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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진 동학 지도자 유골 ‘어디로?’
박중진 동학 지도자 유골 ‘어디로?’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19.05.27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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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농민 이끌고 새 세상 열기위해 한 몸 바친 박중진 혁명가

최근 진도 아닌 전주에 안장 추진에 뜻있는 진도군민 ‘분노’

2005년 '묘역 조성과 공원화 계획' 등 학술 용역 마쳐

“2009년 진도 군수가 바뀌면서 상황이 변했다.”

전북 전주시 효자동 '전주 역사박물관' 지하 수장고 한쪽에는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다. 그 안에는 1백20년 동안 방치되어왔던 유골(두개골)이 들어 있다. 유골의 주인공은 동학 농민혁명 당시에 전남 진도에서 활동했던 농민군의 지도자이다. 이 유골이 박물관 지하 창고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995년 7월25일 일본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 학생들은 인류학교실의 옛 표본고를 정리하다가 헌 신문지에 싸인 종이 상자를 발견한다. 그 안에서는 여섯 구의 유골이 있었다. 그중 한 구의 유골 표면에는 붓글씨로 '조선 동학당 수괴의 수급. 사토 마사지로로부터'라고 쓰여 있었다. 유골 속에 들어 있던 첨부 문서에는 '1906년 9월20일, 전라남도 진도에서 채집했다'라는 내용도 있었다.

유골을 채집했던 사토 마사지로는 홋카이도 대학의 전신인 삿포로 농학교의 제19기 졸업생이다. 그는 '식민론'과 '인종학' 등을 연구하기 위해 유골을 일본으로 반입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뿐 아니라 한국도 발칵 뒤집혔다. (사)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등은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 공문을 보내 유골을 돌려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리고 1996년 5월30일, 유골을 국내로 봉환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유골은 망자의 고향인 진도에 안장하기로 하고 전북 정읍시 황토현 기념관 사당에 임시로 안치했다가 지금의 전주 역사박물관으로 옮겼다. 진도군도 처음에는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안장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2005년에는 '묘역 조성과 공원화 계획' 등 학술 용역까지 마쳤다. 그러다 2009년에 진도 군수가 바뀌면서 상황이 변했다. 진도군은 '유골의 신원이 확실하지 않아 진도로 안장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묘역 조성 계획'도 철회했다. 그러면서 유골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붕 뜨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면 유골의 주인은 누구일까. 당초 이 유골의 주인공은 진도 출신의 농민군 지도자 박중진으로 추정되었다. 그 근거로는 유골함에 '진도 출신 동학군 수괴'라고 표시되어 있었고, 국내 기관에서 감정한 결과 40대 남성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진도 조도면 출신의 박중진은 동학군을 이끌던 중 1894년 진압 당시 붙잡혀 47세로 죽었다.

"역사적으로 보아 박중진 유골일 가능성 커"

하지만 과학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없다. 진도에 있는 박중진의 후손을 찾아 DNA 검사를 실시했으나 직계가 아니라서 판단 불능으로 나왔다. 여기에다 유골 주인공의 키가 1백50cm로 추정되는 데 반해 실제 박중진은 키가 컸다는 마을 주민의 증언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골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박맹수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는 "역사적 정황으로 볼 때 박중진의 유골일 가능성이 크다. 유골은 고향인 진도군에 안장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도 군수가 바뀌면서 행정의 일관성이 결여되었다"라며 씁쓸해했다.

진도군도 처음에는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안장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2005년에는 '묘역 조성과 공원화 계획' 등 학술 용역까지 마쳤다. 그러다 2009년에 진도 군수가 바뀌면서 상황이 변했다. 진도군은 '유골의 신원이 확실하지 않아 진도로 안장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리고 '묘역 조성 계획'도 철회했다. 그러면서 유골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붕 뜨는 신세가 되었다.

진도군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회장 박주언)는 지난 15일 긴급 회의를 갖고 이와 관련한 ‘검토 의견서’를 발표하였다. 주 내용은 “1. 일본인이 진도에서 도굴해 간 동학 지도자 유골에 대해 「장사 등에 관한 볍률」제2조 16조 아목의 사망자에 대한 연고자 권리, 의무 순위인 ”시신이나 유골을 사실상 관리하고 있는 자“에 해당된다”면서 유골처리의 법적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또한 유골 당사자가 진도에서 체포된 후 폭도로 규전되어 처형당한 것이며, 죽임을 당하기 전 관리하고 있던 행정기관은 진도군이므로 유골처리의 권리가 있다 면서 동 유골은 126년 전에 진도의 공동묘지(송현재)에 묻혀 있었던 것을 도굴해 간 것이므로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의 적용 제외 대상이라 할지라도 도굴해간 자에게서 반환받아 현재 보관9관리)하고 있다는 신분으로 유골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사리와 도리에도 맞지 않다는 입장이다.

또한 진도 기념사업회 측은 동 유골은 역사기록 및 연구조사에서 나타난 진도 출신 동학지도자급 인사 14명 중 한 분일 수 있다. 기념사업회측이 97년 유골의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남, 여 및 연령대 두 가지만을 밝혔다. 진도인 한 사람의 머리카락을 대조하여 유전자 검사 10개 유효항목 중 3개항만 감사했다는데, 이런 검사와 당시 기술의 한계로는 직게후손을 밝힐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기념사업회(전주) 측은 진도인의 유골이 아니라고 단정한 것이다.

무엇보다 지난 2015년 3월부터 진도군 등이 유골 반환 요청을 수차 했음에도 과거 세 차례 (2002)진도군에 가져가라고 공문 등을 보냇으나 응치 않았으므로 줄 수 없다는 것으로 법적 다툼이 예고된 것이었다면서 이제라도 유전자 검사 등을 통하여 후손을 찾아 주는 것은 동학 후세들의 도덕적 책무이고, 진도땅에 묻히는 것이 망자에 대한 에의이다. 현재 기념사업회와 전주시는 오는 6월 1일 진도군과 동학을 사랑하는 단체의 반대에도 전주 안산인 투구봉에 안장할 게획이어서 시급한 현안이 되고 있다.

만약 진도군이 이 문제에 대해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이의 제기와 반대의사를 분명하게 표시하고 항의방문을 하지 않을 시에는 기념사업회의 사전계획에 따라 진행될 것으로 보는 중대한 현안으로 진도군수가 직접 나서 진도기념사업회와 함께 항의방문과 조속한 진도 반환을 촉구하야야 할 것으로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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