낄 수 있다. 부부는 한옥 민박도 운영하고 있다.

약 10년 동안 판소리를 배운 설아다원의 마승미 씨가 진도아리랑을 구성지게 부른다. 설아다원에 머문다면 부부가 펼치는 우리가락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마 씨는 약 10년 동안 배운 판소리로 진도아리랑, 흥부가 등을 멋들어지고 구성지게 부른다. 여기에 오 씨가 박자를 맞춘다. 흥겨운 가락에 어깨가 들썩일 수밖에 없다. 달빛이 비추는 차밭은 몽환적이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불빛이 비추는 곳까지 살짝 차밭을 거닐어보면 차밭이 얼마나 환상적일 수 있는지 느낄 수 있다. 남도의 아름다운 겨울을 맞을 수 있는 곳. 한 잔 차에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 여행정보

△송가인 집은 부모님이 현재 생활하고 있는 공간. 오전 10시∼오후 4시 사이에만 방문이 허용된다. △진도개테마파크에서는 평일 오전 10시, 오후 3시와 토·일요일 오후 1시에 진도개 공연 등이 열린다. 다만 1, 2월은 열리지 않는다. 공연은 무료다.

若人欲知佛境界 누구든지 부처의 경지를 알고자 하면

當淨其意如虚空 마땅히 그 마음 허공과 같이 정갈하게 하고

遠離妄想及諸趣 망상도 버리고 잡념도 멀리하며

令心所向皆無碍 마음을 오직 무애(無碍)에 머물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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