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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회를 접목하다 / -임농 하철경화백의 50년 수묵세계
예술과 사회를 접목하다 / -임농 하철경화백의 50년 수묵세계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06.1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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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의 전설’ 그리는 여정(旅程) 끝이 없네

 
 

 

  
 임농(林農)은 단순히 이 시대 수묵화의 폭과 상사력을 넓히는데 그치지 않는다. 속도감 속에는 필선에 자연의 음률이 그윽하게 담겨있다. 그리하여 그림의 격을 높이고 교감을 이끌어내는 예술적 성취를 자아낸다.
 여백, 절제, 역동이 한 데 어우러진 ‘수묵화의 향연’이다. 하철경 화백은 ‘남종화 거목’이던 남농 허건 선생의 마지막 제자다. 한국화를 독특한 현대적 점묘화법으로 계승한 한국 수묵화의 또 다른 개척자이다.
 하철경 화백은 한국예총 회장, 호남대 미술대학 교수, 동계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 등으로 바쁘게 활동하면서 틈틈이 짬을 내 그린 수묵담채 작품을 수시로 전시회에 내놓았다. 주로 전시 작품은 봄, 대흥사의 아침, 산행, 성산일출봉, 설악의 여름 등이다.
 한편 하 화백 작품은 청와대, 국립현대미술관, UN본부(뉴욕), 프랑스주재 한국대사관, 일본주재 한국문화원, 러시아 옴스크시 필하모닉, 서울시립미술관, 한국은행 등이 소장하고 있다.

(순천 송광사 일우)
 오늘날 세계화된 사회에서 기존의 문화와 경제의 관계에 대한 개념은 계속 변화되고 있다. 그래서 문화예술의 발전을 통한 경제적 가치의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경쟁력의 원천으로서의 문화예술의 의미를 갖는다.
 문화예술은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재해석과 전 세계가 공유하는 인류의 자산으로 가치를 높이고 있다. 예술 창작과 대중 확산이라는 문화예술 소비 시대를 맞아 예술경영에 대한 이해와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갯바람)

 (두륜산 대흥사 소견) 임농 하철경 화백은 남종산수화의 맥을 잇기 위해 치열한 탐구와 고전으로 깊이 흐르는 수묵의 향을 더 새롭게 제다하는 정성을 다한다. (사)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을 역임한 그는 한국 문화예술 교류의 촉진과 예술인 권익 신장에 앞장서며 국민들과 함께 희망을 만들고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제고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본래의 자리를 되찾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철경 화백이 9년 전 처음 회장으로 취임했을 때에도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재정난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으로 하 화백은 예술과 연관된 사업-건물임대, 정부 지원 등을 통해 한국예총을 정상화시키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스승인 남농 선생의 작품과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들도 팔아야 했다.
 이처럼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하철경 화백은 한국예총의 재정자립 뿐 아니라 민자유치를 통해 예술인센터의 숙원사업이었던 공연장 완공 등을 이끌어냈으며, 예술인센터가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힘써왔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하철경 화백은 한국예총 사상 최초로 ‘무투표 당선‘으로 지난해 2월 퇴임하기까지 8년간 한국예총을 이끌어왔다.
 꾸준한 작품활동 통해 다양한 사회공헌활동 펼쳐
 예향 진도에 또 다른 예술문화자원 풍성케 기여 얼핏 투박한 듯하지만 오랜 수묵 탐구로 내공을 쌓아 힘 있는 역량이 담긴 자신만의 화풍을 독창적으로 표현하며 우리나라 특히 남도 자연의 향수를 향토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 하철경 화백은 전통에 기반을 두면서도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내며 독창적 수묵산수의 세계를 선보이고 있는 한국화가로 명성을 얻고 있다. 특히 수묵의 원숙한 농담 처리와 감각적인 담채의 산뜻한 조화를 통해 전통과 현대의 아름다운 소통을 지향하고 있는 그는 필선으로 그림을 시작해 필선으로 마무리할 정도로 필선을 중요시한다.
 실제로 그의 화폭에 나타나는 풍경에서 보이는 간결과 압축, 생략과 여백의 미는 이러한 필선 작업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그의 작품은 생명의 근원과 사물의 본질, 빛과 색의 눈부신 조화, 그리고 변화의 놀라운 이치 등이 올곧게 배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대해 하철경 화백은 “산과 바다는 마음이 넓어지고 편안함을 가져다준다”면서 “산사 역시 고즈넉한 분위기가 사람들에게 평화로움과 안락함을 주기 때문에 자주 소재로 삼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임농의 화실, 시창청공의 기운이 느낀다)
 사고(思考)의 확장을 위한 제련에는 치열한 깊은 자성이 요구된다. 분방함 속에 탈속한 법을 얻은 그의 작품들은 나무들도 연운공양을 하는 듯하다.
 그는 한국, 중국, 일본, 독일, 미국, 프랑스 등에서 개인전을 비롯 독일 루카스화랑, 괴테박물관, 일본주재한국문화원, 뉴욕 퀸즈미술관, 싱가폴국제아트페어 등 960여 회의 국내외 유수의 그룹전 및 초대전에 참가하며 역량을 발휘해왔다.
 특히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며 다양한 사회공헌활동도 함께 펼쳐온 하철경 화백은 세월호 침몰 사고로 숨진 학생들을 추모하고자 초대전을 개최, 회갑 기념 특별 초대전의 수익금 5,000만원을 H-net Academy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해 기부해 사회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또한 “앞으로 후배 예술인들의 전문성 향상에 앞장서고 자아실현에 적극 협조하는 것은 물론, 우리사회의 공동의 선 증진과 건강한 예술문화 생태계 조성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수화 김환기는 생전 “나의 그림은 철학이 아니다. 그림도 아니다. 그냥 그림일 뿐이다.”고 고백하였다. 화인들은 무엇을 자현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형상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장무상망‘(長毋相忘) 꿈꾼다.
 그의 작품에서는 천년의 향기를 품은 소나무의 세한절의(節義)를 가르친 남농선생과 도촌 선생 그리고 전정(田丁) 박항환 화백의 인문철학이 깃든 샘물 세례를 통한 산림을 가꾸어 우뚝 서게 된 것으로 불 수 있다. 모든 강은 고향으로 흐른다. 임농은 진도군에 소중한 작품들을 기증하면서 영원한 예술농사의 무릉과 도원의 주인이 된 것이다.(박남인 아트컬렉션)

 진도는 어떤 섬인가
 
 *진도는 결코 비옥한 땅이 아니다. 그 많은 섬 중에서 들이 발달되어 전답이 제법 개간되어 주민들이 먹고 살기에 크게 궁핍하지는 않은 섬이었다. 민물로 여기저기 까끔에서 흘려내려 하천을 이뤄 바닷물과 만나 물고기 맛이 유별나게 좋아 여기저기에서 유민들이 찾아들었다.
 놀이가 발달되고 예술에 대한 관심도 높은 편이었다. 유배자들의 영향도 있었다. 동네마다 서당이 들어서고 농악 풍물패가 번성했다. 바다에서는 미역과 다시마 돌김, 톳이 많았다. 개옹을 따라 여기저기에 개맥이를 쳐 숭어, 농어 등을 잡았다.
 밭에서는 구기자와 면화를 재배하였다. 70년 전 까지만 해도 진도구기자는 전국에서 최고의 장수식품으로 유명했다. 면화는 커다란 소득원으로 지금도 의신면 만길재 아래에는 문익점을 기리는 비각이 남아있다. 섬치고는 제법 재화가 모이는 곳이었다. 벼슬길이 막히면 예술를 탐하기 마련이다. 중선 중기 이후 중인 서얼들이 지향했던 것이 역관 의술 도화서 화인, 과학자 장사꾼이었다.

 

 진도는 흔히 ’보배의 섬‘ ’바다의 오아시스‘라고 흔히 부른다. 과연 그럴까? 진도의 역사를 되살펴보면 피눈물이 곳곳에 베어있다. 조선왕조의 공도화정책에 따라 87년 동안이나 고향을 떠나 떠돌이생활을 해야 했다. 예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노래가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씻김이요 다시래기가 되었다. 들노래가 되고 산에 가면 산타령, 바다에서는 뱃노래가 되어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고자 했다. 그 연작시가 바로 진도아리랑이다. 여기에 진도홍주가 곁들이지 않을 수 없다. 집에서 식구처럼 키우는 진돗개는 주인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앞장을 섰다.
 진도에서 집주인의 문화 척도를 재는 방식
 명량의 바다를 건너가 보라. 진도에는 집집마다 서화가 걸려있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구색을 맞춘 액자가 눈에 띈다. 병풍도 꼭 마련하여 관혼상제때 요긴하게 이용하였다. 이게 진도사람들의 자부심이다. 벼슬길이 가로막혔지만 누구보다도 풍류를 즐겼던 이 남쪽섬 사람들. 그들은 자유인이었다. 전라도 갯사람 조르바였다. 은근히 착취와 편견을 누적해온 봉건제도와 중앙정부를 외면하였다. 노비도 양반지주도 없는 평등사회. 섬을 소유한 자는 있어도 섬을 이용하는 이는 당연히 진도의 어부들이었다. 이를 금하자 조도 맹골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항소를 했다.
 전쟁이 지나가고 진도사람들은 칼과 창을 들지 않고 붓을 들었다. 더 깊은 섬으로 배를 저어 무릉의 어부가 되었다. 그드리라고 바다를 누비는 해상왕국의 전사가 되고싶지 않았겠는가.
 임농의 그림에는 시가 그득하다. 시경시다. 나무들과 계곡물이 시를 읊는다. 이니스프리의 꿈을 쪽밫으로 풀어놓는 다도해 섬 섬 섬들. 학고 김정호 선생은 이미 섬사람들의 애환을 다믄 르포 연재를 60년대 후반부터 신문에 보도해 큰 반향을 불러들였다. 라배도와 독거도. 거차군도 슬도 청등도 구멍혈도 방아섬 관매도 하늘다리. 돌미역같은 삶이 그곳에 있었다. 임농도 정명돈 화가와 많은 진도출신 화인들이 기꺼이 찾아 풍경과 섬사람들의 삶을 때로 거칠게 따뜻하게 화폭에 담았다.
 등시만 해도 등대도 없는 섬들이 많았었다. 조난사고가 나면 그냥 황천길이었다. 파도에 떠밀리며 무동력선 위에서 가슴을 쥐고 쓰러지면 누구 하나 달려올 구조대도 의료진도 있을 리 없었다. 지금은 보건진료행정이 곳곳에 미치고 응급환자를 헬기로 실어 인근 목포 큰 병원으로 옮기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으니 격세지감이 절로 떠오르게 한다.
 임농 화백은 대작을 즐겨 그린다. 인왕재색도나 안견의 몽유도원도, 황공망의 부춘산거도를 보는 듯 보는 이를 심취하게 만든다. 전정 화백이 자연의 내적 운율과 우주의 결과 숨결의 조화와 새로운 질서를 찾아나선 구도의 여정에 있다면 임농은 또 다른 수묵농사의 명장을 추구한다. 에로부터 시는 그림을 지햐하고 그림은 시를 품는다.
 진도의 화인(畵人)들은 모두가 시인이다. 인문주의자들이다. 갈데없는 휴머니스트이다. 누구나 그 열정이 천지에 스민 휴화산이다. 임농의 그림에는 춤사위가 흐른다. 여백은 흰 수건이 되고 백양나무는 젊은 아낙네의 하얀 팔뚝, 맑은 물은 흰치마폭이다. 살풀이 수건춤이다. 한바탕 흐드러지다 산사의 모연(暮煙)이 피어오르듯 고깔쓴 무녀의 신탁(神託)이 가득 퍼져나간다.
 그의 그림은 자연풍경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이 중심에 있다. 산과 바다에 에워싼 향토의 오랜 공동체 정서가 그를 풍부한 교감과 친화력을 키워 사회적 인망과 위상을 얻은 것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그는 발품이 넓고 예술계의 큰(?) 손으로 불리고 있다. 진도 삼막리 농촌에서 태어나 스스로 재능을 끊임없이 연마하고 정진하여 오늘의 임농이라는 대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선배 스승들의 조력도 있었지만 그 자신의 그런 흔들림없는 한 길을 고집해온 결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제 그의 소중한 소장 작품들은 더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서게 될 것이다. 앞으로 진도군이 계속해서 예향의 아름다운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품격있는 전시관 및 시설 들이 품격있게 들어서는데 혼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예술품도 브랜드가 되어야 그 가치가 한층 빛나기 마련이다. 두루마리로 장롱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다듬지 않은 화씨벽이 될 뿐이다. 대단한 수집가였던 손보기씨는 국보 세한도를 국가에 그증하였고 삼성가는 고 이건의 컬렉션 수많은 작품을 내놓아 뒤늦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솔선하였다.

 시창청공 귀거래사를 꿈꾸며
 진도출신 예술작가들의 연이은 작품기증은 또 다른 우리만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의 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도가 더 보배로운 섬이 되기 위해서는 그 어느 곳보다도 깨끗한 섬 청정바다와 오염원이 없는 산과 들을 가꾸어가야 한다. 하늘이 내린 그림이 진도아닌가.
 2019년 전남도청 윤선도홀에서 열린 초대전 작품들은 매우 신선하고 기운생동한다. 마치 박병천의 육자배기나 노부희 명창의 ‘배 띄어라’ 소리가 금방 울려나올 듯, 양길순의 도살풀이 춤사위가 흐르고 계곡물은 둥둥 진도의 천하 명고 장성천과 박태주의 북소리를 담고 있다. 때로 삼막리대숲에서 부는 바람속에 박덕인과 박종기의 대금소리가 들린다.
 임농 화백이나 앞서 기꺼이 고향에 작품을 기증한 작가들 중에 또 누군가는 고향에 돌아와 단원 김홍도처럼 안빈낙도 시창청공의 유유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의재 허백련, 소전 손재형, 금봉 박행보 등이 모두 시창청공(詩窓淸供)으로 제를 삼아 작품을 남겼다. 모두 그 품격이 높은 고절한 작품들이다. 소전은 유달산 지인의 산장에서 벗들과 만취하여 그렸다고 한다.
 옥당청품은 선비에게는 사치스럽고 서재의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 속에서 묵향(墨香)에 잠겨 자족한 심경으로 실사한 스케치를 펴놓고 모처럼 물아일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서재이자 화실의 청아한 기운을 채운다. 엣사람들은 서재인의 조용한 즐거움을 '서생여사'(書生餘事)라는 진솔한 문구에 담는 것을 즐겨하였다.
 단원 김홍도는 조선 후반기 경기도 안산의 한적한 바닷가 포구 성포리에서 태어났다. 단원만큼 당대의 풍속과 서민들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림에 담아낸 화가는 없었다. 그는 직접 사람의 마음과 땀과 해학을 그려넣었다면 임농(林農)은 자연이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시대 사람들이 지향하는 마음을 빠르게 또는 가까운 듯 거리를 두며 은근히 시정이 점층으로 스며드는 관계와 소통을 이루는 긴밀한 구도를 형성한다.
 그의 여정은 아직 멀다. 바다는 늘 푸르고 산은 주인이 없다며 직소가 아닌 직소로 부른다.
 -박남인, 직소의 수묵세계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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