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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선각자 개화기에 큰 족적을 남긴 묵암 조병수 (先生)
진도의 선각자 개화기에 큰 족적을 남긴 묵암 조병수 (先生)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06.1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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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인의 선각자 열전

 

진도의 일제강점기의 진도인들의 역할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많은 학계 문화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오랜 동안 유배지로서 진도의 정체성을 찾는 연구는 지속되어왔지만 이는 본래 향토 주체들과는 여러 의식관계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에 본지에서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진도의 매우 선각적인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기업인 묵암(默庵) 조병수씨를 재조명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향토사적 고찰

선생의 호는 묵암, 이름은 조병수, 창녕조씨 향현(鄕賢) 휘 복명 공의 15대손이다.

부친은 조운봉, 모친은 무안박씨(면성박씨)이며, 1893년 진도군 임회면 용호리 918번지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의 요절(7세)로 조부의 슬하에서 자랐다.

선생은 재력가인 조부인 영현 공의 지원과 무정 선생의 도움으로 1910년경 대망을 품고 견문을 넓히면서 사업에 뛰어들어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개화기에 큰 족적을 남긴

                                                                                                   묵암 조병수 (先生)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업적들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였으나, 각종 언론의 내용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선생에 대한 행적들을 향토사적 관점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 진도 최초의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최초 1920년 3월에 창간한 조선일보 초대 진도지국장으로 취임하여 진도에 관한 여러 사실 보도와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등, 1921년부터 1년간 진도에 관한 신문 기사가 총 200여 회 보도되었는데, 이는 당시 전국 8도를 감안하면 대단한 분량이다.

특히 ‘조선일보 사설(1924. 12. 7.)-진도 사건에 대한 사설’은 악덕지주를 고발하는 기사로 당국에 압수되었고, 1924년 12월 12일에 경찰서장을 앞세운 진도 악덕지주들의 횡포를 고발하는 기사를 보도하였다. 이 외에도 진도를 알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소작료 악행 보도(1924. 12. 12))

둘째 선생은 사업가로서 큰 족적을 남기다.

선생은 1910년대부터 강원도 횡성에서 금광 산업을 시작으로 도로 사정이 여의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1923년경 진도 지역에 최초 택시 도입(3대) 운행, 제주항이 개항하기 전인 1925년경 최초 목포-벽파 경유 제주 여객선 운항(2대), 1935년경 진도에 최초 버스 도입(2대) 운행으로 도내 교통 완화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1938년경~1975년까지 최초 산업정미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셋째 진도 지역 개발과 발전에 공헌을 하다.

선생은 1925년부터 1930년까지 진도 지역에 가뭄으로 저수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상만 저수지 축조(1930년 7월경 준공), 용산 저수지 축조(1931.03~1932.04)에 공헌을 하였다.

용산저수지 설립에 관한 기사-용산수리조합은 유지 조병수(부조합장), 복도이랑(조합장) 양씨의 발기로 1928년 4월 5일에 동군 임회면 용호리 조병수 씨 댁에서 창립발기회를 개최한 후 이래 4년 동안 그의 창립에 물적, 심적으로 활동 노력하여, 1931년 2월 10에 설립인가가 되어, 복도이랑 씨(1910년 중반부터 간척 사업 第一장구포 지구(이백여 정보), 第二포산 지구(이백여 정보), 第三해창 지구(일백여 정보)의 간척 사업을 완료하였고, 대표자 조합장이 되었으며 몽리 구역 총면적 畓 162정보와 田 38정보 계 2백 정보 총예산액 2십2만2백3십3圓이며 去5월 14일에 기공하였다.(1931.8.9.조선)

                                                                                               (1932년 4월 준공 용산저수지 기념탑)

넷째 선생은 대부호이자 재력가로서 평생 자선 활동과 봉사 활동을 하다.

언론에 나타난 것은 1916년부터 쌍계사 보수공사비(백 원)를 비롯하여 현금 기부 140여 원과 벼 120석과 진도부공립보통학교 다수 기부, 도초도 리재훈 거대 금액 구제, 고학생 곽인은 경성중학교 졸업 때까지 매달 십여 원 학비 조달 등 지원했으며, 1931년 향현사 중건 시에는 6,700여 평의 토지와 건축 자재를 희사하였고, 해방 후에는 관내 국민학교 교실 증축비 오만 원, 중학설립 장학 재단 기금(400만원(토지)) 희사하였으나, 실제로는 위 내용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덧붙여 1931년에는 용산수리조합 부조합장, 1935년에는 용산수리조합 조합장, 1948년 진도하(荷)우마차조합 조합장을 역임하는 등 봉사 활동을 하였다.

※서기 1990년 경오 3월 일에 경내에 묵암 송덕비를 세워 매년 추모제를 올림.

(※당시 10원-현 100만 원 정도임)(※해방 직후 천원-현 십만 원 이상)

다섯째 재선 도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다.(1933년~1941년)

선생은 1936~7년의 도회 발언록, 의사록 중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포에 돌제를 시설 건의, 의신~고군면 도로를 확충 등 건의합니다.

-보통학교에서 민족차별교육을 하지 않도록 강력 건의하고, 실업보습학교는 지역에서 교실과 실습지를 제공한다면 설치해주겠는가?

-구기자를 장려하고, 진돗개는 보급률 도모하고 훈련소를 세우기를 요망합니다.

-향교 재단으로 중등학교 신설 요망. 보통학교 교원 농촌진흥운동 참가 재고 요망.

여섯째 선생은 정치인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진도군지부 위원장과 민주국민당의 발기인에 추대되다.

선생은 이승만 박사를 총재로 추대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진도군지부에 많은 군민이 참석한 가운데 진도극장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진도에서는 좌·우익 모두가 독립에 방해하는 자는 없을 것이니 독립을 촉성하는 군민의 뜻을 모아 발족을 보게 되었다.

이어 선생은 ‘민주국민당’ 발기 본군당부 결성하고 발기인으로 선임되었다.

한국민주당과 대한민국당이 합당하여 민주국민당이라 이름하고 반공 민주 단결로써 민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송진우 등이 주축을 이루고 본도당은 1947년 2월에 결당하고, 1948년 10월 진도에서 조병수 등이 발기하여 제1회 총선거에 임하였다.

일곱째 진도소작인회를 설립하여 소작료를 최소화하였고, 해방 후에는 국가에서 추진하는 토지 개혁에 소작인들이 토지를 소유하도록 하다.

선생은 진도소작인회를 설립하여 처음으로 정기 총회를 하였는데 선생은 소작인들이 결의한 소작료 四할례에 준하여 실행하겠다고 선언하자, 회원 천여 명이 만세 삼창을 하였다는 동아일보 보도이며, (항간에는 소작료 四할례는 전국 최초라고들 하며) 특히 진도에서는 악덕 지주들의 소작료 七~八할례로 물의를 빗는 것과 크게 비교된다 하겠다.(1924년08.22. 동아일보) 해방 후에는 국가의 정책에 따라 소작인들이 소작하던 본인 토지 대금을 장기간에 상환하여 개인 소유화하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한 개인이 당대 여러 분야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것은 선생의 남다른 봉사 정신, 애향심, 사업가적 능력, 선각자적 통찰력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커다란 사업들이 지역에서 과감하게 시행하였음에도 본 업적들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것은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신문이나 언론을 접하기 쉽지 않았고, 또한 어려운 글(漢字)이라는 점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은 큰 족적을 남긴 ‘개화기에 근대화의 선구자이자, 진도에 대업적을 남긴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고자 한다.

끝으로 선생은 평생의 삶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음을 새기면서, 후대들은 본 업적들이 지역 발전에 특별한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2019년 군비를 들여 87년 만에 중건한 향현사 대강당

                                                                                     진도 향현사에 묵암 송덕비

●정만조(1858-1936):호 무정(茂亭), 1896년 4월 진도에 유배되어 1907년 12월 풀림, 후학 양성, 은파유필 저, 1907년 이후 교류(묵암 조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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