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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발굴 가장 오래되고 자세한 진도민속(珍島民俗) 기록을 찾아내
향토사 발굴 가장 오래되고 자세한 진도민속(珍島民俗) 기록을 찾아내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06.01 12: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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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노수신(蘇齋 盧守愼) 지금부터 472년전(1548) 진도 “무당굿”을 보다

 

“징 치고 북치고 깃발을 흔들며 춤추고 노래불러!”

박병훈 사)진도아리랑보존회장

전 진도문화원장

진도는 전국적으로 제일가는 민속, 민요의 고장이다.

그것은 진도가 민속무화의 보고로 유일하게 “민속문화예술특구”로 지정이 되어있기도 하다.

소재 노수신(1515~1590)는 을사사화로 1547년부터 진도에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으며 귀양에서 풀려나서는 영의정을 지냈던 명 재상으로 우리 고장에 있었던 「봉암서원」의 주벽으로 배향되었다.

소재는 을사사화로 1547년9명종2) 3월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가 되었다가 그 6개월 후인 같은 해 9월달 진도로 이배가 되었다.

다음 “시”는 소재가 진도로 이배된 다음 해인 1548년 정월 초 7일에 관아 뜰 앞에서 행하여 졌던 “무당굿”을 보고 지은 것인데 이 “삼죽”이란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재 노수신 “시”

삼죽(三竹)

세 개의 “댓가지” 당당하고

붉은 깃발 날아 솟아오르네.

원일(정월 초하루)에서 인일(사람날. 초7일)에 이르기까지

신을 섬김이 엄중들 하네.”

내가 보고 굿에 대해 물었더니

토박이 성씨(조씨 박씨)들이 주관하여 행하는 무속행사라 하네.”

지극한 공경심은 꾸밈이 없고

신청은 정결하였으나 두공(종묘제례때 쓰는 목재)은 없었네.

닷새가 지난날(정월초 6일) 어둑한 새벽에 굿은 시작되었네.

내가 시험삼아 호기심으로 바라보니

댓가지(신대) 받듦은 옥구슬을 모시듯하고

깃발을 들어 올려 춤추는 모습은

마치 솜털이 나는 듯 하네.

검붉은 비단옷, 동경(구리거울)으로 장식한 혁대는

오래되어 꿰맨 곳이 많았네.

치마폭 잇대어걸고 덮개를 만들었는데

엉클어진 끈들 늘어져 난잡들 하네.

징을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북을 치며 어울려 펄쩍펄쩍 뛰면서 춤을 추네.

피로해서 인지 남녀 무당들 잠깐 쉬었다가

또 다시 무당과 악사들 굿을 시작하네.

굿을 보는 사람들은 노인네와 애들인데

쪼그리고 앉아서 구경들을 하네.

귀신과 사람들 모두가 배부르고 취했으니

낮부터 밤까지 늘어서 앉아들 있네.

관청 뜰 앞에서 굿이 행해지는데

관원들은 또한 두려워서 꼿꼿이들 서있네.

모두들 조금이라도 경건치 못하면

큰 재앙이 미칠까 두려웁겠지.

성하고 쇠함은 조상님들 뜻인데

이 험한 땅에 살면서 어찌 두려웁지 않겠는가.

나는 이런 풍속에 익숙치 못하여

처음에는 웃었는데 잠간 두려워서 몸이 오싹해졌네.

아아 성황당은 관청에서 제사를 지내니

크고 작음이 절로 구분이 있네.

너희들고 조상에 제사하고

명철에 조상묘에 성묘들을 하겠지.

조상들이 복을 주시는데

너희들도 어찌 공경하지 않겠는가.

도도하게 흐르던 굿판이 극에 달하니

누구가 저런 풍속을 막을 수가 있겠는가?

굿하는 “댓가지”를 빼앗아 분질러버릴 수도 없으니

이 괴로움에 가슴이 아파오네.

내가 조물주에게 호소할 수가 있다면

이런 풍속을 만든자에게 큰 벌을 주게하리라.

(노수신의 「소재집」(권2) (원문 생략)

(주-56행시를 46행으로 축소하였음)

노수신이 진도 유배지에서 행해졌던 “무당굿”을 보고 쓴 글인데 “굿”을 하는 날짜 그리고 진도풍속을 소상하게 기록하였으며 “굿”을 하는 연유 까지도 캐 물었는데 “굿”은 진도(珍島) 토박이인 박씨와조씨 등이 주관하여 행하는 무속행사였다고 적고 있다.

신당은 정결하였으며 무당의 의례는 깃발이 매달린 세 개의 “댓가지”를 주술을 다루는 듯 조심스럽게 모시고 춤추는 모습부터 깃발의 춤을 마치 “솜털이 날아다니는 듯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무당은 징을 치며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남자 무당과 여자무당이 함께 “굿”을 하였고 그 옆에는 악사들이 있었다.

또한 “굿”을 보는 관리들의 태도도 적고 있다. 공연 장소는 관청의 들앞인데 관리들은 무섭고 두려운지 꼿꼿이들 서 있었다고 적고 있다.

노수신은 유학자이다. 말미에는 혹세무민으로 비춰진 “무당굿”을 유교적 관점에서 재단하였다.

무당굿을 변방의 비루한 문화로 인식하며 당시의 유교적 질서에 배치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으로 한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소재가 남겨놓은 이 기록은 진도 민속문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천금보다도 귀중한 값진 자료로 살펴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진도민속문화에 관한 최고(最古)기록

지금까지 진도 민속에 관한 최고기록은 숙종 41년(1715) 왕조실록과 숙종대왕묘지문 그리고 숙종대왕행장에 똑같이 실려있는 다음과 같은 진도군에 관한 왕의 어명이 있는데 이를 밝혀보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 관동(강원도)의 한 여자가 원통함을 품자 3년 동안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 진도고을에 10년 동안을 흉년이 들어다고 하니 짐이 매우 민망하다. 혹시 원한을 품은 진도섬의 잡귀들이 원통함을 품고 하늘의 기운을 범하여 이런 흉년이 든 것은 아닌가? 전라도 관찰사로 하여금 진도군에 자세하게 탐문하여 즉시 아뢰도록 하라!」고 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왕조실록, 묘지문, 숙종대왕 행장에 함께 기록이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왕의 엄명으로 당시 진도의 원귀를 달래기 위하여 전라도는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 여러 가지 퇴치방법을 대단위로 강구하였을 것인데 그 중에서 원귀를 달래서 속구천리로 멀리 보내버리는 여러 가지 “굿”들이 행하여 졌을 것으로 살펴볼 때 이러한 풍습이 진도 민속문화에 큰 영향을 끼쳐 오늘날 진도가 민속예술문화가 꽃피우는 계기가 되지않았을까? 필자 나름대로 유추하여 본 것인데 소재 노수신의 “무당굿”기록은 이러한 기록을 넘어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자세한 진도 민속에 관한 기록으로 천금보다도 값진 유배문화의 유산으로 살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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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2020-06-04 18:07:20
대단한 발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