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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삼별초 항전에 대한 오해들
진도 삼별초 항전에 대한 오해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11.2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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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관련 글들을 읽다가 궁금한 부분이 있다. 사실 별거는 아니지만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분명 짚어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1. 배중손은 남도석성에서 최후를 치렀는가?

남도석성은 지금 보면 그럴 듯하지만 사실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조선 세종때 일이다. 왜구 토벌을 위해 축조한 것이지 배중손이 한가하게 성을 지을 시간이 없었다.

굴포에 그의 사당이 있는 점은 그가 그곳에서 전사했을 것이란 추측을 해 볼 뿐이다. 그가 어디에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적 자료가 있으면 좋겠으나 아직 발견된 것은 없다. 그러니 남도석성과 삼별초 배중손을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하지 않나 한다.

2. 김통정은 금갑진을 통해 제주로 도피하였나?

당시 금갑진이 큰 포구이긴 했으나 김통정이 돈지벌에서 전투 패배후 금갑진까지 도주할 여력이 없었을 것 같다. 어디선가 의신포를 통해 제주로 퇴각했다는 글을 읽은 듯한데 찾질 못하고 있다.

의신포라면 지금의 연주리, 도목리 사이에 있는 포구다. 아무래도 급창둠벙 근처라면 의신포가 아닐까한다. 금갑진, 금갑산성과 섞여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재고하면 좋겠다.

3. 궁녀둠벙이라고 미화하는 것에 대해서

어린 시절 멱감던 그 곳을 누구도 궁녀둠벙이라 부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급창둠벙을 우린 끕장둠벙이라 부르며 놀았고 그위에 더 깊고 무서운 물이 내려다 보이는 각시둠벙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거기가 바닷가의 여울목이 이었으니 더 깊고 소용돌이가 빨랐을 것이다.

궁녀둠벙이라고 마치 의자왕때 삼천궁녀를 연상시키게 하는 것은 과대 포장아닐까? 돈지 벌판에서 떼죽임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전투도 못하는 부속 인원(여기 급창)들이 물에 뛰어든 곳이라고 사실적으로 표시해야 지 않을까?

그리고, 성역화 하려거든 좀더 예산을 들여서 근처 논 몇마지기 일부 매입해서 제대로 시퍼런 물이 살아나도록 복원을 하고 홍보를 했으면 좋겠다. 군 예산 1, 2억이면 되지 않을까?

4. 떼무덤

삼별초가 전멸을 모면한 대전투자리는 현재 어디에도 표석하나 없다. 농지개량사업하다가 발견되었던 그 흔적들이 다 사라져버렸지만 전투의 상상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의신중학교앞 벌판에서 치러졌던 그 전투를 굳이 많은 예산을 들이지 말고 의신중학교 교정내에 설치하여 교육장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5. 왜 하필 진도를 택했나?

바닷속의 육지라 먹을것이 충분한 지역이라서 그랬다는 설이 있으나 당시 진도의 곡식상태는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척박한 땅에 부랑아들이 많았다고 본다. 간척이 되지 않았던 당시의 진도는 '얼멍치' 혹은 바구니 섬이라 하여 산 아니면 바다였던 까닭에 그리 양식이 충분하지 않았다. 다만 영호남의 조운들이 거쳐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음에는 틀림없다.

최씨 무신정권 막바지에 최 모라는 양반이 용장사에 기거하면서 이쪽 일대를 주름잡아 본 경험이 있었다는 고려사 기록이 아마도 정답이 아닐까한다. 배중손의 고향이었다는 세간의 추측도 누군가 역사적 자료를 제시하는 노력을 했으면 한다.

수정해 본 항전 지도.

아래 그림(간척사업을 해서 육지가 된 곳을 다시 원래대로 복원가정하다보니 현재와 다른 지도가 되었다)에서 보듯, 진도 삼별초 유적은 용장리와 의신면 사천리, 돈지리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배중손 사당이 있는 굴포 정도. 왕온 무덤, 떼무덤, 급창둠벙을 하나로 찬찬히 설명할 수 있는 해설관을 중학교 교내에 유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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