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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로 민족의 아픔 위로하고 희망을 그리다
무궁화로 민족의 아픔 위로하고 희망을 그리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19.05.1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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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꽃’무궁화 화가 심석(心石) 김영배

 

                                                        

 

연변대학교 실습중심분원장. 김영배 주임교수는 "그림은 이론보다 감성이 앞서야 하기 때문에 작가는 감상자를 배려해서는 안된다고 본다.”면서 "'사제동행전'이라는 소중한 제목 아래 이런 감성을 앞세워 서로를 인정하고 화합하는 데 노력"하는 자리라고 밝혔다. 지난 해 말 연변대학교 사제동행전 전시회는 12월 5일부터 11일까지 하나로 갤러리에서 열렸다.

밝고 맑은 수술은 우리 민족의 눈, 꽃잎은 환하게 웃고 있는 한민족의 얼굴, 단심은 핏줄, 나뭇잎은 옷, 나무는 어떤 어려움에도 버틸 수 있는, 튼튼하고 힘찬 버팀목 같은 뼈로 생각하며 무궁화를 그린다. 민족의 상징을 그릴 때의 마음은 엄정하다. 반만년 한의 역사가 물감이 되어 붓을 적신다. 그렇게 그려야 비로소 우리, 이 세상 누구도 갖지 못할 우리 것을 그릴 수 있다. 평생을 바쳐 무궁화를 그린 김 화백에게 무궁화는 어떤 의미일까.

저녁이면 얼굴을 감추는 꽃

김 화백은 예술의 고장 진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만 해도 앞마당에 무궁화를 심은 집이 많았다. 무궁화가 피고 지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붓이 갔다. "무궁화는 저녁에 지면서 수줍게 오므라들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듯이. 무궁화 그림이 벌써 사십 년째다. 그 동안 김 화백의 무궁화 사랑은 변함이 없다.

학교로 가는 길에는 미술대전에 입선한 진도의 화가들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그것을 보면서 김 화백은 무궁화 앞에 굳게 다짐했다. "나는 나중에 대통령상을 받는 화가가 되겠다." 커다란 꿈을 안고 그림을 그렸다. 무려 열 번의 낙방이 이어졌다. "고대하던 입선이었는데도 결국 '이게 왜 입선이 됐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무궁화는 아무리 잘 그려도 흡족하지가 않아요. 될 때까지 출품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열한 번째 도전에서 김 화백은 입선을 차지했다. 그리고 열세 번의 입선과 한 번의 특선이 이어졌다. 열 번을 입선에 들면 심사위원 초대작가가 된다. 화가에게는 더없는 영예지만, 더는 미술대전에 출품할 수 없게 된다. 김 화백에게는 다른 꿈이 생겼다. 붓이 스스로 나와 멈출 줄 모르고 춤을 췄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작품 한 점을 만들기 위해 화가는 마지막까지 붓과 함께할 것을 맹세했다.

스승과 제자가 하나 되어

김 화백은 연변대학교에서 실습중심분원장을 맡고 있다. 연변대학교 학부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김 화백도 만학도였다. 때문에 김 화백은 개인 사정으로 학업을 놓은 학생들이 다시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옛날 어려웠을 때 시기를 놓쳤던 분들이 지금 연변대에도 한 서른 명은 됩니다. 이 제도는 참 좋은 제도에요. 우리나라에는 지금 만학도를 위한 정책이 많이 없거든요. 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어서 우리 연변대로 많이 옵니다. 연변대학교는 우리 민족의 대학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권할 수 있습니다. 교수진도 충분한 수상 경력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 년에 두 번씩 본교로 가서 특강을 받으면, 나머지 학점은 모두 국내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김 화백에게는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 마디가 있다. "가수가 히트곡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하듯, 우리 화가도 자신만의 소재가 없으면 그림을 오래 못 그립니다. 나를 알리기 힘들고.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의 소재만큼은 이 세상에서 제일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려야 작품과 나를 알리는 효과도 크다고 생각해요. 물론 사람 욕심은 이것저것 다 그리고 싶겠죠. 그렇게 해서 물론 좋은 점도 있겠지만 자신만의 중심이 없어지거든요.”

변하지 않는 꿈

"무궁화 꽃을 이 세상에서 제일 잘 그릴 때까지 그리고 싶습니다. 누가 봐도 감동을 할 수 있는, 그런 무궁화 그림. 그런 작품을 한 점이라도 그려 보는 게 제 꿈입니다."

김 화백에게 무궁화는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은 꽃,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무궁화. 결국은 화가를 꿈꾸던 어린 시절도, 언제나 꿈은 대한민국의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꽃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다. 붓을 잡은 지 사십 년이 흘렀다. 강산이 모습을 바꿀지라도 소중한 꿈은 변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의 세월만 흘러간다.

                                                              

 

-무궁화 작가로 유명한데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나?

예향 진도의 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16살때부터 본격적으로 무궁화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18세부터는 국전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무궁화 작품이 약 1000여 점은 되는 것 같다. 한마디로 다작을 하며 실력을 키워왔다.

우리 것을 외면하는 사람들

"국회의사당이 있는 여의도에다 왜 벚꽃을 심어 놓고 축제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몇 년 전에 어떤 사람이 벚꽃을 잘라버렸다는 기사가 나오더라고. 그걸 보면서 '하나 자르려면 다 잘라버리지' 그럴 정도로 속이 시원했어요. 무궁화의 날이 지정된 지도 얼마 안 됐어요. 내가 건의도 하고 그랬는데 3년 전인가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들이 우리나라 꽃에 참 무심해요.

예로부터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외면하고 무시해요. 무궁화가 우리나라 꽃이 아니라는 얘기나 하고. 우리는 우리 것을 무시하고 남의 것을 좋아해요. 그게 참 아쉬워요."

"서양화는 면을, 한국화는 선을 중시합니다. 한국화는 소재 자체부터 우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것도 무궁무진한 표현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재료나 기법도 동서양이 따로 없이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이리저리 뒤섞이고… 그림도 시대상에 맞게 그리긴 그려야 합니다. 그러나 정체성마저 사라지면 안 됩니다. 전통은 전통대로 보존해야 해요. 그런데 너무 현대화로만 관심이 쏠리니까 조금 아쉽습니다. 요즘은 생계 수단으로 많이 그림을 그리는데 먹으로 그리던 한국화 정통 작가들이 다른 사람들이 화려한 색을 위주로 그리는 작가들을 따라 아크릴판을 사고 채색화를 그려서. 작가들이 많이 인내해야 하는데 또 생계와 관련이 있어서……."

김 화백은 연변대학교의 교수와 학생들이 해마다 함께 여는 사제동행전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4년 전에 사단법인 무궁화미술협회를 만들었다. 앞으로는 협회를 통해 무궁화를 알리고 홍보도 많이 할 생각이다.

지난 4월 24일부터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나라향기’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다. 오는 9월 17일부터는 홍천문화예술회관에서 홍천국무궁화축제위원회 주최로 남북교류전이 열린다. 김성민, 정창모 등 북한작가, 중국 초대작가 이부일, 정동수씨도 참가한다.

"일 년에 한 번씩 홍천에서 무궁화 축제를 해요. 10년 전에 홍천에서 예술가들의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홍천에서 ‘무궁화 작품 걸기 운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무궁화를 백 점 정도 그려서 지역 주민들한테 무료로 드리고, 미술관이나 협회, 면사무소나 경찰서에도 드리고, 그렇게 해서 홍천군 주민들의 자택과 관공서에 무궁화가 가득 필 수 있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무궁화미술협회를 통해 김 화백은 무궁화 꽃을 주제로 다양한 상품도 만들고 미술 대회도 개최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무궁화를 우리나라 꽃이라고 하면서도 관심이 그닥 없다. 많은 분들이 왜 무궁화를 그리느냐고 물어보시는데 나는 그때 마다 이렇게 답한다. '꽃잎은 우리 민족의 얼굴, 빨간 단심은 우리민족의 핏줄, 꽃 수술은 우리민족의 눈, 잎은 옷, 나무는 뼈이다‘라고 말이다. 많은 아픔이 있는 우리 한민족의 슬픔이 깃들어 있으면서도 또 끝없이 꽃을 피워내는 생명력에 한민족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 무궁화 속의 그 의미를 끄집어내어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고 용기를 복돋아주고 싶어 무궁화를 그리고 있다.

-영향을 받은 작가가 있다면?

어린 시절 독학으로만 공부하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고 싶어 찾아간 곳이 바로 의제 허백련 선생의 연진 미술원이었다. 이곳에서 전통 남종화를 공부했고 이후 현당 김한영 선생에게 사사받았다. 두 분 모두 제게 큰 영향을 미쳤지만 특히 현당 선생에게 받은 인성교육은 삶의 방향성을 잡는데 큰 역활을 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작품을 아껴선 안된다'라고 신신당부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가에게 작품을 만들어내는 힘은 바로 내면에 있다.

-중국 유학 경력이 눈에 띈다

40대 초반, 새롭게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중국으로 떠나 연변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했다. 채색을 위주로 하는 북종화와 필력이나 농담을 중시하는 남종화를 모두 공부할 수 있어 큰 도움이 됐다. 원래 4년을 공부할 계획으로 유학했는데 배우다보니 1년 연장돼 5년 만에 졸업했다. 당시 많은 것을 익혔는데 그중 ‘번지기’ 기법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 번지기 기법을 접목한 무궁화 작품들을 미술대회에 출품했는데 바로 입선하더라. 그러면서 다른 작가들도 번지기를 활용해 작품을 만들어내는 등 그 기법이 유행했다. 당시에는 한국 미술계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기법이어서 신선한 반향을 일으킨 것 같다. 뭔가 한국 미술계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 뿌듯하다.

-후임 양성에 관한 계획

현재 연변대학교 미술대학 한국실습중심 주임교수(분원장)을 맡으며 작가 발굴에 나서고 있다. 연변대학교 미술대학 한국분원에 소속된 학생 수는 30명으로 대부분 그림에 뜻을 가진 만학도다. 연변대학교와 똑같은 커리큐럼으로 학기가 진행되며 매년 3월과 9월에 중국 본원에서 진행하는 특강을 듣는 것 외에는 한국에서 수업이 이뤄져 학생 부담도 적다. 다양한 분들이 공부하기 위해 한국분원을 찾는데 이 분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후임 양성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한국분원에서 3년 간 졸업생 배출을 하고 있는데 매​년 ‘사제동행전’을 한국 인사동 등에서 열고 있는데 반응이 무척 뜨겁다.

-앞으로 작품 계획

일단 교수로 있는 만큼 학생 교육에 이바지하고 싶다. 학생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돕는 것만으로도 교수로써 큰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또 작가로서도 보다 새로운 영역으로 작품 활동을 넓히고 싶다. 한글 등 우리민족의 상징성이 있는 것과 접목해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 또 홍천에 위치한 무궁화 예술관에서 아이들이 무궁화에 대해 친숙해질 수 있도록 체험 및 교육 프로그램 진행하고자 한다.

<프로필>

심석 김영배. 연변대학교 미술대학 회화학과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동양화학과 졸업.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특선 연 14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연 4회.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수상.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외래교수 역임.

現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사)한국 무궁화 미술협회 부이사장. 무궁화 문화예술관장. 현묵회 회장. 연변대 미술대학 한국실습중심 주임교수(분원장). (사)한국 미술협회 남북 교류위원회 부위원장.(박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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