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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 진도아리랑비 건립 비사
남기고 싶은 이야기 / 진도아리랑비 건립 비사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03.2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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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유일 민요비(民謠碑)-

                                                             박병훈(진도아리랑비건립추진위원장. 사)진도아리랑보존회회장

회장(回章)을 만들다

필자는 지금부터 36년 전인 1985년 진도아리랑보존회를 조직하고 그 다음해인 1986년에는 「진도아리랑가사집」을 발간하면서 『진도아리랑비』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 하면 그때까지만 하여도 학계에서는 진도아리랑을 호남아리랑, 남도아리랑, 또는 전라도아리랑 이라고 해야 하지 왜 하필 진도아리랑이냐? 하는 논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필자는 진도아리랑비 건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1989년 나는 먼저 조담환 문화원장님을 찾아 갔는데 모금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였다.

필자는 그때 진도문화원 부원장이란 직에 있으면서 비 건립 찬조금을 거출하고저 조담환원장을 설득, 조 원장과 함께 회장(모금서. 총5장)을 만들었는데 글씨는 고 해송 곽문환 선생에게 부탁하여 썼다.(사진 참조)

 

회장을 가지고 조원장과 함께 국악인 유지 몇 분을 찾아서 진도아리랑비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반응들은 싸늘하였다.

○그런 돈이 있으면 술사먹겠다!

○아리랑이 무슨 노래냐? 아리랑은 노래가 아니고 잡소리다.

“저기 가는 저 큰애기 업프러저라

일써나 주는 덱끼 보듬아나 보자”

이런 소리가 무슨 노래냐?

○노래는 육재백이나 흥타령이 노래이지 아리랑은 잡소리다 하는 조소와 함께 핀잔들을 주어 결국 혹만 붙이고 뒤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전남향토문화상 상금을 타다.

필자는 1990년 제2회 전남향토문화상(본상)을 타게 되고 일백만원의 상금을 타게 되었다. 필자는 수상장(나주시 시민회관)에서 수상소감을 말 하면서 “이 상금 전액을 진도아리랑비 건립 기금으로 희사 하겠습니다.” 라고 선언하자 많은 참관인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었다.

필자는 이 수상금 전액을 가지고 가서 진도군수(백종철)님에게 드리면서 「진도아리랑비」를 세워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실질적으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때부터 「진도아리랑비」 건립사업이 시작되고 그 5년 후인 1995년에 드디어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 남쪽에 진도아리랑비가 세워지는 모태가 되었다.

 

빗돌 채굴이야기

“여귀산에서 첨찰산으로 시집온 빗돌”

필자는 1991년부터 진도문화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진도아리랑비 건립추진 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진도아리랑 빗돌은 여귀산 남쪽 지금 국립남도국악원 입구에서 채굴되었다. 1994년 의신면 금갑리~임회면 상만리 도로 확포장 공사를 하면서 나온 돌인데 무게가 18t이었다. 그때 도로공사장에서 많은 돌이 나왔었는데 모두 타지로 반출이 되고 이 돌은 워낙 커서 가지고 가지를 못하고 길가 땅 밑에 묻어버린 것을 필자가 찾아내 옮겨 오게되었다.

첨찰산의 첨(尖)자는 “뾰족할 첨자”로 남자의 산이며 여귀산(女貴山)은 글자 그대로 여자의 산이다. 여자의 산 여귀산에서 채굴된 빗돌이 남자의 산인 첨찰산 남록으로 시집을 와서 지금 아리랑빗돌로 다소곧이 앉아 있다.

이 빗돌을 채굴하고 운반하는데 큰 도움을 주신 조규식(당시 군 공보계장)님 임기림(문화원 사무국장)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진도아리랑碑여!

영원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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