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18:06 (수)
진도소포걸군농악(珍岛素浦乞军农乐)
진도소포걸군농악(珍岛素浦乞军农乐)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05.09 18: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라남도 진도 지산면 소포리에서 전승되는 농악.

 

차현지 김병철 예능보유자 후보 등 공개시연 펼쳐

진도소포걸군농악보존회는 지난 5월1일 오전 11시 지산면 소포리 전수관에서 전남도문화재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2020년 공개시연을 열었다.

진도군 소포걸군농악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걸궁패농악으로 가장하여 적진을 탐색하고 작전을 펼친 것에서 유래를 찾는다. 이와 관련하여 농악을 군사 작전처럼 표현한 문서가 전한다. 이는 전 진도문화원장 차근현車根炫씨가 과거 농악대 집사를 맡아 오던 주찬계朱贊桂, 1896~1980에게 받은 제목 미상의 농악 관련 문서다. 이 문서 본문의 ‘전우진도군모면모리대법당중수차(全右珍島郡某面某里大法堂重修次)’라는 문구로 보아, 1896년 이전에 기록된 걸립패의 문서인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에 농악을 군사 작전처럼 설명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진도소포걸군농악에서 구전되는 계보를 살펴봐도, 100여 년간 기능이 끊이지 않고 계속 유지되고 있다. 1900년대 초·중반까지는 인근 섬과 마을을 다니며 걸궁 활동을 했고, 1964년 소포걸군농악단을 설립하여 남도문화제, 영등축제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88년 제17회 남도문화제와 1995년 제23회 남도문화제에 진도 대표 민속팀으로 참가해 장려상을 받았다. 2006년에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소포리 마을 주민들이 보존회를 결성하여 보존·전승하고 있다.

현재 지정 당시 예능보유자로 선정되었던 이민석 조열환 선생이 작고한 뒤 김내식씨가 남아있는 현실이다. 지난 5월 1일 오전 11시 지산면 소포리 마을 전수관에서 진도소포걸군농악 보존회는 전라남도 문화재위원들을 초청, 시연을 펼쳤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김희동 전남도의원, 박금례진도군의회의원, 김오현 전 진도군예술감독 등도 함께 하였다. 특히 상모 역할을 하는 차현지씨는 자신의 시연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심의위원들에게 “다시 한 번 보여드리고 싶다”고 하여 김오현씨와 장단을 맞춰 재시연을 펼치기도 했다.

농악의 치배 및 악기

소포리에서는 농악을 군고라고 하고, 걸립하면서 치는 농악을 걸군이라고 한다. 전승과정에서 군사적 요소와 걸립의 기능이 결합되어 ‘걸군농악’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치배들을 군중이라고 부르고, 집사, 조리중, 포수, 무동, 창부, 농기, 영기, 꽹과리, 징, 북, 장구, 농기(상모), 소고 등으로 구성된다. 행렬이 이동할 때는 ‘조리중-포수-무동-기수-집사-창부-꽹과리-징-장구-북-농기(상모)-소고’의 순이다. 각각의 치배들은 농악 연희자로서 독자적인 역할이 맡고 있지만, 군사적인 기능도 부여받고 있다.

1) 조리중: 얼굴을 여성으로 가장한 광대를 쓰고 도복을 입었으며, 한삼을 흰색으로 길게 달고 머리에는 짚으로 엮은 모자 끝에 흰색 끈을 단다. 맨 앞에 서서 집집을 방문한다. 군사적으로는 한삼으로 적의 동향을 아군에게 신호를 하는 역할을 한다.

2) 포수: 총을 들고 광대를 썼으며, 머리에 ‘통정대부’라는 벼슬 이름을 써 붙인 노루가죽 모자를 썼다. 도복을 입고 망태를 등에 짊어지고 긴 담뱃대를 가졌다. 총성으로 아군의 위치를 상보에 신호하고, 적을 위협하여 아군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3) 무동: 7세 남아로 도령복을 입고 배자 모자를 쓴다. 사람의 어깨에 서서 춤을 춘다. 군사적으로는 사람의 어깨 위에 서서 아군과 연락을 주고받는 역할이라고 한다.

4) 기수: 흰색 바지저고리 옷차림을 하고 머리에 고깔을 쓴다. 영기는 치배들의 맨 앞에 서고, 언제나 곧게 세워 들고 다닌다. 군사적으로는 작전 시 선두에서 아군의 진로를 명하며 이끌어 주는 역할이다.

5) 집사: 걸군농악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인물로 치배들을 통솔한다. 흰옷에 오색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관을 쓰고 한삼을 달며, 손에는 지휘봉을 든다. 군사적으로는 작전 시 선두에서 아군의 진로를 명하며 이끌어 준다.

6) 창부: 장삼을 입고 얼굴에 흰 종이 가면을 쓰고 머리에는 모자를 쓴다. 적을 가장假裝한 자로서 도복을 입고, 머리에는 붉은 모자에 ‘창부’라는 검정색 글씨로 쓴 모자를 쓴다.

7) 꽹과리: 흰색 바지저고리 옷차림에 삼색띠를 두르고 돌무채 병거지 상모(전립)를 쓴다. 군중을 통솔하는 첫 신호를 치며, 군중의 동향을 이루는 중대한 역할을 한다.

8) 징: 흰색 바지저고리 옷차림에 머리에 고깔을 쓴다. 징은 주야를 막론하고 가장 멀리 들리는 소리로, 상부에 소리로 아군의 동향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한다.

9) 장구: 흰색 바지저고리 옷차림에 머리에 고깔을 쓴다. 장구는 소리가 연하여 군중의 흥을 북돋아 주며 북의 역할도 한다.

10) 북: 흰색 바지저고리 옷차림에 머리에는 고깔을 쓴다. 북은 아군의 사기를 북돋아 적의 진지로 진격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이다.

11) 농기(상모): 흰색 바지저고리에 청색쾌자를 입고 삼색띠를 두르며 전립을 쓴다. 굿판에서 상모를 돌리며 치배들을 따라다닌다. 전립에 돌무채를 달고 돌무채 끝에는 흰 닭털 한주먹을 달아 어두운 밤에 신호표로도 사용한다.

12) 소고: 흰색 바지저고리에 고깔을 쓴다. 작은 북을 치면서 춤을 춘다. 적군이 나타나면 농기와 함께 행동을 한다. 적군을 포위하는 역할을 한다.

굿의 종류와 내용(축약)

소포걸군농악은 정월 당산제 기간에 당산굿과 매굿(마당밟이), 샘굿 등을 행하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걸궁을 하였다. 정월의 농악은 당제사로 시작하여 샘굿, 들당산굿, 가정굿(뜰밟이), 바탕굿(판굿), 날당산굿으로 끝난다.

소포걸군농악의 가락은 일채, 이채, 삼채, 사채, 오채, 육채, 영산다드래기, 살풀이가락, 질굿가락, 가진일채, 가진삼채, 진싸는가락, 헐싸굿가락 등이 있다. 소포농악의 가락은 대체로 속도가 느리다. 상모가 있어도 채상모가 아니기 때문에 빠른 속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1) 당제사: 제관과 군중이 당나무 앞에 정렬하여 제사를 지낸다. 집사는 “당할머니, 오늘부터 소포걸군농악을 치게 되오니 끝나는 날까지 당할머니께서 많이 도와주시기를 축원합니다.”라고 축문을 읊는다. 군중들은 일채부터 삼채까지를 치면서 당에서 내려온다.

2) 문재비굿(문잽이굿): 문재비굿은 걸궁패가 마을로 들어갈 때 마을에서 영기로 문을 세우고 걸궁패의 실력을 점검하는 농악이다. 걸궁패가 마을 앞에서 당산굿을 치고, 마을에서 수수께끼로 내는 문제들을 풀어낸다.그리고 격식을 갖추어 문서나 말로 문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걸궁패가 다른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농악(군고)을 절차에 맞춰 잘 쳐야 하고, 지혜로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며, 격식을 갖춰서 입장해야 한다.

특징 및 의의

진도소포걸군농악은 다른 지역의 농악과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특징과 의의가 있다. 첫째, 군사놀이의 성격이 강하여 농악도 군고·걸군이라고 부르고 판굿(바탕굿) 전체 과정이 군사적인 의미를 띠고있다. 둘째, 농악의 격식과 절차를 설명하는 문서가 남아있다. 셋째, 걸궁패가 마을로 입장할 때 예능·지혜·격식을 따지는 절차가 있다. 넷째, 개인놀이 중에서 상모를 돌리는 농기들의 놀이와 양손으로 북을 치는 북놀이가 특징적이다. 다섯째, 학식과 지혜를 갖춘 집사가 농악대를 통솔한다.

진도소포 걸군농악보Ⅱ

 

【별책부록】

한편 이날 시연과 함께 전라남도지정 무형문화재 제39호 진도소포걸군농악보(2)가 진도문화예술연구회와 진도소포걸군농악보존회(위원장 임귀현)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현재 위원은 김내식 김병철 차현지 오형아 채영식 이인옥 김덕춘 노관민 곽순경 박연실 김순진이며 편집은 김남용씨가 맡았다.김남용 편집자는 이번 별책부록은 <진도소포걸군농악보>를 만들면서 모은 자료를 스캔하거나 문서작업을 한 내용이라고 밝혔다.

이어 2018년 전남 인문학 기반 및 역사자원 활용사업으로 지원받은 금액 가운데서 순수제작비는 810만원으로 우선 Ⅱ권을 만든 다음에 자부담으로 1권을 발간하는 것으로 정리했다고 알렸다. 감수는 김오현 김현숙씨가 수고하였다.

소포걸군농악 조사보고서(김정호 사료보존회장)에는 “1789년 기록인 『호구총서』에 목장면 소포리로 나오며 이미 이때 소금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432년(세종14) 기록에 해남 우수영에 있던 주량(周粱)만호가 진도의 소가포(蘇可浦)로 옮긴 기록이 있다.”라고 했다.

무엇보다 소포걸군농악을 발굴 전승하는데 가장 공헌을 한 차근현 전 진도문화원장의 소포에 정착한 유례를 꼼꼼하니 적어놓고 있다. 또한 소포걸구농악보를 78년 차근현씨가 주찬계에게서 물려받았다고 밝히고 있다.(박남인)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전국의 농악단들이 복장과 고깔이 갈수록 일률화하는 경우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는 진도에서 전승되고 있는 국가지정 민속인 남도들노래 시연 현장에서 모를 심는 아낙들과 북을 치는 남정네들의 복장이 예전 진도에서 직접 물을 들여 자주 입었던 중우바지나 감물 또는 쪽물 몸빼 등을 새롭게 재단하여 입어보면 어떨까 하는 입장이다.

무엇이든 획일화되어가면 재창조력을 잃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걸립패 걸군농악단이라하면 단순한 방송공연만을 염두에 두는, 지나친 화려한 복장만을 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한다.

천을 덧대어 기워입은 바지나 저고리가 어찌 숭이 된다는 것인가.

고깔 또한 진도의 군화로 지정된 동백꽃을 형상화한 지화로 넣어보는 시도가 필요했으면 한다.

정병호 교수는 “농기수는 흰 옷 차림을 하고 머리에 고깔을 쓴다. 상쇠중쇠종쇠는 흰 옷 차림에 삼색띠를 두르고 전립(戰笠)을 쓴다고 했다. 또한 무동(농기)은 도령복을 입고 배 모자른 쓴다. 조리중은 장삼을 입고, 흰 종이로 만든 가면에다 볏짚으로 만든 모자를 쓴다. 집사는 흰 옷에 오색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관을 쓴다.”고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