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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료 발굴. 『金剛牖警錄』(금강유경록)
향토사료 발굴. 『金剛牖警錄』(금강유경록)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06.0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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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문화원 편집실

 

유와 김이익(牖窩 金履翼)의 『순칭록』과 『금강유경록』

유와 김이익(1743-1830) 선생은, 1800년 58세로 금갑도(접도)에 유배되었다가 63세인 1805년까지 6년 동안 적거 하면서 40여 편의 글을 지었다. 『금강중용도가』, 『금강영언록』, 『금강유경편』이 알려져 있다. 그는 또 『순칭록』을 써 진도 주민들이 관혼상례의 절차에 따른 예의범절을 배우는 데 공헌했다. 저술 동기는 책의 서문과 같다.

“--하루는 갑자기 고을에서 인망이 두터운 박진종(朴震琮 1758-1834) 厚玉 군이 나에게 사례의절에 대해 질문하면서 ‘가르침을 주시어 저희가 의절에 대해 깨닫기를 원합니다’ ”

이번에 나타난 『금강유경록』은 그동안 그의 작품목록에 없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정확한 판명이 뒤따라야 되겠다.

김이익은, 1689년 60세에 진도에 유배되어 그 해 사약을 받은 영의정 문곡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고손자이다. 문곡의 4남 창업(昌業)의 아들(祐謙)-손자(由行)-증손자(履興, 履寅, 履翼)이다.

 

『金剛中庸圖歌』(금강중용도가)

김이익은 진도 유배 6년 동안에 지은 것, 베낀 것, 쓴 것 등 40여 책을 유배에서 풀렸을 때 모두 고향 집으로 가져갔다. ‘자손들로 하여금 내 경력한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금강중용도가』는 이들 가운데 하나이며 주로 임금님을 향한 충군지성과 교훈적 내용의 가사집으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 했다.

‘나중에 이 책을 찾아보니 중용도(中庸圖)는 있고 가집(歌集)은 볼 수가 없어 필시 부녀자들이 빌려다 보고 돌려주지 않은 것을 거두지 못하여 이사할 때 빠진 것이라 생각했다. 단념하고 애석하게 지내오던 중 이미 세상을 떠난 황씨 부인이 남긴 상자 속에 부인이 국문등서한 필본이 출현되어 떠난 황씨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다시 만든 것이다. 당시의 원문 한문 부분과는 다른 곳이 있으나 국문은 그대로 완비하였고, 본문 잃은 지 19년 만의 복원이다.’

이상은 유와 김이익이 진도를 떠난 18년 뒤인 1821년 79세에 쓴 본서의 서문 요약이다. 황씨 부인은 김이익의 후처로, 본처 양주 조씨가 23세로 사망하자 얻은 3세 아래 여인이었다. 후에 자손들이 한문원문에는 구결(口訣)을 붙였다.

 

『金剛永言錄』(금강영언록)

책의 서문은 ‘절름발이 늙은이가 가시 울타리 안에서 1802년 음 8월 11일에 시작하여 9월 8일에 마친 뒤 썼다’ 고 하여 당시의 죄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슬프고 원통한 마음과 쇠약하고 병들어 숨이 차서 오히려 낭독과 묵어(黙語)도 힘들거든 하물며 시를 읊조리고 노래를 부를 수가 있스랴!’ -- ‘오직 주역과 중용을 받들어 읽으면서 이를 베끼고 아침저녁으로 하나를 얻어 더함으로써 마음의 재물로 삼는다.’ -- ‘이제 중용도가 이미 이루어진 끝에 가사 수백 마디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통곡하는 마음이 심히 우러나온다. 이어서 병을 앓아 자리에 누운 지 이미 몇 달이 지나 눈은 어지럽고 손은 떨려서 잘 옮기기를 그만둔 지 오래고--’

이때 그의 나이 60. 원래 위리안치는 마당에 서 있어도 하늘만 보이는 높은 울타리 너머로 가시 울타리를 또 친다. 절름발이가 된 사유는 필경 곤장 장독일 터이며, 숨이 차서 책 읽기조차 어려운 것은 천식이 생겼던 모양이다. 당초 죄목부터가 원통하고 몸은 쇠약하여 ‘묵어’조차 힘들었다. 이 몸으로 마련한 단가집이 『금강영언록』이다. 56곡이 전하는데 원래는 더 많았다고 한다.

 

『金剛牖警編』(금강유경편)

『금강유경편』은 1804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향토연구』제1집(충남향토연구회, 1985)에 영인본이 실려있다고 한다. 이 작품에 대한 참고자료로 이상보의 ‘유와 김이익의 시가연구’(『어문학논총』 6,1987)와 정인숙의 ‘유와 김이익의 『금강영언록』의 특징과 그 의미’(『반교어문연구』 43, 2016)를 볼 수 있다. 아래는 이상보의 글이다.

‘금강유경편(45장 1책)은 그가 1804년(순조 4) 겨울에 금갑도에서 지은 계몽시이다. 이것은 오언절구로서 모두 87구로 되었는데 매구의 앞머리에 제목을 쓰고, 한시에는 구결토를 달고, 국문으로 풀이해 놓았는데 역어체의 모범이 될 만큼 뛰어난 것이다.

이 계몽시는 유배지에서 늙고 병든 몸으로 언제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후손들의 교훈시로 남겨주고자 하는 뜻에서 지은 것이니 그 보기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하 생략’

이로 미루어 유와 김이익의 작품 중 널리 알려진 『금강영언록』, 『금강중용도가』, 『금강유경편』 등 3편은 유배 시가집(流配 詩歌集) 이다.

 

『金剛牖警錄』(금강유경록)

이 책은 표지에 ‘雜植內篇’ ‘金剛牖警錄’이라 했고, 첫 장에는 金剛牖警錄續, 雜植內篇, 人心道心, 虛靈知覺, 心圖 순으로 내용이 이어진다. ‘잡식내편’은 김이익의 증조부 김창업의 바로 위 형님인 농암 김창협이 내놓은 것이고, 인심과 도심, 허령지각은 당대 학자들의 최대 논쟁점이었다. 특히 내용 첫 문장에 보이는 ‘人心道心辨(인심도심변)’은 소재 노수신이 진도에서 19년간 적거할 때 지은 그의 대표적 철학저서이다. 이를 주제로 소재와 퇴계가 논쟁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가장 큰 화두였던 학문적 테마를 다룬 김이익의 『금강유경록』이, 진도 의신면(義新面) 가단리(加丹里) 라는 작은 마을에 숨어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가로 24cm 세로 35cm 크기에 총 33쪽의 내용 가운데는 ‘心圖’가 있어 이채롭다.

『金剛牖警錄』은 20여 년 전 의신면 가단리 이장 박천석씨가 박주언 현 문화원장에게 보여준 것을 이를 귀중하게 생각하고 복사한 책이다. 이후 복사본은 이사를 다니면서 없어졌으며 이장도 돌아가셨다. 그의 집을 뒤져보아도 책은 없었다. 따라서 그동안 계속 가단리를 맴도는 마음이었는데, 수일 전 박원장의 집에서 그 복사본이 짐꾸러미 속에서 나타났다. 『금강중용도가』 처럼 분실 19년 만에 나타난 셈이다. 천만다행이었다.

박 원장은 이 책을, 김이익 선생에게 순칭록 저술을 부탁했던 박진종 선생의 손자인 박정현 진도군 문화예술체육과장에게 전했다. 책과 관련된 진도 이야기가 있을까 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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