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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인의 진도문화 순례/2020 ‘미술관에서 길을 묻다’
박남인의 진도문화 순례/2020 ‘미술관에서 길을 묻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12.1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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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관내 사립미술관 기획전 열려

가을은 아침부터 눈이 부시다.

나이 든 눈부신 여인의 시를 읽는다.

아무에게도 버림받지 않았지만

마침내 문 밖에서 피었다는 이유만으로

야생붓꽃이라 불리는 꽃

날카로운 가시로 보호받는 여류시인

루이스 글릭의 시를 처음 보았다

시가 없는 가을은

아이리스의 전설을 내려주는 무지개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숲속의 그 많은 속삭임들도 산짐승들이

갉아먹은 것일까

분명 가을은 아침부터 눈부시다

아내가 길게 잠을 자거나

어떤 올가미에 걸린 듯 잠꼬대를 해도

나는 그 여인의 시를 읽을 것이다

내게서 다 빠져나간

야생이라는 언어가 다섯 손가락을 펴고

손마디 마다 자줏빛으로 물들일 때

나는 다시 섬으로 태어난다

그렇게 그녀는 순식간에 눈부시다

바람 따위는 제 색을 잃은 꽃잎

고르기를 지시하고

나는 낮은 향기를 줍는다

감나무 가지마다 황홀하게 감긴

가을 햇살과 그녀의 머리칼을 헤아린다

다시 사랑에 쓰러진다 해도

시가 있는 가을 아침을 즐기리라.(박남인)

사람은 숲에 산다. 그 많은 잎사귀에 물드는 빛깔들은 해가 내려준다. 생성과 생육은 나무와 그 아래 벗들이다. 이를 보고 분류하고 더 나누어 이름까지 지음(知音)하며 그림자 이상의 간섭을 하는 어떤 존재가 사람이다. 사람도 외로울수록 숲을 이루고 산다. 모두가 화려함에 치열하다.

진도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으로 다가오고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천년 유배의 땅. 쌍무지개 다리가 걸쳐 있어도 여전히 섬으로만 뇌새김이 되어버린 외진 끝자락 섬. 동백꽃과 홍주와 세방낙조 노을이 제각각 아리랑을 부르는 곳.

화폭에 붓꽃이 핀다. 야생창포 빛깔이다. 예향진도를 지키는 것은 이제 우리와 함께 한 청정한 자연과 미술관이다.

숨을수록 그 향이 넘차는 곳들. 상상력이 바람으로 들판을 달려오는 곳. 옥주골 사립미술관인 진도현대미술관(박주생), 나절로미술관(이상은), 솔마루미술관(박용선)이 지난 11월 10일부터 12월 11일까지 전국 유명화가 50여명들을 초청, 대규모 순회전시회를 갖는 중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별을 타고 한 세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림도 이 시대속에서 남기는 2020년의 시대를 동반한 그림을 대중들에게 선보임으로써 전 세대와 지금 세대의 변해가는 그림 세계의 비교가 미래지향적인 작품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박주생. 이상은 박용선 관장 초대글 중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언제든지 예술과 특히 미술이라는 장르가 보통이 넘는 싸움으로 어떻게 시대와 끊임없이 소통의 창을 열고 있는지 이제는 내 안에 닫힌 또 하나의 두꺼운 창을 깨는 눈물같은 시선이 필요하다.

진도(珍島)의 미술관들은 산야와 역사 굴곡을 통한 내부공간의 다양한 재분할과 조명이 갖가지 작품 위치와 배치를 결정하는 오늘 주거시대와 겹친다. 통로와 일이관지 일관은 사람과 예술을 지극히 단순화시킨다. 작품이 생동하기 위해서는 작가나 그것을 선택한 붓꽃같은 미술관장들의 탁월한 안목과 그 눈에 흐르는, 때로 흐느끼는 강물의 꺾임과 굽이을 지극히 살피는 삶이 함께 있을 때 그 작품들은 싹을 틔거나 달빛으로 젖거나 한 시대마저 훌쩍 뛰어넘는다.

그 어느 해 가을 구월의 밤은 유난히 밝았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달이 몸을 씻었다. 명량바다는 강물이었다. 차라리 푸른 수평으로 벽파에서 녹진까지 우수영 기슭까지 고요의 바다였다. 달은 분화구마다 노래를 품었지만 아무런 속삭임도 없었다.

우리가 간절한 것은 무엇인가. 더 슬펐지만 더 아름답고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사람이 많고 작품이 더 풍성한 이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사람 그 한 사람의 진정성과 그 무게가 항성보다 더 밝고 무거우면서 나를 이끄는 중력을 기대한다.

요즘 내가 보는 21세기의 전통수묵화는 그러나 국가 중요 연찬장 뒤 붙박이로 다가온다. 거기까지는 자리매김에 아직 쓸모가 있다. 시는 아예 비치지도 않는다. 벽지가 되어버린 그림장식은 매우 한정되지만 그 영향은 크다. 그림과 시는 속울림이 깊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는 그 중심에서 자꾸 밀려나는 또 다른 ‘풍경’을 지울 수가 없다.

전시회를 요즘에는 자주 가지 않는다. 기회도 없다. ‘전시’에다 회전은 시대의 옷맞춤 형식의 기획과 옷걸이가 느닷없이 죄없는 ‘이발관으로 간 그림’으로 걸리는 경험들은 내게 오히려 큰 자양분이었다. 눈도 크게 아프지 않게 트였다.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무엇이 보였다. 알프스보다는 ‘흐르는 강물처럼’의 형제와 죽은 사회의 시인 때문에 현재를 주절거렸다.

단원(檀園)을 만난 것은 너무 늦었다. 이덕무는 더 늦었다. 허 소치(小癡)는 스승인, 늘 가깝고 먼 천축고선생 완당(阮堂))과 자신의 부담스런 시대적 영예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여전히 운림산방은 향기를 맑고 간결하게 자리하고 있다. 단원은 도화서를 나오면 제 집에서 옷깃을 훌훌 벗어 제꼈다. 하나 소치는 더 여미었다. 한승원작가는 86세의 허련을 ‘연운공양’ 덕이라 했다. 자운 곽의진 작가가 차향을 따라 치열한 사랑추적이나 다름없던 ‘꿈이로다 화연일세’ 대하소설에서 밝힌 공양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부채를 좋아한다. 선풍기보다 에어컨보다 내 손에 맞는 그 만큼의 마당, 세상 그림이나 꽃을 흔드는 그 멋을 누가 알겠는가. 부채는 펼쳐서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남도의 화가들이 이를 특히 행사장에서 개인 소장품이나 되는 듯 가름하는 것도 큰 모순이다. 전남도 등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지만 그 행사가 체험이 아닌 보여주기식으로 흐르면 이 분들을 대용 장인인지 행사용인지 자기역할에 물어야 할 지도 모른다. AI가 곧 대체할 것이란 짐작이 갈수록 선명해진다. 부채와 족자는 접히고 말려 서랍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세태의 변화는 신선부나 몽유의 이상향을 담은 전통 병풍이 사랑방에서 안방에서 순식간에 밀려나 제사상 뒤쪽으로 겨우 방풍림으로 자리잡은 것은 오래다. 한국 남종화 수묵화도 애완견 반려동물처럼 자꾸 작아진다. 자기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배첩장들도 갈 곳이 없어진다. 그래도 진도를 걷다보면 그림은 살아있다. 어디에선가 루이스 글릭의 ‘야생붓꽃’처럼.

이 무정한 세상 그림들과 화가들을 전국에서 불러들이는 기획전을 마련한 박주생, 이상은, 박용선 관장의 노고는 진도를 온통 살아있는 미술관으로 변모하는 수고로움으로 예향의 향기를 더하고 있다. 행사는 갖지 않았지만 소문과 향기는 이미 미술관을 넘친다.

 

이번 예향골 전시회 작품은 전체적으로 규격을 정하여 시각을 잘 맞추었으며 최근 변화되는 집안을 장식하는데 적절하면서도 새김보다 벗을 얻는 어렵지않게 공감하는 작품들을 선한 정양 박주생 진도현대미술관장의 기획감성이 돋보인다는 평이다. 예술은 영성의 강물보다 반려의 길을 선택한다. 액자 속에 갇혀버린 또 다른 소리없는 세계들이 또 다른 유리벽을 만든다.

미술관과 도서관은 이제 문이 없어야 한다. 하여 우리는 이 우울한 ‘거리두기’ 시대에서 미술관에서 다시 길을 묻는다. 묻는 다는 것은 곧 답을 가장 가까이 불러오는 주문을 포함되고 있을 것이다. 모든 그림은 또는 시는 그 물음들로 가득하고 예지롭다. 서정은 서정이 아니다. 눈도 눈이 아니다. 소나무도 소나무가 아니다. 물소리도 물소리가 아니다. 나를 떠나서도 사무친다. 객관화는 그렇게 고통스럽다. 내가 ‘나는 아니다’라는 선언은 또 다른 코뚫림이요 깨달음이 분명하다. 나는 화가들에게 늘 존경을 보낸다. 예를 바친다. 그만큼 정성스레 고뇌하는 나의 보살, 예수 부처나 다름없는 각성자들에게 부탁도 담는다.

‘그리다’는 또는 ‘쓰고 읽다’라는 곳엔 자성(自性)을 그리고 무엇보다 지성을, 자연을 통관하는 의례와 본질적인 문제로 다시 귀결되는 그 깊은 자성의 윤회가 시간과 공감을 얻는다고 본다. 시와 그림이 대중에게 헌신하거나 자기안족으로 갈 때 강은 흐르지 않는다.

이번 기획전에는 임농 하철경 전 한국예총회장의 ‘섬진강 소견’, 김영삼의 ‘매화’, 곽창주의 ‘퇴근길’, 김학곤의 ‘소나무 향기’, 박문수의 ‘심상’ 등이 초대되었다. 정경춘, 조영석 화가도 초대받아 선을 보였다. 박주생 관장의 발품이 아무도 걷지 않은 새벽 ‘야중답설’의 노고 덕분일 것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다양하고 깊으면서 때로 간결하고 색에 취하지 않은 화면들이 저마다의 숨결을 내보인다. 함께 한다는 것은 기쁘고 힘들다. 시대를 같이 살면서도 이제 ‘거리’는 깊이를 지배하며 감동마저 제어시키는 오늘날에 ‘길을 묻는 미술관’으로의 산책은 또 다른 독서다. 진도에 있는 미술관의 그림은 하나 하나 행성이다. 붓의 꽃처럼, 꽃게들의 서식지를 만드는 모래개울을 담는 바다강의 스펙트럼이 울렁거린다. 이게 시다.

‘총과 균 쇠’를 꽃과 시로 바꾸고 싶었다. 스무살 고개를 넘을 때 바꾸지 않는 방이 하나 있었으면, ‘물염’은 아니었다해도 나 또한 한 시대의 절벽을 아스라이 살고 싶었다. 자미탄과 환벽에서도 소쇄원의 대나무바람 아래에서도 제대로 등허리에 기쁘게 새긴 죽비소리와 세한(歲寒)의 간결한 삶을 흔들지도 못했다. 늘 그림은 의재선생 춘설헌 아레에서 그늘거렸다. 배고픈다리 위에서 나는 제대로 바고픔을 알지 못했다.

지원동에서 화순 너릿재로 옮겨 살 때 나의 어머니는 진도 사천리에서 바닷게 젓갈을 갈아 담은 소주 병을 머리에 얹고 노루가 누워 자고 있는 그 산길, 산지기집만 사는 골짜기로 걸오오시면서 한 번도 눈물지지 읺으셨다. 또 한 손에는 동네 절에서 받아온 공양초 보따리를 들고 오시면서도 왜 마음이 가벼운지 오히려 풀이 먼저 누워버린 부드러운 산길 나를 재촉하셨다. 어머니가 진도로 가신 뒤로 얼마 안 되어 눈이 내렸다. 산지기따님이 동치미를 들고 소설책을 빌려달라고 찾아왔다.

나의 스무살은 왜 그렇게 밤길을 좋아헸는가. 에둘리기만 했던 무등산, 충장사 길 지나 뚝 떨어지던 숲길 아래 풍암정에서는 너무 맑고 찬 냇물의 새우등에 참송이 크게 보아주었다. 한 선배가 김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팔십년의 총을 맞지 않았다. 침묵이 그림과 시가 되는 시절들이었다. 여기에서는 줄인다.

나는 날마다 나의 날을 무엇을 그리듯 쓴다. 나는 그렇게 나의 삶이 그림이며 또 쪽빛물감이라고 서둘러 자족하였다. 아직은 휘젖는 일이 게을러졌다. 남색이 잘 나오지 않는다. 이 가을의 끝자락 옥주골, 소리가 있는 역사의 능선 위에 서 있는 진도현대미술관(읍 솔개재)와 여귀산의 신령함이 깃든 상만 나절로미술관(관장 이상은) 그리고 군내면 옛 가흥골에 자리잡은 솔마루미술관에서 ‘2020미술관에서 길을 묻는다’ 전시회를 알린다.

미리 언덕을 넘어가 전시작품들을 보았다. 시집 한 권을 읽은 듯하다. 안쪽에 더 넓게 자리한 반닫이들이 사임당처럼 위엄을 부린다. 그 옆의 작은 석상들은 자꾸만 표정이 얽혀진다. 동자석도 문무대신의 호위상도 아닌 듯하다. 유리벽에 갇힌 분청사기가 호기롭다. 진도현데미술관 1층에는 정양 화백의 그림이 즐비하다. 이곳이 문화원이었던 시절이 안게처럼 스쳐간다. 이 ‘검은 고독’의 우산들은 또 다른 시대예감이다. 함께 한 아내는 이 많은 사람의 군상 중에서도 군소리같이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 울림은 분명 바깥을 향하고 있음을 나는 확인했다. 그래도 내겐 아픔이다. 무상과 상망이 겹친다.

모든 그림은 행성이며 노래다. 그 안에 사람이 있다. 야생의 흔들림이 있다. 수평을 잡는 일은 고독하다. 마침내 평화다. 진도의 피울음이 흐르는 명량(鳴梁)과 고흐가 걸었던 ‘아를르의 강’은 그렇게 불타고 있다.(박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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