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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칼럼 / 위리안치가를 세우자!
남인칼럼 / 위리안치가를 세우자!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09.0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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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찰산은 진도의 주산이자 최고봉을 떠받들고 있다. 학정봉을 뒤로하고 사상저수지 왼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 초입에 아담한 묘 하나가 있다. 그냥 스쳐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진도로 유배를 온 벼슬아치들은 진도를 떠날 때 현지에서 수발을 다 해준 여인에게서 자식을 얻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이씨 여인이었다. 허 소치 선생이 만년에 기거하였던 운림각 주변에서 주막을 열어 생계를 이엇다고 한다. 마침 미산 허형과 친했던 무정 정만조가 유배신분이었지만 자주 이곳을 찾아 시회를 열고 하였다. 자연스레 이씨도 이들을 위해 술을 담가 내려 불러와 어울리곤 하였다. 나중에 무정은 사천리에 관란제라는 서당을 열기까지 했다. 관란(觀瀾)은 생육신의 한 분인 이원호의 호로 충북에 관란정이 복원되어 있다.

원호가 단종을 기리며 쓴 충심가를 소개한다.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가다.

이제 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물어 거슬러 흐르고저 나도 울어 보내도다.”

허 미산의 적극적인 주선이 있었던지 무정과 이씨 사이에 아들이 생겼다. 이 묘의 비석 옆면에는 자(子) 정인용(鄭寅庸)이라 새겨져 있다. 무정이 해배되었을 때 그는 홀로 상경했지만 나중에 아들을 불렀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노수신은 조선 중기 19년을 진도에서 유배생할을 하였지만 소재 또한 현지 아내도 자식도 외면했다. 당시의 신분제도가 그러하였다.

정만조는 18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다. 글과 글씨에 뛰어나 이름을 날렸고 1894년 내부참의와 궁내부 참의관을 지냈다. 1895년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1896년 진도에 유배되었고, 12년만인 1907년에 풀려나 복관되었다. 유배 중에 진도에 글방을 열고 2세 교육에 힘썼으며 특히 한 지역의 모습을 시문학 속에 담아내면서 한국 문학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만조는 진도군수의 청에 의해 소치가 살았던 운림산방으로 거처를 옮겨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진도읍 동외리 원동마을(소현당)에 큰 글방을 열고 글을 가르쳤다. 이곳이 바로 진도지역 현대교육의 효시가 되는 ‘광신학교’이며 현재 진도초등학교가 그 맥을 잇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강강술래.

‘은파유필’은 칠언율시가 대부분이며, 농촌생활과 민속을 시로 표현한 작품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추석잡색’에는 진도 사람들의 추석 명절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보리쌀로 빚은 술을 부글부글 괴이는데

보름달보다 더 크게 송편을 쌓아놓고

이마에 땀 흘려 김매던 농부들

배불리 먹고 옷깃 풀며 기운을 내는구나

높고 낮은 소리내며 천천히 돌고 돌아

한 동안 서 있다가 한 바퀴 도네

여자들 마음은 사내 오길 기다리니

강강술래 부를 때 사내들은 찾아드네

담 넘세 담 넘세 손을 잡고 담을 넘세

둥글게 모여 앉아 바보처럼 웃어보세

이 밤도 깊어가니 손과 발을 맞추어서

달빛도 옮겨가고 담 밑도 어두워졌네

진도를 조선시대 최고의 유배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든다. 아니 아예 유배지였던 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거의 없다. 유배와 관련해서 진도군은 수십년 동안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근래에 진도학회와 진도문화원이 몇 차례 세미나를 열고 책자를 번역하는데 그치고 있다. 함경북도의 삼수 갑산군보다 더 많은 유배자들이 들끓었다고 자랑(?)인지 푸념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놓지만 정작 이와 관련한 발굴 연구 작업들은 너머 미미하다.

진도의 관문으로 역할을 해 왔던 벽파진은 진도 유배자의 첫 걸음이자 첫 인상이었을 것이다. 때로 진도군수나 진도 감목관으로 발령나 오는 관리들도 속으로는 ‘유배’를 당했다는 심정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이숙함만이 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여해 이순신은 진도군수로 발령받았지만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승진하여 일본과의 전쟁에 나서야 했다.

이에 앞서 소재 노수신은 진도에서 무려 19년이나 적거의 삶을 이어가야 했다. 당시 군수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옥주이천언’이라는 귀중한 글을 남겼다.그가 지향하는 유학은 양명학이었다. 퇴계학파로부터 공격을 받으며 시달림을 견뎌야 했지만 결국 영의정에까지 벼슬이 올랐다.

최근 진도 문화관광해설사들은 영암군 시종면과 해남 삼산면을 다녀왔다. 진도군이 무려 87년 동안 섬 고향을 비우고 전전하고 다닐 때 정착했던 곳이 명산면과 삼촌면이었다. 진도사람들은 왜구들의 침탈에 시달리며 마침내 공도화 정책에 따라 유대인들처럼 떠돌아야만 했었다. 자기 땅에서 유배되어 고향을 바라보는 심정은 얼마나 비통하였을까?

진도가 유배지로서 특히 중죄인들이 많이 들어왔기에 탱자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삼은 초가삼간 위리안치가에서 머물토록 하였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의 하나로

圍에워쌀 위 籬떠날 리 安편안 안 置둘 치로 읽는다.

진도군에서는 진도의 유배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유배공원이나 기념조형물을 만들겠다고 했으나 수 십 년이 지났어도 감감무소식이다. 그 기간 동안 남해군에서는 많은 예산을 들여 유배문학관을 지었다. 서포 김만중을 기념하는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진도 지산면 안치에는 기와집이 하나 있다. 소재 노수신이 이곳에서 19년간 적거했다지만 겨우 서당이나 열어 사는 처지였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니다. 진도에서 유배받아 사약을 받고 죽은 이들도 더러 있었다. 이주가 지은 금골산록(산행록의 효시), 유와 김이익의 순칭록, 조선 후기 이덕리의 동다기(상두지), 노수신의 옥주이천언, 정만조의 은파유필 밖에 또 다른 더 많은 저술 자료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각 마을에 내려오는 일화도 노인일자리사업과 관련하여 채록토록 하자. 그리고 이런 유배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일부 복원은 물론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전시되어야 할 것이다. 옛 것을 잃고 미래를 논할 수는 없다. 김일성의 스승이었던 손정도 독립운동가도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추사와 글씨로서 그 명성을 견주었던 원교 이광사가 진도에서 직접 유배생활을 했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뽕할머니, 우리 앞에 현신 강림한지 40여 년

진도군에서는 삼별초공원에 한옥기와 팬션을 지어놓았다. 그러나 아직 초가집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위 운림예원도 마찬가지다. 접도 유배공원은 정자 하나만 덩그랗게 세워져 있을 뿐이다. 수익성을 고려한다면 아담한 초가집 하나를 지었으면 한다. 강진의 다산초당도 초당이 아닌 와당으로 복원되어 있다.

왜 근래에 들어 초가집을 경시하는지 모르겠다. 꼭 민속마을에 가서야만 구경할 수 있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실질적인 복원이 자구 왜곡 변형되면 해설사들도 곤혹스럽기만 마찬가지다. 광해군의 동생 인성군이 유배를 왔는데 지산면 인지리쪽인지 임회면 폐동(왕살이골)에서 살다 사약을 받았는지도 매우 궁금한 대목이다. 자식들은 천민으로 강등되어 제주도로 옮겨 살아 겨우 연명을 했다. 그 후손 중에 이태복 전 노동부장관이 있다. 진도문화원을 찾아 직접 진도 구전지역을그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분명하게 알 수가 없었다고 하면서 나중에라도 무슨 단서가 발견되면 꼭 알려달라고 했다. 조선후기나 구한말에는 더 많은 유배자들이 진도에 득실거렸다. 무정 정만조도 진도에서 ‘은파유필’을 저술하였다. 남도의 민속예술을 연구하는 자들에게는 아주 귀한 자료이다. 정조 때 이덕리(李德履 1728~?)는 진도 유배지에서 상두지(桑土志)를 지었다. 상두(桑土)는 뽕나무의 뿌리다. 『시경』 「빈풍(豳風)」, 「치효(鴟鴞)」편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덕리는 『상두지』에서 호남과 영남 지역에 자생하는 차를 국가에서 전매하여 중국 국경에 내다 팔아 여기서 생기는 막대한 이익으로 국방 시스템을 개선할 획기적이고도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했다. 아무도 차의 효용가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때였다. 밑천을 따로 들일 것도 없이 노는 노동력을 이용해 엄청난 국부를 창출할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누구에게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잊혔다. 다산이 『경제유포』, 『대동수경(大東水經)』에서 한 차례씩 초의(艸衣)가 『동다송(東茶頌)』에서 그의 『동다기(東茶記)』 한 구절을 인용했을 뿐이다.

유배자인 이덕리는 전의 이씨라 하여 ‘記茶’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는데 후세에 한 동안 다산의 저술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를 바로 잡은 이가 정 민 교수이다. 진도읍 통정리, 두정리에서 주로 유배생활을 하였다.

위리안치는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귀양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둔다. 탱자나무는 전라남도에 많았기 때문에, 대개 죄인들은 전라도 지역의 섬에 유배되었다. 안치는 왕족이나 고위관리에게만 적용한 유배형인데, 죄의 경중에 따라 고향에 두는 본향(本鄕)안치, 먼 변방에 두는 극변(極邊)안치, 섬에 두는 절도(絶倒)안치, 위리(圍籬)안치 등이 있었다. ‘위리안치’는 집주위에 울타리를 쳐서 둔다는 뜻이나, 사실은 멀리 귀양을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탱자나무를 집 주위에 촘촘히 둘러 심어 외부와 차단하는 형벌이다. 촘촘히 심은 탱자나무 탓에 집 안에서는 오직 하늘을 바라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안에 갇힌 사람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개구멍을 뚫어서 그곳으로 밥을 넣어줬어요. 그러니까 완전히 감옥살이나 다름없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위리안치를 더욱 엄하게 해 죄인이 거처하는 방 앞에다 탱자나무를 또 심어 격리하는 천극안치를 하기도 했다.

 

유배관련 시설을 지을려면 의신면 사천리나 접도마을이 타당성이 크다고 본다. 현재의 시설을 보완 활용하는 방법을 찾는다면 삼별초공원 주변이 적지라고 볼 수 있다. 선택과 집중의 논리도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유배지라고 정부로부터 수백년 경시되어왔다며 울분을 토하면서도 우리 후손들이 그 흔적을 지우거나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배자들의 흔적을 복원하는 작업과 함께 진도복군 운동에 앞장섰던 선조들에 대한 숭모 시설과 역사에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한다. 세종19년에 황희 정승이 제안하여 공도에서 다시 진도군이 설군되었으니 이 얼마나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현재 진도군 읍(성동리)에는 향현사가 있다. 안에는 소현당이라는 편액도 있다. 다시 한 번 부탁하거니와 진도군에서는 매년 봄에 제사를 모시는데 일부 제수품 구입비를 지원하고 있지만 너무 적은 금액일뿐더러 제대로 조명을 하지 않고 있어 안타까움을 산다. 먼저 근원을 찾는 조상숭배와 그 덕과 성을 기리고 나서 진도 유배문화의 철저한 재조명이 따라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관련된 각 문중의 족보를 수집하고 자료를 정비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매년 진도군민의 날엔 진도군수가 일찍 향현사를 찾아 배례하고 행사를 치렀으면 한다. 현 군수가 종교적으로 다른 입장이라 해도 공적으로는 진도 복군 유공자분들에게 먼저 예를 다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올 해부터라도 향현제례에 진도군수가 반드시 수헌관으로 참여해야 하며 더 많은 후손들을 초빙하여 식사라도 대접하고 향현사집을 발간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봄 영등살에열리는 뽕 할머니 제례에는 수 억원을 들여 축제를 열면서도 그보다 더 경사스러운 진도 복군의 혁혁한 공을 세운 분들의 노고를 잊지않고 받드는 일이야말로 진도의 예(藝)는 예(禮)에서 비롯되었다는 칭송과 본을 받게 될 것이다.

비록 우리 조상들은 유배자들을 보살피는데 빈궁한 살림살이에도 먹고 자는데 보살핌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이제는 그 음덕을 나누는 관광문화사업으로 자연스레 승화하는 일이야 말로 유배자들의 후손에게도 자긍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진도의 돌 자갈 하나, 바람 한 점에도 진도의 유배문화와 북쪽 그리는 단심이 깃들어 있는 고장으로 인식되도록 군민 모두가 노력해나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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