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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인의 시론 / 신문은 없다
박남인의 시론 / 신문은 없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02.2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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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도 지났다. 눈발이 날린다. 온 세상은 정보의 홍수다. 가짜기사도 날마다 날개를 친다. 어쩌면 하느님도 자신의 존재감을 늘 확인하기 위해서 수시로 광고를 해야 하는 시대인 듯하다. 기업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국가 정부나 종교계, 학계 모든 산업분야 예술계에도 정보를 담은 소식 기사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다양한 언론매체에 알리는데 힘을 쏟는다. 여론은 변덕쟁이다.

대통령은 물론 국회, 법원 행정부 지자체는 늘 이런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그 진위와 타당성을 살펴 정책에 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

1백여 년이 넘도록 신문을 제4의 정부라는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잘 알려졌으며 아직도 중앙일간지는 방송매체와 결합하여 더욱 공고히 권위와 이권을 사로잡고 있다.

어린 시절 도시에서는 신문도둑이 많았다. 새벽부터 일반주택 구독자들은 어린 소년들이 배달하는 신문을 보기 위해 대문 앞을 서성거렸다. 신문을 구독하는 집은 지성인이라는 은근한 자부심이 심어주었다. 만평을 그리는 화백들은 인기스타였다. 우리 신문 만평을 담당하고 있는 김철웅씨는 그런 대우나 인기와는 거리가 멀다. 칼럼과 시론을 싣고 있는 전 진도문화원장 김정호(전남문화재위원)도 김중배 동아일보 논설위원, 조선일보 전 김대중 주필과 같은 대우는 기대하지 않지만 내 고향 진도의 항구적인 발전을 위한 간절한 제안들에 이동진 군수를 비롯하여 행정 담당자들이 깊이 숙고하여 일부라도 반영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지역신문은 결코 걸림돌이 아니다. 부조리나 비리가 없으면 도매금으로 욕먹는 지방 사이비 기자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섬 안에서 무작위로 대규모 기업형 축사를 유치하면서 안전과 청정을 부르짖으면 아이들도 웃는다. 지역신문 언론을 효자손으로 활용하는 능력은 진도군정 일선 담당자들의 몫이다. 토목건설 사업자와 손을 잡아 지자체 발주 사업 등에 합리적으로 참여하라는 소리없는 주문은 없으리라 본다.

우리 시대 민중과 서민 지방 거주자, 섬주민 그리고 노동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극심하다. 삼성전자의 노동자들에게조차 노동 기본권이 지켜지지 않는데, 다른 중소기업들 노동자 사정은 또 어떠하겠는가?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정부조차 부동산 바퀴에 짖눌려 서민노동자들을 경시한다. 바이든이나 트럼프보다도 주권자에 대한 의리가 없다. 21대 국회에서 노동자와 가족들이 여당에 압도적 다수를 밀어주었지만 30년을 미뤄온 ILO(국제노동기구) 기본협약도 국회에서 비준되지 않고 있다.

표심만 들먹일 때가 아니라 ‘자본의 힘’보다 ‘단결된 사람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루도 빠짐없이 보여주어야 한다. 사랑도 명예도 없이 청송녹죽 들고 트롯트 가락 주취에서 벗어나 다시 울두목 일자진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들의 진정한 싸움은 오롯하다. 생존이다. 편견이다. 외면이다. 들러리 배려는 인간적 자존심의 가슴을 짓밟는다. 전 세계적으로 정보소통매체는 더 진화한다. 더 다양해진다. 그러나 더 집중해진다. 메이저 언론들은 중앙정부와 국민 사이에 ‘티탄’이라는 괴물로 군림한다.

제퍼슨이 "내가 만약 신문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신문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단 한순간도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라고 역사에 남은 발언을 남겼다. 그도 오늘날의 대통령부터 지방자치제장들은 말로는 언제든지 비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언제나 그 자신은 옳다는 사고에 갇혀 언론 비판이 늘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신문, 특히 지역신문은 호남의 우후죽순 지방신문들과 함께 이 시대에 조선후기까지 팔도를 누비던 부보상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한반도 서남쪽 지방과 농촌지역 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진도군은 최근 여러 차별화된 정책을 통해 인구 3만1천명 대를 회복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직도 5만 군민시대는 요원하고 노령화는 끝없는 상승곡선을 이루고 있다. 종이신문을 구독하고 읽는 분들은 전국적으로 계속 줄어들고 지역신문은 광고수주가 벽에 갇혀 고질적인 생사의 갈림길에서 버티고 있다.

나도 무엇 때문에 이 길을 선택했는지 이제 후회나 실망하여 퇴각할 인생길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촉의 승상으로 오장원에서 최후를 맞은 제갈공명도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SNS 철갑을 두른 인터넷이란 사마의와의 힘겨운 대치도 목각인형처럼 스러져갈 것이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밤 깊이 글을 쓰고 읽는다. 시와 술을 즐기는 강호의 선후배들과 필담을 나눈다. 이 세한에 글은 힘이고 믿음이며 깊은 애정이다. 우리들의 소통은 진도의 미래를 밝히는 아침 햇발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역신문은 ‘더 빨리’보다 더 깊이, 더 넓게 더 멀리 바라보고 나누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 기자가 무슨 벼슬이 되어야 하겠는가. 군정 공직자들도 자신의 업무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알려야 한다. 콜로라 때문에 접근 취재도 힘든 상황에서 늘상 ‘정보공개’ 등 형식적 절차를 요구하는 동안 현안의 절박함과 군민 주민들의 아픔이 분노가 되어 군정을 신뢰하지 않아 지자체장에 대한 의심과 무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전국 농어촌에서 지역신문이 반드시 살아야 한다. 이 작은 공동체부터 언로가 수시로 막히고 좁혀지면 파시즘과 독재의 말발굽이 서민 민중을 짓밟고 먼지를 휘날리며 그 길을 독점할 것이다. 길들여진 꾀꼬리만 노래할 것이다. 그런 봄은 봄이 아닐 것이다.

소설가 김훈은 이미 글을 써 ‘밥벌이’를 하면서 글쓰기와 글 읽기에 지겨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80년대 한국 문화계 정신세계를 휘젓던 진도 출신 김현 평론가는 오히려 ‘행복한 책읽기’를 제목으로 삼았지만 이제 신문은 뉴스 페이퍼라는 용어 탄생 본질로부터 혹성처럼 벗어나 메스콤 세계의 궤도를 벗어나 헤매고 있다.

다산(茶山) 선생은 오래 전 “정부는 백성들의 심·간(心肝)이고, 백성들은 정부의 사체(四體)”라고 하면서 심간과 사체가 합해야 나라다운 국가가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여민동락(與民同樂)은 ’마부정제(馬不停蹄)‘(이동진 군수가 제시한 신축년 행정구호)를 재촉한다 하여 쉬이 이뤄지지 않는다.

뉴스(news)는 동서남북의 머리말을 조합한 용어다. 페이퍼는 종이다. 이제 동서남북 소식을 담은 신문은 옛날 옹기장수나 박물장수보다 더디다. 종이는 접히면 다시 펴기 전에 젖고 글자는 흐려진다. 사람들은 행간을 읽고싶어 한다. 속도와의 전쟁은 끝났다. 구독자는 단지 읽는 자에게서 자기 의견을 분명하게 내놓는 필진의 역할이 요구된다. 열린 지면이 되지 않으면 생계형 낱장 광고나 언론포장지에 담긴 특정 공보물로 전락한다.

이제는 여적과 여운이다. 노자는 그릇의 빈 공간의 효용성에 주목하였다. 지역신문은 비취빛 청자가 아니다. 질박한 그릇이 지역신문이다. 늘 성원과 애정을 아끼지 않고 함께 사는 군민 여러분과 향우 애독자님들, 공공의 정책에 몰두하는 진도 공직자와 진정한 이 땅의 주인 농어민! 소상공인이 앞장서 우리지역 사회의 지속적인 먹거리 레시피를 맛깔스럽게 담아주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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