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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진도」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박남인시집 발간
「몽유진도」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박남인시집 발간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06.0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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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꿈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한다. 하늘을 나는 종달새가 단지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았다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바람의 음률과 여를 나누고 싶었다.(박남인 시인)

어차피 세상은 강이다. 벼랑이다. 누구나 상승을 꿈꾸지만 날개가 없어도 낙하의 시간을 자꾸 미루고 싶어 한다.

또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풍화를 거스를 수 없다. 단지 기억하고 싶어한다.

‘장무상망’(長毋相忘)을 써 간절함과 아쉬움을 내보이고자 했다. 나는 속절없이 김수영의 시 한 줄을 떠올린다. 노고지라가 하늘을 나를 때 자유스럽지 못했으리라고 단언한 그 슬픈 시대의 ‘혁명은 없고 방만 남은’ 날의 고통과 토열하는 심정을 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바다는 절대 유연하지 않는다. 섬은 늘 떠다닌다. 나는 그 섬에 살면서 구속과 자유의 경계를 드나들었지만 나를 떠미는 것은 파도가 아닌 기억과 갈망이었다.

몽유(夢遊)는 꿈 속의 이상향으로만 상징되지 않아야 한다. 내가 태어난 마을 의신면 사천리

는 ‘핏기내’라고 불리기도 한다. 1271년 늦봄 첨찰산에서 내려온 시냇물이 삼별초 군사들과 가족들의 핏물로 동백꽃보다 더 붉게 울컥울컥 흘렀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모든 흐르는 물은 수평을 지향하는 그 바다로 가는 마고선녀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그들이 지금도 진도 곳곳에 꽃을 해마다 수놓는다.

 

나는 술집의 어린 사내였다

진달래가 피면 진달래 같은 술잔 속으로 숨는

술집의 사내였다

혼자 가는 집 바람이 데려다 준 집

저만치 달을 떼어놓고

날마다 각질이 벗겨나는 참나무처럼

통장무더기 가방에 기대어

저녁잠에 취한 아내를 빠져나와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진주식을 알지 못하는 나는

애써 허수경의 시 제목을 읽는다

읊는다 익어 버린 복숭아 울음이다

똑같이 되지 못하는 슬픔과 사랑을

기다림 같은 것으로는 만날 수 없는 그대

나는 아침부터 술집의 사내였다

감나무가 휘청거리며 해를 가리고

내 영혼은 오래 되었나니에

홀로 비우는 잔으로 방점을 찍는다

어차피 노래들은 바람이 나

짓봉산 산타령 갈쿠나무 하러 떠났다

나도 그대에게 길들여지고 싶었다

아침의 술잔 따위로 지나간 별을 헤아리다

나도 한때는 술집의 사내였다

홍범도를 흉내 내며 바닥에 엎드리거나

어머니가 절대 안 물려준

비끼내 절 밑

하루 종일 막걸리와 낡은 파리채

술집의 술동무 사내로 살았다

오래 된 것들은

내 영혼을 떠났으니

-‘나는 술집의 어린 사내였다’ 전문

박남인은 위로 셋이나 되는 형들의 영향을 받아 무협지를 읽거나 바둑을 두면서 문학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뿐인가.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에 있던 그의 집은 운림산방의 바로 밑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소치 허유라는 거대한 지성과 예술적 영감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다. 먹을 갈아 화선지에 사군자를 치던 그의 모습은 나를 사뭇 놀라게 했다. 그것은 열등감과 부러움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진도는 외딴 섬이었지만 이 나라의 정신과 예술이 집약된 메카이기도 했다. 내 고향 담양이 중앙권력에서 밀려난 선비들이 시를 읊조리며 더는 훼절하지 않기 위하여 칩거하던 다소 사변적이며 내성적인 공간이었다면 박남인의 고향 진도는 민중들의 활달한 소리마디와 춤사위에다가 운림산방의 불꽃 같은 예술혼이 결합된 공간이었다.

광주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강의에 열중하면 입가에 침이 고이곤 하던 국어 선생님이 담임이었는데 박남인과 나는 같은 반이었다. 그저 범생이었던 나와는 달리 그는 드러나지 않은 소년 풍류객이었다. 왜소한 체격에 눈동자만 유난히 순정하게 빛나던 모습은 그와 40년이 넘는 교류의 세월에 그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었다. 노트에 깨알처럼 써나가던 각종 편지와 시 등에 남은 그의 문체와 글씨체를 나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고백하건대 박남인이 전염시키고 다닌 그 사유와 문체가 나를 문학으로 이끌었고 법대 지망생이던 내가 돌연 국문과를 선택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그와 가장 가까이서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을 보냈지만 나는 아직도 그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의 생각과 행동은 규격화된 삶의 잣대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도 나도 군대에 다녀와 그놈의 모진 군대생활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쁘고 만족스러웠다. 다시 그 반짝이는 눈동자를 앞에 두고 막걸릿잔을 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대견해 했다. 수업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부산스럽게 책가방을 챙기던 모습은, 그러나 너무 짧았다.(송태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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