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9:37 (목)
장원호 박사의 그리운 대한민국 /진도아리랑, 모세의 기적, 강강술래
장원호 박사의 그리운 대한민국 /진도아리랑, 모세의 기적, 강강술래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03.26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운림산방의 예술혼을 느끼다”

 

 

 

열하 박춘길 선생의 진도 문화 사업 '다울 시록원' 부지 방문

<진도 아리랑>의 시원지인 진도는 한반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며, 이 진도를 중심으로 된 진도군은 상조도, 하조도, 그리고 가사군도 등 47개의 유인도를 포함하여 256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진도는 한 때 인구 10만을 넘던 아름다운 한반도 최남단 섬이었다. 그런 진도가 이제는 겨우 인구 3만을 조금 넘는 상황에 처했다는 어려운 역사를 읽고 언젠가는 꼭 진도에 가봐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마침 고향을 그리며 시를 쓰는 열하 박춘길 학형의 주선으로 진도행 고속버스를 타게 됐다.

열하 형은 <진도아리랑>을 한앓이 겨레노래의 시원이라는 <天孫 아리랑> 책을 발간했고, 다시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진도 문인 '다울 시록원' 회원들과 그의 고귀한 열정을 진도에 바치고 있다. 다울 시록원을 세우려는 대지를 이미 조성하고 그 시록원 본당을 준비하고 있다 한다.

진도를 어떻게 가는지 전혀 모르면서 달리는 고속 버스 창밖을 내다 보니, 한 많은 백제 유적지를 간다는 생각에 별 상념이 다 들기도 했다. 진도는 내가 전에 생각한 것처럼 아주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육지인 전남 해남에서 진도대교로 진도로 직접 연결되어 있으니, 진도는 이제 더이상 섬이 아니며,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을 둘러싼 아주 아름다운 경관지역이 됐다.

진도에 도착하니, 다울 시록원 회원인 紫山(자산) 오판주 시인과 소설을 쓰는 문인 강무창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산의 안내로 제일 먼저 찾아 간 곳은 시록원 부지였다. 그 뒤에는 진도의 많은 바위산을 등지고 있으며, 앞에는 오랜 세월 전에 만든 고인돌이 보는 아주 훌륭한 자리였다. 열하 형은 시록원 건립 사업을 위하여 그 근처에 작은 가옥까지 마련하여 검소하게 시를 쓰면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한다. 그 뜻이 매우 높고 귀하다.

다시 진도읍에서 가까우며 제일 높은 첨찰산에 올랐다. 산꼭대기에 오르니 밑으로 회동에서 바다가 갈라진다는 마도섬, 그리고 수많은 섬들이 그림처럼 보인다. 가까운 해역에는 이 지역의 생명줄 산업인 어장이 깔려 있는데, 주로 김과 미역, 그리고 전복을 양식한다고 한다. 해발 400여m 산에서 잘 정리된 층계로 회동 해변으로 내려갔다.

진도의 아름다운 바다 전경은 단연 한반도 으뜸이다. 회동에 도착하니, 39회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4월 26-29일)가 한창이었다. 이번 축제를 보려고 많은 관광객이 와 있었고, 귀청이 울릴 정도로 '대 국민토크쇼'의 음악과 유명한 진돗개 공연이 한창이었다. 진도 민속민요 공연과 만가행렬을 보고 싶었으나, 뒤로 미루고 다시 첨찰산 봉우리로 올라갔다. 산 위에서 신비스럽게 보이는 서해와 남해가 갈린다는 바닷길을 보았다.

 

바닷길이 열리기도 전에 많은 관광객은 이미 깊지 않은 바닷 길에 들어가 있었으며, 물이 빠지고 길이 솟아오르니 그 환호 소리가 내가 서 있는 산위까지 들렸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바다 갈림을 체험하듯 그 신비한 경지에 참여한다는 귀한 순간이었다.

신비의 바닷길 앞에, 뽕할머니 가 일으킨 기적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 들이 지금도 계속 찾아온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쓰고 바다를 향해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는 뽕할머니 조각상 앞에서 우리의 역사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해가 지고, 신비의 바닷길 체험이 끝나면 열린다는 민속무대 행사 중 강강술래를 꼭 보고 싶었으나, 본래 2박3일 예정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하루를 앞당겨 서울로 갈 일이 생겨서 강강술래 저녁 무대공연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강강술래는 노래와 춤이 하나로 어우러진 부녀자들의 집단놀이로 해안지역에서 추석을 전후해서 달밤에 행해졌다고 한다.

강강술래는 여성의 놀이가 적었던 때에 활달한 여성의 기상을 보여준 민속놀이의 하나로 민족정서가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는데, 진도에서 이런 문화유산을 잘 살리고 보존하고 있다.

반나절 버스로 진도에 내려가서 남은 반나절에 너무도 감명 깊은 귀한 이야기와 유산을 듣고 보았다. 오늘 본 진도의 문화를 모두 소화하려면 여러 날이 걸리겠지만, 진도 읍장도 지내고 또 관광 여행 해설가인 시인 오판주께서 생선회를 즐길 수 있는 저녁 자리에 함께하는 것으로 진도 여행을 마무리해야 했다. 나는 너무 즐거운 마음에, 오랜만에 시인 열하와 소설가 강무창 선생을 모시고 열하와 고려 대학교 시절의 못 다한 이야기를 하면서 소맥을 좀 과하게 마셨다.

둘째 날은 아침 일찍 호텔을 출발하여 순두부 집에서 오래 숙성된 맛있는 묵은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세월호 유족들이 분향소를 차려놓은 팽목항으로 갔다. 팽목항에서 조도의 창유항으로 가는 쾌속정을 30분 가량 타고 배에 실고 온 승용차로 창유항 주변을 돌아보았다.

산행리 마을에서 돈대리 들머리까지에 널려 있는 넓은 농토에는 경작자가 없어서 잡초로 가득했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고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하는 농사는 아주 제한적이기 때문에 드넓은 농토는 잡초밭이 됐다고 한다. 손가락 바우와 별바우를 등산하는 별도의 방법이 있다고 하나 내가 조급히 귀경해야 하기 때문에, 멀리서 산위를 바라보면서 내 남은 인생에 다시 이곳을 등산할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돈대봉 정상에는 통신 안테나를 설치하기 위한 시설이 있는데, 그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수많은 섬들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진도 여행 중 고인돌 유적을 발견했다. 수천년 전의 유적이어서 느낌이 남달랐다. 돈대봉을 내려와서 팽목항으로 돌아가는 시간 때문에 마지막으로 산금산 능선을 타고 그 동쪽 끝에 있는 조도(하조도) 등대로 갔다. 등대 요원들이나 들어가는 좁은 도로로 등대 앞까지 차를 몰고 가서 등대주변을 돌아보고 진도읍으로 내려 왔다. 진도읍에서 강무창 선생이 주선한 뜸북이 갈비탕을 먹었다. 나는 처음 먹어 본 음식이었지만 이 지방의 유명한 잔치 음식이라고 한다.

점심을 마치고 바로 진도문화 유산의 집결지인 운림산방으로 가서 1890년대의 소치(小癡) 허련의 그림과 글을 보았다. 참으로 훌륭한 예술인 소치가 진도에서 살고 활약한 역사를 보았다. 특히 소치가 살았던 한옥이 잘 보전되어 있었는데, 이는 내가 어려서 본 한옥과 매우 유사했다. 소치의 집과 전시관 옆에는 금봉 박행보의 전시관이 있었다. 남도 문화의 맥을 이어 온 한국 화단의 거목, 박행보 선생이 기증한 산수화, 문인화등 109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운림산방을 나오면서 바로 옆에 있는 삼별초공원을 못 보고 진도군청 옆에 있는 소전 미술관을 찾았다. 여기에는 추시 김정희 이래 서예 대가로 추앙받는 소전 손재형 선생의 작품과 소장품, 그리고 그의 제자 서희환 등의 작품과 의제 허백련 선생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몇날을 두고 보아도 모자랄 이 지역의 훌륭한 예술을 감상하면서,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기로 한 것을 후회했다. 나는 열하 선생의 다울 시록원 건설과 <진도 아리랑>을 올바르게 보전하려는 그의 큰 뜻을 존경한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를 돕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다시 진도를 방문할 기회를 꼭 갖겠다고 결심하면서 진도를 떠났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