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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특집 / 조국과 예술혼을 위하여
추석특집 / 조국과 예술혼을 위하여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09.26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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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정신 빚어낸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


    

▲ (좌)소전 손재형 書 사해인민송태평(四海人民頌太平)1969년 作
 (우) 1956년 전남 진도 벽파진에 건립된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와 탁본. 소전 손재형이 쓴 비문은 전체 888자의 국한문 혼용체로 예서의 바탕에서 글씨의 형태미를 다르게 표현한 역작.
 1902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1902~1981) 선생. 우리나라 근 현대 서예사에서 대표적인 작가이다. 모든 서체를 두루 익혀 선생 스스로 창안한 소전체(素荃體)의 예술성에 대하여 평론가들은 역사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을 잇는 대가로 평가하고 있다. 소전 선생은 4년 동안 중국을 왕래하면서 중국 근대의 가장 저명한 고고학자이며 금석학의 대가 완원 나진옥(羅振玉. 1866~1940) 스승에게 갑골문자와 금석학을 공부하였다. 이 같은 연구를 통하여 갑골(甲骨)과 금석문으로 전승하여온 고체(古體)의 바탕에서 생성된 전서(篆書)와 이를 토대로 한층 실용과 멋을 담아낸 예서(隷書)에서 현대적 조형성을 추구하며 깊은 예술로 승화시켰다.
 추사는 개경의 옹방강 사랑방에서 사귄 학자중 완원을 가장 흠모하여 그의 호를 완당이라 지어 부를 정도로 완원을 숭모하였다. 또한 옹방강을 금란지교로 삼아 고대의 금석문을 깊이 연구하여 조선 서예가들의 기를 죽이곤 하였다.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가 밝혀낸 내역이 여기에 담겨진 것이다.
 이에 앞서 추사는 예산에 살면서 마을 앞을 흐르는 시냇물이 다 마르고 뒷산의 바위가 닳도록 글씨를 썼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가 부마도위였기에 물질적으로 풍부한 정황은 거론하지 낭ㅎ았다.
  박제가(朴齊家)의 제자 김정희(金正喜)와 완원(阮元)의 인연이 특별하다. 스승의 인맥에서 시작된 만남이다. 완원(1764-1849)은 자가 백원(伯元), 호는 운대(芸臺)다. 건륭제(乾隆帝) 가경(嘉慶) 연간 경학파(經學派)인 건가고증실학 전성기의 저명한 학자이다. 1809년 10월28일 24살의 김정희는 친아버지 김노경이 동지사 겸 사은부사(冬至兼谢恩使副使)로 청나라 연경에 갈 때 아버지를 따라서 청나라 연경에 도착했다.
 “가슴벅찬 생각이여, 드넓은 세상에서 진정한 벗을 사귀고픈. 그런 벗을 얻는다면, 죽어도 좋으리. 하늘아래 수많은 명사들, 부럽고 또 부러워라(慨然起別想, 四海結知己, 如得契心人, 可以为一死, 日下多名士, 艳羨不自已)”라는 시에는 중국문인과의 교제를 기대하는 간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소전 선생의 작품세계는 고금의 서법을 망라하여 창의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한 정신이 모든 작품에 담겨있다. 유홍준은 너무 흠모하여 산숭해심(山崇海深)에 몰두하여 모작(또는 위작)임을 알지 못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소치는 추사의 이 글씨를 판각하여 팔기도 하였다. 그만큼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았으며 이상적에게 세한도에 인장(印章)으로 새긴 장무상망(長毋相忘)과 쌍벽을 이루었다.
 (畵意如此而後 爲形似之外 此意雖 古名家得之者絶少)
   *장무상망(長毋常忘,서로 오래 잊지 말자). 추사의 '세한도' 그림에서는 ‘長毋相忘’이라는 인장이 보임. *竹爐之室 (대나무 화로가 있는 방). 풍광이 아름다우니 죽음도 두렵지 않다.
 특히 문자에 뜻을 내면에 가두지 않고 표현의 조형성으로 승화시킨 노력은 첨단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현대 서예가들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가들에게 서예의 예술성이 정신과 표현의 융합임을 일깨운 교훈이기도 하다.
 소치 허련은 노년기에 유람을 다니면서 스승인 추사의 작품, 산숭해심을 판각하여 팔아서 여비로 삼았다고 한다.
 추사가 그러하였듯이 삼절을 따르듯 한자의 고유한 상형의 미를 품은 전서(篆書)에서 사물의 실체적 형태를 중시한 문자의 관점만이 아닌 원형의 사물에 담긴 사유적인 조형성을 예술로 승화시킨 내용들이 소전 선생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아가 소전 선생은 이와 같은 전서에서 실용의 서체로 발전한 예서의 조형성을 가장 자유롭게 확장한 선구적 지평을 열고자 했다.
 이는 서예가 법과 도의 정형적인 산물이 아닌 이를 바탕으로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자유롭게 표출하는 가장 승화된 예술임을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증명한 것이다. 소전 선생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전서와 예서의 융합과 교감을 통한 변화무쌍한 조형성의 확장이다. 진도 벽파진의 전첩비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소전 선생의 작품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중년기에 나타나는 작품의 특징은 전서와 예서의 전통적인 필법이 녹아내리면서도 각기 다른 전서와 예서의 조형성을 자유롭게 교차하는 독창적인 작품에 열중하였다. 이는 1945년 조국 광복 이후 나라에 만연한 오랜 일제 강점의 잔재를 일깨우려는 의식이 빚어낸 작업이었다, 선생은 광복을 맞은 나라의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한 고독한 심연의 예술세계 소전체에 천착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끊임없는 연구로 독창적인 소전체의 창안 이후 노년에 이르면서 깊은 울림을 담은 완숙한 필법으로 더욱 자유로운 조형미를 추구하면서도 엄격한 균형의 미를 품은 작품을 선보였다. 전서와 예서의 융합을 넘어 오체(전예해행초)의 절묘한 혼합과 대비가 어우러졌으며 자획의 파격과 함께 여백의 조형성까지 품어 내린 고졸하면서도 현대적인 추상미까지 아우르는 작품들이 탄생하였다. 이와 같은 선생의 작품세계에서 분명하게 살펴지는 특징은 글과 그림의 근원이 같다는 서화동원(書畵同源)의식이다.
 소전선생은 글씨 말고도 80여 폭의 문인화를 남겼다. 작품마다 기품이 넘쳐나고 산정 서세옥등 서화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고사탁족도, 그가 구입해 살았던 석파의 옛 집을 그린 풍경은 고택의 아취가 그윽하다.

                                                                                         석파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석파랑
 선생의 작품은 대체로 자획의 가볍고 무거움을 분배하는 경중(經重)의 비례를 예리하고 둔탁한 형태를 나타내는 정신성의 균형인 예둔(銳鈍)으로 품고 있다. “소전 손재형 선생의 작품은 직선과 곡선에 담긴 선율적인 조율을 나타내는 곡직(曲直)이 독보적으로 자유롭다. 이는 서예가 점(點)과 선(획,劃)으로 이루어지는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이 고도로 승화된 예술성의 그림이라는 의식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는 서예에서 각 문자의 짜임과 모양을 뜻하는 결구(結構)와 문장 전체의 구성의 법과 같은 장법(章法) 이 그림의 구성과 맥락을 같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이와 같은 고사의 어원을 헤아려보면 서예에서 결구(結構)는 짜임과 모양을 헤아리는 정신적인 셈법의 그림이다.
 이어 서예작품 전체의 구성 법칙을 의미하는 ‘장법(章法)이란 고대 달력에서 주어진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려는 지혜에서 유래된 어원’으로 여백의 균형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지혜이다. 이와 같은 장법(章法)은 특히 전각(篆刻) 예술에서 가장 바탕을 이루는 요소이다. 여기서 문자의 발명 이후 다양한 재료에 써 내려간 서예와 다양한 재료에 새겨간 전각이 훗날 다른 쓰임새로 구분되면서 나뉘었지만, 그 본질적이고 원형적인 출발의 맥락은 같았다는 사실이다. 이에 중국의 주요한 서화가들이 전각에 천착한 사실을 중시하여야 한다.
 소전 선생이 이와 같은 서예의 장법과 전각의 장법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헤아린 사실에서 선생의 독창적인 소전체의 세세한 맥락이 살펴지는 까닭이다. 이와 같은 선구적인 예술세계를 펼쳐간 선생의 깊은 업적은 한글의 원형적인 조형성과 심미적 예술성을 추구한 소전체식 한글서예의 창안에 있다. 선생은 나라의 정신 한글이 창제된 이후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그리고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과 같은 역사적인 기록의 판본에 쓰인 글자를 원형으로 유구한 민족의 정신이 깃든 한글서예의 새로운 예술성의 창안에 주력하였다. 이에 역사를 품은 고유한 판본체(훈민정음체)의 형태를 바탕으로 소전체의 전서와 예서의 자유로운 필법을 융합하여 독창적인 한글체를 추구하였다. 이와 같은 독창적인 한글체의 탄생에는 선생의 스승이신 서예가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6)선생이 1923년 일제강점기 시대에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한 한글서예작품 ‘조선문’과 같은 맥락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선생의 한글 서체는 1966년 ​육군사관학교 화랑대 현판을 남기셨다. 이후 오늘날 창원시 진해구인 옛 진해시 북원로터리에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4월 13일(이충무공 탄신일)에 국민성금으로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이순신 장군 동상 명문(이은상 글)을 예서체 한글로 남기셨으며 다음 해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전서 한글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후 1956년 전남 진도에 세워진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李忠武公碧波津戰捷碑)는 예서와 전서의 서법이 어우러진 한글 서체였으며 국정교과서의 여러 표지를 쓰신 이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주옥같은 한글 서예작품을 남기셨다.
 소전 선생은 바로 이러한 의식의 바탕에서 오늘날 서예를 이르는 중국의 명칭 서법(書法)과 일본의 서도(書道)와 달리 ‘서예’(書藝)라는 가장 소중한 명칭을 제창하신 분이다. 이는 1945년 조국 광복 이후 선생이 주도하여 발족한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畫同硏會)의 창립 강령에서 ‘서예’의 명칭을 선생이 제창하였다. 이는 ‘서예’가 의식과 감성을 담아내는 문자 예술인 사실에서 중국의 서법과 일본의 서도를 모두 아우르는 명칭이 ‘서예’(書藝)로 통용되고 있는 사실에서 선생의 깊은 의식을 일깨우게 한다.

 

 
 이와 같은 소전 손재형 선생의 더욱 깊은 민족의식은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역작 세한도(歲寒圖)의 목숨을 건 귀환의 일화에서 더욱 분명하게 살펴진다. 선생은 세한도 작품이 당시 서울대학 전신 경성제국대학교수였던 후지츠카 치카시 교수가 소장하다가 일본으로 가져간 사실을 확인하고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연일 미국의 공습이 일본의 심장 도쿄를 두드려대던 1944년 일본 도쿄에 건너갔다. 당시 무려 두 달 동안 매일 후지츠카 교수를 찾아가 '세한도'의 양도를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목숨을 건 요청에 후지츠카 교수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작품을 양도하겠다며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전쟁 중인 나라에 작품을 남겨두고 돌아갈 수 없다며 다시 한 달여 동안 매일 교수의 집을 찾았다. 이에 후지츠카 교수는 나보다도 이 작품을 더 아끼는 사람인 당신 나라의 작품이니 가져가라며 세한도 작품을 내주었다. 이와 같은 목숨을 걸고 찾아온 세한도는 오늘날 나라를 대표하는 예술품으로 사랑받고 있다.
 소전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공자와 석가모니, 예수가 그렇듯이 제자없는 성인 스승은 없다.
 현대 서예계에 우죽 양진니 만큼 뛰어난 대가가 눈에 띄지 않는다. 우죽선생은 서예계 거목인 손재형과 변석정, 일본인 이노우에 가토에게 지도를 받았다. 초ㆍ중등 교사를 거쳐 부산교육대학과 서울한성대학 강사로 일할 때도 지필묵을 놓지 않았다.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서예에 정진한 결과 1974년 대한민국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전직 장관들과 대학 총장, 국회의원 등 유명 인사들이 그를 찾아와 글씨를 배웠을 정도로 명필이다. 중국의 陳廷祐는 그의 저서에서 “書의 가장 기본적인 형체는 線의 美이고 모든 藝術 중에서도 가장 高等한 美이다.“ 라고 하였다.
 중국의 고승 한 분은 영은사에 沙孟海가 쓴 ‘大雄寶殿‘ 현판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동강 조수호 선생. 우죽 양진니 선생.  초정 권창륜 선생. 예술의전당 서예관의 이동국 큐레이터는 “여초는 소전 손재형(1903~81), 검여 유희강(1911~76), 일중 김충현 (1921~2006) 선생과 함께 근현대 서예사의 4대가로 꼽히는 인물”이라며 “소전은 전서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서법을 열었고 일중은 정통서법에 강했다. 여초의 경우는 이 두 분이 하지 못했던 금석기가 두드러지는 육조해서를 토대로 독자적인 서법을 만들어냈다. 한글과 한문을 두루 잘 썼고 전각에도 뛰어난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평가했다.
 우죽 양진니 서예가는 존추실을 열었던 소전에게서 배우고 진도 출신 고산(高山)에게 서와 시를 전했다.

진도소전미술관 소전선생 동상

 

 소전 손재형 선생<주요 약력>
 1903년 전남 진도군 교동리 향저 출생/ 1907년 조부 玉田 손병익 슬하에서 한학과 서법을 익힘/ 1920년 양정의숙(양정 중ㆍ고등학교전신)에 입학/ 1924년 제3회 조선 미술전람회 隸書<顔氏家訓>입선 이후, 8회(1931년) 연속 입선/ 1930년 제9회 조선 미술전람회 隸書<화류휘>특선 및 篆書<集句>입선/ 1932년 제1회 조선 서도전 특선.
 中國 金石學者 羅桭玉先生 師事/ 조선서화협회전 심사위원장 역임/ 1947년 재단법인 진도중학교 설립.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 및 교수 역임/ 1958년 제4대 민의원 의원 당선(1959년 민의원 분과위원장 역임/ 1960년 예술원 추천회원 역임(1960~1966)/ 1961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작품상 수상/ 1965년 제4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위원 역임.
 1968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 1970년 제19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장 역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여/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당선/ 1977년 회고전(동아일보사 주최)/ 1981년 6월 15일 별세.(도행 박남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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