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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에는 작은 갤러리가 뜬다
칼국수에는 작은 갤러리가 뜬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07.23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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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바람이 불지 않아도 어디론가

떠나야 할 때가 있다

살아온 날보다

내 이름이 너무 가볍거나

그림자가

햇살보다 더 무거운 날

강계 갯샘 갤러리로 떠난다

한 소설가의

새벽 원고지가 떠다니는

칼국수 한 그릇

바지락을 헤치며

다시 삼키는 것이

뚝뚝 떼어난 울음

공양을 비운다

 

우리 생의 작은 갤러리다

자전거는 멈추면 쓰러진다

아직도 오독거리며 질긴 유고

몇 마디를 젓가락으로 건져낸다

겨우내 쌓아둔 침묵들이

부침개 하나 익힐 화목이 될까

수제비 빈 그릇마다

해인삼매 바다가 밀려오는

높고 작은 갤러리.

 

 

 

수제비국 위에 뜬 작은 갤러리

 

세상은 그림이다. 아니 화첩이다. 우리는 저마다 필선을 따라 화첩기행을 떠난다.

하지가 지났다.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하다고 해서 여름의 바다가 사라질 리가 없다. 도시의 바이러스로부터 도피하려는 무리들이 ‘메멘토 모리’라는 주문을 내팽개치고 남쪽 황토길 삼백리를 지나 남해안 바다를 찾고 있다. 누군가는 오두막에서 데카메론을 쓸 지도 모른다.

바닷가 작은 갤러리는 온통 초록의 향연이었다. 진도는 산도 들도 바다도 청록의 노래를 부른다. 바닷길을 달리는 자전거를 쫓아가는 향은 봄동에서 겨울대파까지 스펙트럼을 이룬다. ‘바다의 꽃’이라는 마플로는 아열대의 푸른 그늘을 드리운다.

그림과 글씨를 좋아했던 송나라 휘종은 궁중 화원들에게 어느날 "꽃을 밟고 돌아가는데 말발굽에 향기난다 踏花歸去馬蹄香"이라는 제목을 화제로 내걸었다. 단 꽃을 일체 그리지 말 것을 주문했다. 다른 화가들이 모두 데꿀멍할 때 한 화가가 나비떼가 말 꽁무니를 쫓아가는 그림을 그려 올렸다. 말이 떨어진 꽃을 밟고 가자 그 발굽에 배인 향기를 맡았다는 것.

이 유명한 일화는 요절한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도 소개되어 있다. 이후 여인을 태운 말을 따르는 나비의 구도는 하나의 정형이 되었다. 나는 늘 우초의 자전거를 사람을 태운 말로 비유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임동확 교수는 또 다른 요절시인 ‘안개’의 시인 기형도의 ‘정거장에서의 충고’에서 “모든 인간의 삶은 결국 거대한 은유‘라고 규정한다. 기형도는 왜 정거장에서 ’희망을 노래하련다‘고 하면서 궂이 ’미안하지만‘ 이라고 했다. 도시의 샛강은 죽음의 강이었다. 침묵을 강요하는 개발 자본주의의 수렁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바다는 재생의 세례강이다. 우초는 늘 죽림바다를 ‘내 마음의 호수’라고 불렀다. 캐도 캐도 나오는 바지락과 귀머거리 해방고둥, 화랑기가 살아있는 갯벌. 그 가운데 바이칼호 알혼섬의 돌무더기같은 갯샘이 오래 동안 이 갯마을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지금은 우초 박병락 화백의 그 푸른 붓질의 물길질이 나그네들 영혼의 갈증을 적셔준다.

무엇을, 그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희망이 된다.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정거장의 시간표는 ‘주머니 속의 동전처럼 다보탑이 되기도 하고’ 뒤집으면 짜투리 숫자로 다가온다.

바다로 떠나가서 바다에다 그 무엇을 함부로 버리지 말자. 많은 충고들도 쉬이 씻어보내지 말라. 저 잿빛의 거대한 충고에 지레 뒷걸음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모두가 진도에서 시인으로, 화가로, 다시래기 소리꾼으로 태어났다. 오직 두려운 것은 알고 좋아하면서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 뿐이다.

한 그릇의 수제비국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원형을 뭉게면서 점착성을 힘들게 얻어낸다. 그러나 정작 한 점 한 점 살을 떼는 데는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 기다리는 손님들은 울금막걸리를 살짝 맛보며 벽에 걸린 작은 액자 속에 들어앉은 산과 섬들을 제 삶의 무게와 흔들림을 견주어 보기도 할 것이다. 물리적 규모는 오히려 염치없이 상상력을 짖눌러버린다. 그릇은 그 안이 비어있으므로 쓸모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노담은 말하지 않았던가.

조도에서 5년을 보내고 남쪽 섬 바닷가 진료소에서 아내가 살고 있을 때 나는 읍내에서 막버스를 기다리며 정거장의 시간들을 소요하다보면 어디선가 싸이렌이 울리곤 했다. 애국가도 새들도 떠났지만 머릿속을 예비검속이라도 하는 듯 울리는 싸이렌소리는 여전히 우리들의 저녁시간을 지배하였다. 아슬아슬한 주머니 속의 동전들을 만지작거리며 은색 주화의 개수를 헤아려가면서 죽림행 퇴근버스 여행을 반복하였다. 아내는 온전한 사내를 기다렸지만 나는 늘 잘못 배달되는 부실한 반려품에 불과했다. 일상을 힘들여 조인 흔적은 없고 막걸리 냄새에 느슨해진 허리띠와 아침 바다내음과 맞바꾼 몇 구절의 힘겨운 문장들을 지역 동네신문사 칼럼 문구를 미역귀를 오물거리듯, 시간에 수액을 바르며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림마저 잊어버렸을 때에도’ 그 사내는 봄이 아닌 계절로 찾아오곤 했었다.

그 바닷가에는 수제비국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주인은 화가였다. 그 부인도 본디는 미술학도였다. 이미 미술대학을 다니던 젊은날에 전국무등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을 정도로 필력과 구상력이 뛰어난 예술인이었다.

그러나 고향의 충고는 솔숲 방풍림을 뚫고 뭍으로 오르는 해풍처럼 시리고 영혼을 에이게 하였다. 황토집을 짓기 시작했다. 나는 누런 막걸리를 마시러 그 현장 마당을 자주 찾았다. 우초는 성실하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강계 바다에서 건져온 숭어회도 잘 떴다. 초은 박태우 화백도 ‘연 시리즈’를 약념(藥念)으로 풀어놓곤 했다. 산다는 것은 그래 한 시라도 은유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마침 그 때 오봉산 건너 탑립마을로 50대 중반의 소설작가 한 분이 이사를 왔다. 문화일보에 소치 허련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소설 ‘꿈이로다 화연일세’를 마감하고 이곳 남쪽 바다가 훤히 보이는 언덕에 한옥집을 지었다. 자운(紫雲) 곽의진씨였다. 서울 문단에서는 잘 알려진 여성 소설가로 김동리선생의 추천을 받아 여러 단편집을 펴냈으며 직접 출판사 운영도 하며 문예지까지 뻗쳐 아동문학시리즈 개발 도중 접었다고 알려졌다.

그녀가 찾는 향은 초의(艸衣)선사 다향이었다. 그 향을 찾아 두륜산 일지암을 자주 다녔다. 만덕산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야생차 산길로 다녔다. 또한 이 갯벌에서 엉덩이가 실팍해진 여인의 삶을 진솔하고 진득하게 새겨놓은 ‘실팍한 궁둥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춘심씨는 지금도 물이 빠지면 바자락을 캐로 갯벌로 나간다. 젊어서 서방 잃고 대바구로 얻은 것이 노래였다. 그 노래의 흥으로 더운 피를 씻었다. 자운선생은 명량대첩을 호남 백성들로 재조명한 소설 ‘민(民)’도 의욕적으로 냈다. 우재 이철재. 나절로미술관장. 김희준 MBC PD. 이창준 현 재경향우회 사무총장 등. 수제비 한 동우로 이문회우(以文會友)를 다졌다.

(자운토방에서 ‘칼의 노래’를 구상하던 시절의 김훈과 곽의진)

이제 자운은 여귀산의 마고선녀가 되었다. 벌써 5년이 지났다. 이런 6월이 깊어지면 하얀 찔레꽃을 모시적삼 가슴에 꽂고 오봉산 탑돌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죽림 시향골에 살던, 막걸리 간첩의 누명을 20년 만에 벗어난 장의균씨도 7년8개월의 무고한 옥고가 재심이 받아들여 보상을 받아 요즘 자주 죽림을 찾는다. 페관도 두문불출도 자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무르강에서 알마티로 강제이주된 여천 홍범도장군의 흔적을 찾아 카자흐스탄을 자주 찾기도 했다. 죽림은 그에게 기다림과 인고의 ‘거대한 은유’가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는 안식처이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은유와 상징의 바다를 떠나지 못한다.

바다는 금갑만호의 식탁이며 세례강이다.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인 전경수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바다와 함께 사는 강계 사구미마을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풍습 등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바’와 ‘단이’라는 진도만의 인칭접미사와 대바구 풍습을 밝혀내 학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유명하다.

진료소와 갤러리 식당 바로 앞 접도와 다양한 아열대 식생대 야생초의 남망산. 금갑해수욕장과 사구미 연대, 탑공원, 국립남도국악원 등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가 가득하다. 여름엔 진도참전복 먹이로 쓰는 다시마가 많이 나오고 늦가을부터는 앞바다에서 우윳빛 굴이 나온다. 날이 추울수록 굴구이와 굴회는 그 맛이 일품이다. 굴부침개도 겨울철 추위를 물리치고 배를 든든히 채우는데 제격이다. 그림보다 더 그림같은 풍경을 가진 죽림 강계바다. 나의 두 번째 시집 『몽유진도』를 이 마을바다에 헌정한다.(박남인 진도문화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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