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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도화의 길을 찾아서 /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한국 남도화의 길을 찾아서 /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06.0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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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 박행보, 옥전 강주지, 전정 박행보, 인재(忍齋) 박소영 화백
고향 진도에 소장품 기증 행렬 계속

                                                                           삼애정신이 깃든 의재선생의 작품 ‘홍익인간’

 한국화에서 매우 독창적인 분야를 개척해온 인재 박소영 화백이 예향 진도에 소중한 애장품 50여 점을 기증하기로 해 화제가 되고 있다. 인재 화백은 예향진도 출생으로 일찍 의재 허백련 선생에게서 사사를 받고 1974, 77 국전 2회 입선, 1984 대전 입선으로 주목을 끌었다.
 전통예술대상전 초대작가, 단원예술제 심사위원, 1990 현대한국화회전, 한중교류전, 연진회전
 전남미술대전 초대작가, 1990 한국扇面전, 개인전 4회를 갖고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인재 화백은 특히 사군자를 벗어난 화조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자리매김하며 그 품격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을 받는 중견(重堅) 화가로서 치밀하면서도 고아한 작품세계를 내보여 많은 애호가들로부터 찬사와 호응을 받아왔다.
 호남에서 무등산의 홍익과 평등을 모든 생애의 지론으로 삼은 의재(毅齋) 허백련의 춘설향에 담긴 세례에 적시지 않은 화인(畵人)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는 무등(無等)의 지란(芝蘭)보다는 섬노루귀풀이 어떻게 복수초와 2월을 다투는지, 저 팽목항 앞 장죽수로 건너 볼뫼섬 해당화가 움켜줄 것이라곤 게껍질로 삭아지는 죽음뿐인 보래밭에서 제 살을 찢으며 피어나는지, 금강산 앞에 제 눈을 찔러 외눈박이가 된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을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이번에 박소영 화백이 진도군에 기증하는 작품들도 그 동안 오래 동안 애장해 왔던 대작들을 아낌없이 내놓아 때로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예향 진도의 품격을 높였으며 한 점 한 점마다 열정과 치열한 탐구력이 담긴, 혼이 깃든 작품들로 예술계 관계자들로부터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는 평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단순한 기명절지 사물을 꿰뚫는 정밀성을 뛰어넘어 시적 서정이 깃든 고품격 세계를 펼쳐보여 전국적으로 명성을 쌓아온 인재(忍齋) 박소영의 작품과 향기를 가까이 친람할 수 있는 기쁨을 선사해준 이번 결정에 많은 군민들은 감사를 보내고 있다.

 

 특히 틈과 소홀함을 절대 배제하며 살아있는 생동감은 자연과 인간의 깊은 교감을 품고 있어 그의 평소 예술철학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늘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한 발품으로 산야를 누비며 관찰력을 다듬는 인재 박소영 화백.
 5월 하순 이동진 진도군수, 박금례 의장, 금봉 박행보(확인), 석재 김용선 진도예총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기증식을 가졌다. 한편 곧 한국예총회장을 역임한 임농 하철경(임회 삼막리) 화백도 실경 대작 중심의 산수화 작품 기증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재(忍齋) 화백은 정부의 시대교육을 벗어나 삼애의 정신을 담은 의재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묵향과 여백에 젖은 연진(鍊眞)회에 들어선다. ‘연진(鍊眞)’은 참됨을 연마한다는 뜻으로 서화를 통한 인격도야를 목적으로 했음을 의미한다. 참다운 예술의 경지에 이르고, 참된 근원을 보전하며, 예악(禮樂)을 바탕으로 서로 모여 삶을 값지게 보내기 위해 모인 동호회의 성격이 강하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정직과 겸손을 중시하며 시서화 삼절이 좋아 즐기기 위해 모인 교유 단체이다.
 당시 발기인은 허백련 선생이 중심 되어 정운면(鄭雲勉), 구철우(具哲祐), 허행면(許行冕), 정상호(鄭相浩), 노형규(盧衡奎), 노주봉(盧周鳳), 최한영(崔漢泳) 등 36명이었다. 김은호, 변관식도 찬조 회원으로 참여했다. 1939년에 제1회 연진회의 회원전이 열렸는데 이것은 회관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허백련과 관계가 깊었던 이당 김은호와 소정 변관식이 찬조 출품하기도 했다. 1940년에 제2회 연진회전이 열렸다. 70년대 초반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게오르규 작가가 직접 춘설헌을 찾아 면담하여 더욱 시대의 거봉으로 우러르게 되었다.

 무등산 단군신전 복원을 주도한 의재 선생
 허백련 화백은 회원들을 일주일에 하루씩 모이게 하여 체본을 그려주거나 써주어 이를 임모하도록 했고, 그것을 강평해 주며 연진회관 안에 전시도 하여 스스로 잘못된 것을 발견해서 고쳐 나가도록 했다. 이러한 그의 교육은 곧 많은 회원들을 불러 모아 연진회는 서화교육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연진(鍊眞)’은 참됨을 연마한다는 뜻으로 서화를 통한 인격도야를 목적으로 했음을 의미했다. 참다운 예술의 경지에 이르고, 본디 근원을 보전하며, 예악(禮樂)을 바탕으로 서로 모여 삶을 값지게 보내기 위해 모인 동호회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정직과 겸손을 중시하며 시서화 삼절이 좋아 즐기기 위해 모인 교유 단체였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민족주의자 허백련(진도읍 남동리 출신)은 우리 시대에 추구해야 할 이념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주창했으며,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무등산에 단군신전 건립을 추진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써서 나누어 준 ‘弘益人間’ 글씨와 함께 삼애정신(愛天, 愛土, 愛家)을 바탕으로 시대의 요구였던 농촌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의재 허백련 선생이 설립한 삼애학원(1947)은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고 30여 년간 농촌 지도자를 양성했다. 2019년 특별전시회는 스승의 한결같은 모습을 기억하는 금봉 박행보, 양계남, 이강술 등 제자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의재의 삶을 만날 수 있어 애호가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우리들의 산야에서 우리꽃들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보존하고자 하는 사람보다 저만의 울타리로 사유화한 제 정원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꽃뿌리를 파헤친다. 새들도 곤충도 숨어버린다. 고아(高雅)하다는 인식도 편식에 불과하다. 앞서지 않고 심연을 돌며 금봉(金峰) 선생은 이미 오방색을 뛰어넘어 금강(金剛)의 묵죽에 심취했는지 모른다. 산과 물은 숭과 덕을 안고 아리랑에 젖는다.
 루이스 글릭은 ‘눈풀꽃’에서 듣는다. “가장 이른 봄 땅속 구근에서 피어 올라오는 자고 하얀 꽃”(스노우 드롭)이라며 “내가 언 땅 아래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절망을 느꼈는지 알고 있느냐”
 예술가들은 욕망과 절망을 혼재하여 젊은 시절을 소진한다. 절망의 깊은 땅 속에서 붓꽃같은 처절한 열망을 움켜쥔, 신과의 담판을 짓자는 예술인들만이 인류정신의 지표로 자리잡는다.
 다시 민들레가 피어나야 한다. 세한 장상망은 소나무가 아닌 푸르다 하얀 명량의 결기에 살아있지 않을까. 첨찰산 동백꽃이 다 떨어지고 열 세척의 판옥선이 다 뒤집혀져도 한민족의 꿈과 빛을 실은 진도호는 항진해나갈 것이다.
 인재 박소영화백의 자신의 새로운 변모에 치중하고 있다. 언뜻 운보 김기창이 스친다. 우향 박래현도 보인다. 갓을 쓴 사람들. 도시의 노점.
 이번 기증에 대해 진도군청 김기호 문화정책담당은 “인재 박소영 화백은 스스로도 이제 그런 작품은 그리기가 힘들 것”이라며 한창 필력이 넘치던 시절의 치열한 예술혼이 담긴 소중한 작품을 시기별로 엄선 기증해주신 결단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밝혔다. 진도군이 민속문화에술특구답게 수준높은 예술품을 엄선, 기증을 받아 전시공간을 확보하는 작업이 밑받침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진도에 국립한국미술관 남도관을
 이제 정부는 선택과 균형을 통한 지역특성에 맞는 발전 기획으로 국립한국미술관 진도유치에 뻐른 호응과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과 관계부처, 국회의 반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윤영주 진도부군수는 최근 지방 유력 신문사에 기고를 통해 ‘왜 진도인가’를 역사문화 조건을 제시하며 반드시 진도에 국립한국미술관 건립의 당위성을 강조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새들의 목소리는 민성(民聲)이다. 북소리다. 녹두꽃이다. 소쩍새와 물총새가 오기 앞서 매화는 시절에 흔들리지 않는 지조를 내보인다. 불매향(不賣香)을 담고 벽파나루를 건너온 지조있는 시대의 등대불, 조정에서 내처진 유림들의 거처가 되었던 옥주(沃州)는 노래의 물결로 천년 넘게 흘러왔다. 사람이 창(唱)과 창(槍)이 되었던 섬 사람들. 녹진 망금산에서는 강강술래로 동아줄을 엮고 서로 선봉장이 되고 싶어했던 정유년 섬 사람들. 왜적들에게는 등대불보다 더 붉은 눈망울이었다. 진도사람들은 그렇게 참 징하게 산다. 그것마저도 ‘그랑께’로 품는다. 소포 해창에서 남천교로 물이 오르지 않으면 스스로 비늘을 돋아 흐르는 ‘진도것들’.
 누구든 흐르고 싶지 않았겠는가. 쓰러져 핏물을 움켜쥐고 다시 솟는 대나무가 되지 않았을 것인가. 나는 산복숭아 동쪽 가지로 늘 휘청거린다. 나무는 묻지 않는다. 산너머 남풍을 기다리는 푸른 잎사귀들은 사랑과 신뢰의 신호일 뿐이다.
 ‘왜 진도인가?’라는 질문은 이제 우문이다. 단 한 사람을 위해 백개의 작품이 걸려 백만송이 감흥이 오대양으로 흐르게 하라.
 맹골수로에서 세월호는 나무선창 목포로 떠났다. 삼별초의 해상국은 오래 전 불타고 수막새 기와쪽들이 흙속에 너부러졌다. 벽파 앞 오류바다의 해저유물 소소승자총통 심지도 사라졌다. 벽파진 바위에 우뚝 선 이충무공 전첩비(소전 손재형 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이 바다 지나는 이들 이마 숙이옵소서’. 노산 선생은 그렇게 비문을 마무리했다.
 이번 신축년 5월 봄의 남도화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며 금상첨화를 이루는 인재 박소영 화백의 진도군 기증식이 새로운 기폭제가 될 것으로 군민들은 기대하고 있다.(남인 박종호 기자)

 진도 마을의 큰 나무는 음률이 열리는 신단수이다. 율려가 그 마을의 법전이요 경진이 된다.
 정명돈의 소나무에는 선비의 은일과 절조가 푸르다. 청풍은 마음을 씻는 세례이다. 그 높이가 아득하면서도 어지럽지 않고 언제나 나를 투영하는 수호신장의 역할을 하는 듯하다.
 얼마나 많은 세월의 바람과 속진이 머물다 갔을까. 우리나라의 애국가 구절에는 저 남산의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진도 바닷가 방풍림은 그 마을을 지키는 수호장군으로 늠름하니 도열해 있다. 죽림 강계바닷가를 가보라. 바다 건너 관매도 곰솔숲을 가보라.
 거기 동외 정면돈의 소나무를 만나보라. 관매도가 왜 ‘볼뫼’인지 솔숲에는 ‘바람란’의 향이 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선비는 섬과 같다. 누항과 저자를 거닐어도 늘 청풍을 간직한다. 한풍십년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 기개로움은 학의 풍모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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