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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박영관, 「옥봉 백광훈 교유시」 펴내
매헌 박영관, 「옥봉 백광훈 교유시」 펴내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07.1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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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좁으니 소리 내 울 곳이 없구나"

뜻을 가진 벗이여! 땅이 좁거든 오직 사유를 넓혀야 하리.

‘자연에 묻혀 오직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한 생’

옥봉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은 한 시대를 풍미한 또 하나의 걸출한 시인이다. 손곡 이달, 고죽 최경창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매헌 박영관(진도문화원 부원장), 시인이자 문학박사가 조선시대 삼당시인으로 불렸던 옥봉 백광훈의 시세계를 연구한 역저 『옥봉 백광훈의 교유시』를 펴냈다. 이 책에는 “옥봉 백광훈과 교유한 인물들에 대해 약술하였다”고 밝혔다.

「저녁놀 비낀 강에 피리소리(夕陽江上笛)

가랑비 속 강 건너는 사람 있네(細雨渡江人)

남은 울림 아득히 간 곳 없고(餘響杳無處)

강가 꽃나무마다 봄이 왔구나(江花樹樹春)」

<옥봉시집>에 전하는 시 <능소대 아래 피리소리를 들으며(陵宵臺下聞笛)>이다.

옥봉 백광훈의 초상. 백광훈과 더불어 <관서별곡>의 저자인 큰 형 백광홍, 문장에 뛰어난 둘째 형 백광안, 종형 백광성 등 한 집안에 네 명의 문인이 나왔다하여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으로 유명하다. 아들 백진남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군량과 의병을 모집하는 활약을 펼쳐 <난중일기>에 ‘백진사’로 기록된 인물이다.

옥봉(玉峰)은 전남 장흥 출생으로 해남에서 자랐다.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로 훗날 정철의 <관동별곡>에 영향을 준 <관서별곡>의 저자 백광홍이 큰 형이다. 어려서는 문신 이후백에게 배웠고, 22세에 진도로 귀양 와 있던 노수신을 사사했다. 1564년,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더 이상의 과거시험도 포기했다.

처가인 해남 옥천면 원경산 옥봉 아래 ‘옥산서실’을 짓고 시를 쓰며 은거했다. 열 살 무렵 문재를 인정받고 앞길이 밝았던 백광훈, 지방의 미미한 양반가문 출신으로 재산이 많아 호의호식할 처지도 아닌데 왜 출세를 포기하고 뜬구름 같은 시인의 길에 들어섰을까?

「지난 왕조의 절터에 가을 풀(秋草前朝寺)

남은 비석에 학사의 글(殘碑學士文)

천년을 흐르는 물(千年有流水)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을 본다(落日見歸雲)」 옥봉의 시 <홍경사(弘慶寺)>.

율곡은 옥봉의 시를 ‘맑음’(淸)이라고 평했다. 백광훈은 시문뿐 아니라 명필로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영화체(永和體)는 독보적 경지를 이뤄 해동필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1572년(선조 5) 명나라 사신의 접빈 책임을 맡은 노수신이 시문을 응수할 인물로 해남에 은거하던 제자 백광훈을 불렀다. 관직에 있지는 않았는데도 제술관 임명을 간청하여 허락을 얻은 것이다. 스승을 따라 의주에 가서 사신을 맞았는데 중국 사신 일행이 그의 시와 서예를 보고 깜짝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의 문재를 인정한 조정에서 수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41세 되던 1577년 선릉참봉에 제수되어 첫 벼슬에 올랐다. 이이, 송익필, 최립, 이산해, 양사언, 이순인, 하응림 등과 무이동(武夷洞)에 모여 교류하여 세간에서 이들을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렀다.

정철은 <송강집>에서 ‘옥봉의 문장은 빼어남과 맑음을 기개로 하고 있고 청명한 시가와 오묘한 필법은 으뜸가는 재주다. 동이 술로 글을 논할 때 언제나 칼날처럼 서늘하였다’고 평했다. 신흠은 옥봉의 시를 “기는 완전하고 소리는 맑고, 색은 옅으면서 예스럽고, 뜻은 바르면서 법도에 맞다”면서 그의 시는 ‘천득’(天得)하였다고 극찬했다.

오직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옥봉은 1582년 참봉으로 재직하면서 병을 얻어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6세. 경제적 궁핍으로 잠깐 낮은 벼슬에 나아갔을 뿐 그는 한 생을 시와 더불어 자연에 묻혀 살다가 갔다. 그는 오언절구 116편 137수, 칠언절구 199편 231수, 오언율시 72편 79수, 칠언율시 34편 37수, 오언고시 16수, 칠언고시 14수로 총 451편 514수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교유시는 증(贈)이 67술 가장 많다. 사후 16년만인 1608년, 아들 진남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유고들을 정리 수습하여 절도사 윤안성이 <옥봉시집>을 간행했다.

저자 매헌 박영관은 “도움을 주신 조선대 권순열 교수님, 서울대 국문학과 이종묵교수, 박병익 박사, 퇴직 후에 고향에 돌아와 한시와 산책하며 한문서예로 배움의 길을 열어주신 선생님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고 했다.(명성서림)

또한 “필자를 오롯하게 키워주신 외할머님과 어머님의 헌신과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두 분의 영전에 이 글을 바친다”고 매헌정사에서 썼다.(박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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