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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감식 수집가 소전 손재형
천하의 감식 수집가 소전 손재형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03.1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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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와 인왕제색도

 

운기 넘치는 시와 고금의 장락(長樂)을 담은 문인화를 겸비했던 20세기 최고의 서예대가 소전(素田) 손재형 선생. 그분은 서예가이자 당대의 가장 뛰어난 미술품 감식가로 대단한 수집 소장가이기도 했다.

진도는 소용돌이었다. 진도는 해방 이후 첫 군수를 비롯 제헌 국회의원이 애국 운동가들이었다. 정승한씨와 김병회씨가 그 장본인이다. 해방 이후 정치와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늘 진도를 유린하였다. 선택은 괴로움이었다. 예술은 또 다른 이상향이나 다름없었다. 가시밭길은 마찬가지였으나 그 성취감은 남달랐다. 조선 후기 민간 전문 화가의 길을 걸었던 소치 허련과 미산 허형, 의재 허백련, 소전 손재형, 남농 허건 등이 그러하였다.

가슴 뜨거웠던 한 사내의 삶과 그의 애장품을 생각하며 새해 첫 주를 맞았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컬렉터이자 뛰어난 서예가였고 정치에 투신했던 소전 손재형(1903~1981) 얘기다. 지난해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선생의 ‘세한도(歲寒圖)’ 기증 소식을 취재하면서 그에 대해 궁금증이 커졌다.

                                                               20세기 중반 촬영한 소전 손재형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이 걸작의 파란만장한 소장사(史)에서 소전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손재형은 일본으로 건너간 세한도를 되찾아온 주인공이다. 1943년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가 그림을 갖고 일본으로 귀국하자, 이듬해 거금을 들고 도쿄로 갔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도쿄는 밤낮없이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손재형은 병석에 누워 있는 후지쓰카 집을 매일 찾아가 “세한도는 조선 땅에 있어야 한다”고 애원했다. 100여일 만에 후지쓰카 마음이 움직였고 결국 세한도를 내주었다. 그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세한도는 한 줌의 재로 변했을지 모른다. 석 달 뒤 후지쓰카 집에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났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널리 알려진 얘기다. 이후 손재형은 정치에 참여하면서 소장품을 저당 잡히고, 세한도는 개성 출신 사업가 손세기 소유가 된 뒤 아들 손창근 선생에 의해 국민 품에 안겼다. 우리나라 문화재 역사에 길이 남을 경사다. 그런데 목숨 걸고 세한도를 되찾아온 손재형선생은 왜 끝까지 애장품을 지키지 못했을까.

                                                                추사 김정희 '세한도'. 그림: 23.9x70.4cm, 글씨: 23.9x37.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전 손재형선생은 전남 진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재력이 상당했던 할아버지 손병익 슬하에서 한학과 서법의 기본을 익혔다. 양정고보 시절부터 추사 작품에 심취해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추사의 ‘죽로지실(竹爐之室)’을 천원에 낙찰받았다. 당시 경성에서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그가 학생 모자를 쓰고 광화문 비각 앞에 서 있으면 어느새 알아보고 골동 중개인들이 따라나섰을 정도”(월전 장우성 회고록)로 일찍이 수집가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당대 최고 서예가인 성당(惺堂) 김돈희에게 글씨를 배우면서 추사의 서화에 더 몰두하게 된다. 본인 스스로도 글씨체를 갈고닦아 개성적이며 독보적인 소전체를 완성했다.

소전 선생은 당대 남다른, 열정적인 컬렉터였다. 195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추사 100주기 전람회 출품작 중 절반이 그의 소장품이었다. 하지만 국회의원 출마와 낙선을 거치면서 반평생 모은 컬렉션이 흩어지게 된다. 셋째 아들인 손홍 진도고등학교 이사장이 자세한 얘기를 들려줬다. “자유당 시절 무소속으로 민의원에 당선되면서 이미 자금을 많이 썼고 1960년 선거에 또 나서면서 돈이 급박해졌다. 풍랑을 맞아 진도에서만 선거가 열흘 연기되는 바람에 급전이 필요해 세한도를 사채업자에게 저당 잡혔다. 선거만 끝나면 되찾아올 생각이었지만 낙선했다. 갖고 있던 목포의 극장과 서울 효자동 집, 배와 염전까지 내놓고 급한 불을 끈 뒤 찾으러 갔지만 이미 그림은 일곱 사람을 거쳐 새 주인에게 넘어간 뒤였다.”

당시 3천석군을 자랑하던 부유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그는 5살 때부터 할아버지인 옥전(玉田) 손병익(孫秉翼)의 슬하에서 한학과 서법의 기본을 익혔으니 어릴 적부터 서예에 남다른 재질을 가졌다. 독창적 서체를 개발한 업적을 남긴 소전을 가르켜 흔히 “앞으로 1세기 안에 나타나기 힘든 서예가”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1924년(당시 22세)부터 1931년까지 매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제1회 조선서도전에서 특선하는 등 나이 30 전후에 특선을 마치고 곧이어 국내 규모의 심사위원을 맡아 국전이 시작되면서 계속해서 9회나 단 한 번 심사에 참여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홉 차례 심사위원을 지낸 뒤에는 두 차례에 걸쳐 국전 고문을 지냈고 국전 심사위원장 한번, 국전 운영위원장 두 번, 예총회장 두 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54~’81) 등을 지내 그가 활동하던 40년간 선전이나 국전에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때가 없었다는 것은 앞으로 그 기록이 좀처럼 깨지지 않을 것이다.

일본강점기 말기에 이르러서 우리 국어는 말살당하고 민족문화로서 민족 서예는 그 존재성마저 잃게 되었으나 8ㆍ15해방을 맞으면서 소전은 일본에서 통용되는 서도(書道)라는 용어 대신 서예로 할 것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일본에서 통용되는 불쾌한 기억을 씻어 보자는 의미도 있지만, 동양적 서예관에서 서즉화(書卽畵), 화즉서(畵卽書)라는 전통적 의미와 함께 현대의 예술성을 띠고 새로운 서예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민족적 의지의 표징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서예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또한, 그는 1945년 조선 서화 동연회(同硏會)를 창립 선전이 없어진 문화적 공백기를 메웠으며 그것이 국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흔히 소전을 서예가로만 인식하지만, 학남(鶴南), 산정(山亭)같은 제자들은 『선생님이 남긴 80여 점 중에는 선생의 글씨보다 더 높이 평가할 그림이 있다.』라고 화가로서의 소전을 평가한다. 장년기에 들어 소전의 글씨는 더욱 원숙해졌다. 자획과 구성에 무리가 없고 문기가 넘치는 그의 글씨는 보는 이의 저항감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데 특색이 있으며, 여러 차례 중국에 다녀와 중국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확립하여 이른바 소전체라 불리는 서체를 만들어 냈다.

특히 극치를 이룬 것은 1956년 고향인 고군면 벽파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ㆍ한문 혼용비인 이충무공 전첩비문이다. 점, 선, 횡획, 종획 등의 변화무쌍한 조화를 이루며 전체적인 리듬이 금세의 역작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선생의 재질과 노력이 민족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어울려져 결집된 소전 예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대표작으로 진해 해군 충효탑 비문(예서체), 서울 사육신 비문(육체) 등이 꼽힌다. 그 외에도 의암 손병희 선생 묘 비문, 안중근 의사 숭모 비문, 육군사관학교의 화랑대, 불국사 관음전 현판 등이 있으며, 출품작으로는 “애착춘산병” “임지여묵” “곡병일대” “대연” “人言” “行書一對” “筆硏精良人生一樂”등이 있으며, 제4대 민의원 의원과 제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소전선생은 제자를 사랑했다. 그가 길러 낸 제자들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 경암(景岩) 김상필(金相筆),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 평보(平步) 서희환(徐喜煥), 금봉(金峰) 박행보(朴幸甫),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 등 한국 서예의 기둥들이 즐비하다. 근원 구철우는 『우리나라 서예가들 두어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의 제자라고』 말하였다.

늘 해학이 넘쳐흐르고 많은 사람을 웃기면서 사귀는 데는 천재란 평을 받는 소전은 예술에 대한 고집은 대단해서 종종 적을 사는 때가 있었다. 그는 예술가의 기본적인 인간성과 생활 태도를 중시해 『멋과 풍류도 좋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축첩은 삼가자』라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글씨를 대부분 새벽 4시에 일어나 쓰는 정성을 들였으며, 『역시 글씨는 마지막 10%가 신운(神韻)이다』라고 곧장 말하면서 기분 내키지 않는 때면 수없이 썼다가 찢어 버리고 낙관하지 않는 성미였다고 잘 알려졌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세운 그의 집은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던 해 착수했다. 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사랑채를 사들여 옮겨 짓고 옥전장과 문옥루 등은 33년전에 지은 효자동의 그의 집을 옮겨 왔다. 소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이 집을 예술의 정수로 완성하려 하였으나, 16년간이나 계속하고도 완성하지 못한 채 병석에 쓰러지더니「소전체」를 확립한 추사이래의 대가 소전은 1981년 79세의 나이로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뛰어난 美的 感覺으로 創造的 技倆을 발휘한 작품世界

첫째, 궁체, 판본체에 의존해 오던 우리 한글 서예를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조형 한글 書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으며 둘째, 문인화에서도 四君子, 소나무, 포도, 연, 怪石, 글방그림 등 다양한 소재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는데 모두 기운이 생동하고 淸楚澹泊한 작품들로 그 경지와 문기가 높고 탈속하였다. 중국 서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경시하는 풍조 속에서 뛰어난 창의력과 실험정신으로 몇 가지 서체를 한데 모아 새로운 조형을 추구하여 中國 서예의 모방에서 완전히 탈피 창조적이고 개성이 넘쳐나는 놀라운 재기와 멋과 해학이 담긴 수작을 많이 남겨 후학들의 본이 되었다.

소전 아들은 “세한도가 넘어간 뒤 아버지는 골동에 대한 애착을 잃었다.”며 “누가 와서 감정해달라고 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후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같은 명품이 호암미술관으로 흘러간다. 이병철 회장에 이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부부가 30대 나이에 최초로 구입한 미술품이 손재형의 소장품이었다. “정치에 입문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분신처럼 여겼던 세한도도 지켰을 테고.” 다행히 작품은 눈 밝은 주인을 만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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