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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칼럼 / 역사속으로 사라진 남천교와 ‘은파유필’
남인칼럼 / 역사속으로 사라진 남천교와 ‘은파유필’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11.1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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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이 옛것을 덮는 일이 당연시되는 세상이다.

  “진도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다리 중에 가장 오래된 다리는 1870년 쯤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 단운교로 쌍운교(1930년 준공된 것으로 추정)와 함께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1930년 십일시에 놓은 십일시교로 1937년 세운 준공비가 있다. 이 십일시교는 도로 확장으로 본래 위치에서 조금 옮겨져 현재까지 이용되고 있다. 진도읍에도 상당히 오래된 다리가 있는데 준공년도는 1966년으로 쓰여진 남천교이다.”(박수홍 진도문화원 학고도서관 전문위원)
 이어 이 남천교가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전라도진도부읍지』(1871년) 교량조에 ‘南川橋 : 在府南二里’로 ‘남천교는 부남2리에 있다’는 내용이다. 대략적인 위치로 보아 현재 진도읍에 있는 남천교와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천교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在南二里’라고 적혀있다. 남천교는 그 위치상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도 진도읍에서 진도 남부로 가는 중요한 육로였을 것이다. 이런 중요 통로가 기록에 없다고 해서 실제로도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알렸다.
 『은파유필恩波濡筆』은 1988년 진도문화원(원장 조담환)에서 국역본을 발간하였다. 원본은 박병훈 전 문화원장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문화원에 제공하였다. 1993년에 진도군향토사자료 제2집에 원문을 영인 발간하였다. 민속이나 국악 연구자들은 물론 한시나 유배인, 진도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최근 진도문화원에서 재발간 논의가 이루어졌다. 귀중한 자료가 한정판 발간되어 추가 수요가 꾸준히 있었다. 번역자는 “원본 열람을 하게 해주어 영인본에서 읽을 수 없었던 여러 곳을 알 수 있었다. 지명이나 인명 고증도 도움이 되었다.”면서 현장 고증에 도움을 주며 격려해준 박정석 전 원장,박주언 진도문화원장, 자문을 해준 박병익선생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이들은 역사에 대한 두려움과 은파유필 저자의 해배 뒤의 친일 문제에 고민했다. 여전히 친일 청산은 시대의 화두로 남은 때문이다. 같은 동문이었던 매천 황현과 분명하게 대조적인 길을 걸었던 것으로 아무리 변려문이 뛰어나도 무정 정만조는 진도로서는 아직도 ‘계륵’이다. 그가 은파유필로 1907년 진도 유배 12년을 뒤로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섰다. 그의 언행은 여전히 “친일”의 굴레에 갇혀있다. 이번 <은파유필> 번역편은 진도 유배기 1896년~1899년, 19세기 끝자락의 문화활동에 대한 탐구이다. 남천교는 당연히 그 책에 진도민속문화시로 담겨있다. 한국 대금국수 박종기씨의 아버지 박덕인 옹의 뛰어난 춤과 대금 북 등 민속예술능력에 감탄한 시가 실려있기도 하다.
 “觀場萬人集”라는 시를 소개한다.
  16일 밤에 다시 남천교를 밟으러 가서 줄다리기를 구경하다
  十六夜 復作踏橋行 觀索戱
  멋진 벗님네 만나지 못했다면 不因逢勝友  불인봉승우
  좋은 이 밤을 어떻게 꾸몄을까 何以餙良霄  하이희양소
  달빛 아래의 길은 세 갈래이니 月下三分逕  월하삼분경
  강남의 가장 훌륭한 다리라네 江南第一橋  강남제일교
  찬 새벽은 술기운을 시기하고 曉寒猜酒力  효한시주력
  봄뜻은 매화 가지를 사랑한다 春意寵梅條  춘의총매조
  구경하려 많은 사람들 모였는데 觀場萬人集  관장만인집
  불러 초대하지도 않았다네 不待費招邀  부대비초요.
 작자는 42세 정월 보름에 네 사람과 함께 남천교에서 달밤 놀이를 한 것을 본 듯하다. 이 책에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있은 줄다리기를 구경한 것도 적었다. 125년 전 당시 진도 지역 놀이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진도 사람들은 정월 16일 밤에 줄다리기를 하였는데, 구경꾼들이 많이 모였다.” 작자는 이러한 부분을 특히 흥미롭게 말하였다. (역해 은파유필, 332쪽)
 *남천교南川橋 : 진도군 진도읍 쌍정리 257-10 일원의 남천南川에 있는 다리이다. 남천교는 진도읍과 의신면 등 남부 지역을 통행하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1872년 진도부지도에 진도읍성 남문 밖에 남천교가 보인다. 지금도 남천교라 부른다. 사라진 다리는 1966년 6월에 만든 것이다.
 이 남천교가 최근 남동리 욕실천 정비와 함께 새롭게 놓여졌다. 주변으로 주거지와 상권이 들어서 진도읍의 경제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아쉬움은 남는다. 기왕이면 더 고풍스럽게 복원했으면 더더욱 진도읍의 명소로 자리잡지 않았을까 한다.
 법고(法古)를 제대로 알고 창신해야 인류의 역사는 반듯하게 흐르게 된다. 늦었지만 남천교와 얽힌 유래라도 다리 옆에 새겨놓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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