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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화의 맥을 이은 의재 허백련
남종화의 맥을 이은 의재 허백련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03.2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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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 허백련 선생은 남종화가로 1891년 진도에서 향반 허경언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선친으로부터 한학을 익히고 미산 허형으로부터는 서법과 사군자를 비롯한 묵화 기초를 배웠으며 때마침 진도에 유배되어 있던 석학 무정 정만조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우기도 했다.

무정이 서울로 돌아가자 1911년 허백련도 상경하여 기호학교에 입학했다가 1913년 일본으로 가서 동경 메이지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미술로 전향했다. 동경에 6년간 머무는 동안 일본의 대표적 남종화가 고무로의 영향을 받아 전통 남종산수화를 지향하게 되고 미술관과 박물관, 화랑 등을 다니면서 서예와 화법 연구에 몰두했으며 1916년 전후로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어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의재 허백련은 1920년 귀국해 광주에 잠시 머물다 상경해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1등 없는 2등에 당선되었다. 그뒤 1927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고 다시 광주에 정착하여 작품 활동을 했다.

<예전의 의재 창작 스튜디오>

1939년에는 금동에 연진회를 발족하여 남종화 전통을 이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연진회관 건립을 위한 전시회를 잇달아 열었으나 6.25 전쟁 중에 연진회관을 공산당에게 빼앗기자 무등산 동적골로 거처를 옮겼다.

연진회의 뒤를 이은 연진회미술원은 배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나 어느때부턴가 발길이 뜸해지자 의재 창작 스튜디오로 바꿔 젊은 작가들을 입주 육성하였다. 의재 허백련 선생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무등산의 차밭을 인수해 '삼애다원'이라 부르며 춘설차를 생산했으며 1947년에는 오방 최흥종 선생과 함께 지금의 의재 미술관 바로 옆에 농업학교인 삼애학원을 설립하였다.

국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먼저 농촌의 부흥과 근대화가 필요하다며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농업학교는 총 243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후 1975년 문을 닫았다. 여기에서 '삼애'란 애천(愛天), 애토(愛土), 애족(愛族)으로 하늘과 땅 그리고 민족 사랑을 말한다.

무등산 천제단

또한 무등산 천제단에 단군신전을 세우기 위해 '무등산 천재단 신전 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회를 열고 후원금을 받아 기공식까지 거행했지만, 기독교 측에서 우상숭배라며 반대하고 특히 기독교 신자였던 부인의 반발이 컸다고 한다.

춘설헌 (광주시 지정 기념물 제5호)

춘설헌은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석아 최원순이 요양하면서 석아정이라 하였으며 이후 오방 최흥종이 거처하면서 오방정이라 하였다가 이후 허백련이 사서 20년간 기거하면서 작품활동을 했던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일본에서 건축을 전공한 건축가이자 서예가인 김용구의 설계로 1956에 건축되었다.

의재 허백련 선생은 이곳에서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루이제 린저, 지운 김철수 선생 등 국내외의 많은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1974년 춘설헌을 찾은 게오르규는 허백련을 일컬어 '동양의 마지막 은자'라며 존경감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의재 허백련 동상>

학동 삼거리 근처에 의재 동상이 있습니다. 배경의 작품은 대표작인 '강산무진도'로 돌에 새겨 2폭의 병풍처럼 만들었습니다. 이 동상은 선생이 타계한 지 3년만인 1980년부터 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배 화가들이 재원을 마련해 세운 것인데 처음에는 의재 창작 스튜디오에 있었는데 2010년 현재의 자리에 소공원이 마련되자 이곳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많아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학동삼거리 근방에 의재로 1번지가 있다는 상징성도 있었다고 한다.

의재 허백련 화백은 1962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1966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3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하셨고 1974년에는 전남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7년 평생 2만 여 점의 그림을 그린 손에 붓을 쥐어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며 춘설헌 위쪽에 안장되었다.

의재 허백련-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

좌·우인사와 교우… ‘우리의 적대’ 부끄럽다

요즘 우리는 ‘갈등으로 꽉 찬 공간’ 속에서 사는 것 같다.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면 20세기에서 21세기에 걸쳐 미처 겪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외환위기로부터 월드컵 응원, 촛불시위, 그리고 미네르바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런 현상을 한편에서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다른 편에서는 ‘사고(思考) 영역의 확대’로 평가하면서 또 맞서고 있다.

의재 허백련-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

<의재 허백련-삶과 예술은 경쟁하지 않는다>(심세중·디자인하우스). 남종화의 대가였던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화백의 일대기, 그의 철학을 담아 무등산 자락에 건립한 의재미술관을 현대적 시각에서 정리한 것이다.

예술적 측면에서 그는 시(詩)·서(書)·화(畵)는 하나라는 입장을 지켜온 문인화의 대가였다. 또 다른 삶의 여정에서는 광복 이후 혼란기에 농업학교를 세워 기술입국을 꾀했고, 차 문화를 보급했다.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등 우익은 물론 사회주의자인 지운 김철수와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폭넓게 교유했다.

그에게 ‘삶’과 ‘예술’이 서로 삿대질을 하지 않는 가치였듯이, 지금 ‘서울사람’ ‘촌사람’ ‘나라님’ ‘백성’ 할 것 없이 필시 업신여기지 않고 다독이며 가야 할,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나는 차를 마시고 앉아 있는 그(제자)들을 보며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 향기로웠던가를 생각하고 얼굴을 붉히곤 한다.” 그가 말년에 늘 되뇌었다는 말이다. 아직 대가의 흉리에 한 치도 이르지 못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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