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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인의 진도문화 순례 /2020 미술관에서 길을 묻다
박남인의 진도문화 순례 /2020 미술관에서 길을 묻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0.12.2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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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숲에 산다. 그 많은 잎사귀에 물드는 빛깔들은 해가 내려준다. 생성과 생육은 나무와 그 아래 벗들이다. 이를 보고 분류하고 더 나누어 이름까지 지음하며 그림자 이상의 간섭을 하는 어떤 존재가 사람이다. 사람도 숲을 이루고 산다. 모두가 치열하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언제든지 예술과 특히 미술이라는 장르가 보통이 넘는 싸움으로 어떻게 시대와 끊임없이 소통의 창을 열고 있는지 이제는 내 안에 닫힌 또 하나의 두꺼운 창을 깨는 눈물같은 시선이 필요하다.
 진도(珍島)의 미술관들은 산야와 역사 굴곡을 통한 내부공간의 다양한 재분할과 조명이 갖가지 작품 위치와 배치를 결정하는 오늘 주거시대와 겹친다. 통로와 일관은 사람과 예술을 지극히 단순화시킨다. 작품이 생동하기 위해서는 작가나 그것을 선택한 미술관장들의 탁월한 안목과 그 눈에 흐르는, 때로 흐느끼는 강물의 꺾임과 굽이을 지극히 살피는 삶이 함께 있을 때 그 작품들은 싹을 틔거나 달빛으로 젖거나 한 시대마저 훌쩍 뛰어넘는다.
 우리가 이 시대에 간절한 것은 무엇인가. 선명해질수록 더 슬펐지만 더 아름답고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사람이 많고 작품이 더 풍성한 이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사람 그 한 사람의 진정성과 그 무게가 항성보다 더 밝고 무거우면서 나를 이끄는 중력을 기대한다.
 요즘 우리에게 보이는 전통수묵화는 여러 매체에서 비쳐주는 국가 중요 연찬장 뒤로 붙박이로 다가온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시선을 끌고 나름 쓸모가 있다. 시는 아예 비치지도 않는다. 장식은 매우 한정되지만 그 영향은 크다. 그림과 시는 속울림이 깊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는 그 중심에서 자꾸 밀려나는 또 다른 ‘풍경’을 지울 수가 없다.
 벗들은 말한다. 토로한다. “절대 자식들에 그림공부를 시키지 말라”고 한다. 이 간곡한 말은 ‘농경적 사유’에서 공학적 다차원으로 옮겨간 예술의 방향에 그 위상에 거의 절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천년의 화가’ 김홍도의 그림의 ㅅ;퍼런 풍자를 가슴에 품는다.
 나는 지금도 부채를 좋아한다. 선풍기보다 에어컨보다 내 손에 맞는 세상 그림이나 꽃을 흔드는 그 제멋대로 멋을 누가 알겠는가. 부채는 펼쳐서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풍과 유는 시대의 큰 길이다. 남도의 화가들이 이를 특히 행사장에서 개인 소장품이나 되는 듯 가름하는 것도 큰 모순이다. 전남도 등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지만 그 행사가 체험이 아닌 보여주기식으로 흐르면 이 분들을 대용 장인역할인지 행사용인지 자기역할에 물어야 할 지도 모른다.
 세태의 변화는 전통 병풍이 사랑방에서 밀려나 제사상 뒤쪽으로 겨우 방풍림으로 자리잡은 것은 오래다. 한국 남종화 수묵화도 애완견 반려동물처럼 자꾸 작아진다. 배첩장들도 갈 곳이 없어진다. 그래도 그림은 살아있다. 어디에선가 루이스 글릭의 ‘야생붓꽃’처럼.
 여러 곳에서 시행되고 있지만 미술관과 도서관은 이제 벽이 되는 문이 없어야 한다. 하여 우리는 이 우울한 ‘거리두기’ 시대에서 미술관에서 다시 길을 묻는다.
 ‘그리다’ 또는 ‘쓰고 읽다’라는 곳엔 자성(自性)을 그리고 무엇보다 지성을, 자연을 통관하는 의례와 본질적인 문제로 다시 귀결되는 그 깊은 자성의 윤회가 시간과 공감을 얻는다고 본다. 시와 그림이 대중에게 헌신하거나 자기안족으로 갈 때 강은 흐르지 않는다.
 우리시대의 미술작품들은 다양하면서 깊고 때로 간결하여 색에 취하지 않은 화면들이 저마다의 숨결을 내보일 때 삶과 사람을 만난다. 함께 한다는 것은 기쁘고 힘들다. 시대를 같이 살면서도 이제 ‘거리’는 깊이를 지배하며 감동마저 제어시키는 오늘에 ‘길을 묻는 미술관’으로의 산책은 또 다른 독서다. 진도에 있는  미술관의 그림은 하나 하나가 궤도를 갖는 행성이다. 붓꽃처럼, 꽃게들의 서식지를 만드는 모래개울을 담는 바다강의 스펙트럼이 울렁거린다. 이게 시다.

위 그림과 관련 한국남종화의 본산 운림산방 주인이었던 소치 허련 소치 선생의 글을 잠시 읽어보자.

“능호거사는 나와 동갑이며 종제이다. 사람들은 그 평생의 행적을 알지 못하나 나는 알고 있다. 그가 나이가 어렸을 때는 하루도 쉬지 않고 나라의 명승지를 다 둘러보았다. 즉 태백산, 금강산, 오대산 지리산과 같은 전역을 답사했다. 그 나머지 사찰과 각 고을의 유명한 곳도 다 본 것을 일일이 기록할 수 없다.

이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 다시 고향에 돌아와 새로 부인을 얻어 3명의 자식을 얻었으니 잘한 일이다. 하지만 근년에는 부인이 죽고 재산을 모두 탕진하여 옛날처럼 다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온 천지를 집으로 생각하였다.

몇 년 전에 죽은 아이 미산에게 부탁하여 자기(능호거사)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밝은 눈에 뺨이 갸름하고 완연히 산 사람과 똑 같아 그의 전모를 얻었다. 죽은 아들의 손이 지나친 그 흔적을 차마 버릴 수 없고 완연해서 지금도 보는 듯하다.”라 했다.

또한 종제의 평생을 대략 기록해 찬하여 말하기를, “그의 용모는 온화하고 수염과 눈썹은 명랑하고 술을 좋아하는 성품을 이루었다. 말은 좋아하되 행동은 함부로 하지 않고 사는 곳도 없고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이럼에도 기쁨만 보고 슬픔을 보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 때가 을해중춘(乙亥仲春) 六十八歲 從兄 小癡書로 비단에 수묵채색(85.37) 1875년이었다.

아들에 대한 지극한 아비의 사랑이 온통 묻어나는 글이다. 요즘말로 ‘팔불출(八不出) 듣기에 딱 맞는 정황이다. 종제라함은 4촌간을 일컫는다. 능호라는 호도 그렇지만 초상화의 풍모는 분명 시골 사람이 아니다. 얼굴은 붉고 볼의 살이 두툼하다. 농사짓는 사람보다는 풍류거사인 듯하다. 하기사 ’천하의 명소를 두루 답사하며 살았다‘하니 당시로서 집안이 윤택했음을 알게 한다. 진도에서 양천 허씨는 홍주와 인연이 깊다. 능호거사는 이미 지초홍주를 몇 잔 들었을지 않았을까?

그 진영(眞影)이 100년을 훌쩍 뛰어넘어 다시 진도로 돌아았다. 그림을 그린지 145년만이다. 현재 진도읍 교동리 진도현대미술관(관장 박주생)이 소장하고 있다. 보존상태도 매우 좋다. 19세기 중후반 진도인의 표상을 본격적으로 그린 최초의 작품일 것이다. 전신상으로서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와는 달리 신체의 비율이 장대하기 보다는 부친이 덧붙일 화제(畫題)의 공간을 미리 배려한 아들의 구도로 읽혀진다. 제주에는 허 은의 또 다른 제주사람 초상화(귤수소조) 작품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전남도가 예도(藝道)를 자처한다면 농허거사도에 그만한 배려와 보존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날마다 내 하루를 그리듯 쓴다. 나는 그렇게 나의 삶이 그림이며 또 물감이라고 자족한다. 아직은 휘젖는 일이 게을러졌다. 쪽빛이라는 남색이 잘 나오지 않는다. 이 가을의 끝자락 옥주골, 소리가 있는 역사의 능선 위에 서 있는 진도현대미술관과 여귀산의 신령함이 깃든 상만 나절로미술관 그리고 군내면 옛 가흥골에 자리잡은 솔마루미술관에서 ‘2020미술관에서 길을 묻는다’ 전시회를 알린다. 모든 그림은 행성이며 노래다. 명량과 아를르의 강은 그렇게 불타고 있다.

 

                                                                                        (대미산 허은의 귤수소조. 제주도 지정 문화재)

이 귤수소조(橘叟小照)라는 제목의 초상화는 허련이 제주도에 사는 문백민이라는 사람을 일찍이 알고 지냈는데, 허련이 3번째 제주에 와 머무는 데 초상화를 부탁하러 숙소에 찾아 온 것이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본관이 남평(南平)이다. 1810년(순조 10)에 나고, 1872년(고종 9)향년 63세로 타계했으며, 자는 공무(公武), 호는 귤수(橘叟)이다. 제주도에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스승 김정희선생을 찾아 아들을 데리고 온 때라, 아들 허은에게 그리라하고 화제는 허련 자신이 썼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허은(許溵)이 그리고 아버지 허련(許鍊)이 화제를 씀-

橘叟小照. 橘叟耽羅人也, 余於十數年前, 三入瀛海而, 知此人異他矣, 今忽來訪, 亦有異他之意, 命家兒米山試寫, 其眞顴影額毛之, 得失姑不論, 寓余繾綣則存矣, 仍以讚曰, 知君居圃, 厚葉欺雪, 有橘千額, 淸香媚秋, 徜徉一涉, 何以辨此, 成趣則幽, 勇退急流. 歲癸亥首春寫於完城之仙橋僑舍 小癡.

귤수는 탐라인이다. 내가 십 수 년 전에 제주바다를 건너 3번 제주에 왔는데, 귤수 문백민은 남달리 알고 지내온 사람인데, 오늘 갑자기 내가 머무는 곳에 찾아 온 것 역시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이다. 내 아들 미산 허은에게 이 어른의 초상을 그리게 하면서 잘되고 못된 것을 따지지 말자 하여, 나는 비단바탕의 여백에 다음과 같이 찬한다. '그대 집울 안의 과원에 두툼한 귤잎 눈 내린 듯하고, 천 그루 귤나무는 맑은 꽃향기 가을 귤을 그려보게 하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게, 귤나무 사이를 노는 것을 그 무엇에 비교하랴. 이런 정취에 깊이 빠져 들까 용기를 내어, 물러나와 급히 가는 세월에 묻히고 마네.' 1863년(철종 15) 이른 봄 완성의 선교 옆 객사에서 소치 허련이 쓰다.

우리가 진도를 대한민국 예향이라고 자부할 때는 선인과 그 유물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앞서야 한다.(박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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