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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칼럼 /섬사람에게 생색을 내지 말라!
남인 칼럼 /섬사람에게 생색을 내지 말라!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07.2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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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정부나 광역지자체가 섬 주민들에게 예산배정을 하면서 ‘특별한’ 배려와 시혜를 내려준다는 단체장, 실무 담당자들의 인식은 좀체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이 내세우는 전가의 보도는 소수 인구에 비한 과도한 비용이라는 생색내기다.

과연 그 말은 맞는 것일까? 텍도 없는 논리다. 섬과 뭍,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도 정작 육지것들의 편리를 위한 사업이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국토균형발전의 기본 원리를 수도권에 비해 이용율이 크게 떨어져 예비타당성 요건에 절대적으로 미달된다는 것이다.

섬이란 용어는 마음심(心 )字가 돌이끼처럼 쌓이고 또 쌓여 외로움을 견디고 새들의 징검다리 역할을 위해 그 어떤 파도에도 떠밀리지 않고 지켜온 것입니다. 그 떠나지 않는 마음. 섬은 신독(愼獨)의 수행을 지금까지 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섬을 폄하하고 그저 생색내기용 ‘섬의 날’을 제정해놓고도 정작 섬 주민들의 발을 묶는 교통비 부담을 덜어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진도는 현재 45개의 사람사는 섬이 존재한다. 마음심자가 세 개가 모이면 찰할 수 자가 된다. 섬은 쇠뫼다. 일본에서는 시마라고 불린다. 다께시마는 죽도가 아닌 독섬을 말한다. 독은 돌의 남쪽지방 사투리다. 지금도 진도에서는 독, 도팍, 독담헐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시인이자 문화해설사인 이 모씨는 아호를 아예 ‘도팍’으로 정했다.

진도의 미래는 바다와 섬을 어떻게 안전하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조도사람들은 지금도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면 조바심을 내며 섬사람의 애환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기 일쑤이다.

이동진 진도군수는 조도연륙교 건설을 공약으로 내 걸었지만 현실성은 많이 떨어진다. 우선 진도항을 대형 선박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국제항으로 개발하고 조도면 신전리와 관매도간 연도교부터 먼저 착수해야 순서가 맞을 둣 하다. 어쨌든 하조도 명지리와 나배도간 연도교 완공이 가시화되고 있다. 상조도에 있는 옥도는 눈 앞에 있는 이웃 섬과 제대로 왕래를 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래 동안 일제의 방어기지, 탈근대화를 위한 산업일꾼을 채우기 위해 섬지역 주민들은 반자의적으로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 섬사람의 고유한 그들만의 공동체를 해체하면서 서구의 문화 기술 등이 물밀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섬처녀들은 섬을 떠나 육지 총각하고 결혼하는 것을 최고의 꿈으로 여겼다. ‘섬마을 선생님’ ‘연평도 아가씨’ 등의 트롯트가 공감을 주고 인기를 끌었다.

70~80년대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독재정권 유지를 위해 섬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무고한 죄를 씌워 공포의 본보기로 장기구속하는 범죄를 반복하였다. 공안세력들은 또 다른 연쇄살인범이나 조폭이나 다름없었다.

저항 의지를 가진 자들은 다른 방법으로 싸우기 위해서 섬마을을 뜬다. 참고 견디며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은 허울만 좋은 새마을의 기수라며 모자를 씌워주었다. 우리가 지켜온 본디 공동체문화를, 자연과의 공생 정신을 온전하게 회복해야 옳았다. 비틀즈의 ‘렛잇비’처럼. 그런데 하나의 고향에서 이리저리 자본주의의 새로운 서열로 인해 물질적으로 자꾸만 쪼개져 나간 구성원들은 한 자리에 쉽게 모여지지 않았다. 속칭 고향을 떠나 신분상승과 출세를 이룬 이들은 고위 공직자나 기관단체장, 기업가 등으로 훌륭하게 신분세탁(?)을 하여 금의환향을 꿈꾼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한 인사들이 더러 있었다. 관선시대에는 진도군수로 발령받는 것을 큰 명예로 삼았다. 민선시대에도 현 군수가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라고 하는, 진영별 폭력과, 국가라고 하는 정치 공동체만을 절대적 단위로 삼는 시기에 우리는 짧게는 50~60년, 길게는 80~90년, 2대째 3대째 나그네살이로 연명한 셈이다. 그 상태에서 개발 독재를 만나고 허리끈을 조였던 세월은 ‘절대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오직 앞만 보고 달렸던 뿌리 뽑힌 사람들의 슬픈 여로(旅路)와 같은 것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노래들은 그래서 ‘민족의 온전성’을 그리워하는 노래라 볼 수 있다. <가요무대>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건드려온 프로였다.”(김형수의 나의 트롯시대 중에서)

진도사람들은 이제 일본은 물론 미국 뉴욕과 LA, 하와이까지 진출해 살고 있다. 북한이나 만주지역 간도 땅 등에도 정착해 사는 섬 동포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서울이야 진도 본섬의 인구보다 몇 배가 넘는 향우가 살고 있다. 제주에서 강원도까지 향우회가 활동하고 있으며 매년 진도군에서는 군민의날을 맞아 이분들을 초청하고 있다. 이 향우들이 진도특산물을 앞장서 팔아주고 소개하며 중개판매도 하며 긴밀한 관계를 이루며 상부상조한다.

“우리 만일까요 뭐, 모두가 다 그렇게 사는 것이겠지요. 무엇이든 오래 그리워하면 그게 다 사방 바다로 밀려나가 한정 없이 저런 파도를 만들어낸대요. – 파도가 아파하는 소리가 너무 커서 밤잠을 설치기도 했지라.”

고려말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 무려 87년이나 디아스포라의 고난을 겪고도 마침내 진도인들은 해남을 거쳐 진도군을 재창군하였다. 섬사람들의 강인한 귀속성을 내보여주는 사례이다.

진도군은 다시 찾아오는 살기좋은 진도를 기치로 하여 지역개발과 사회문화인프라구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정부에서도 한국의 섬 가치를 재인식하고 좀 더 통큰 정책으로 균형발전을 이뤄내기를 다시 한 번 촉구해본다.(박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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