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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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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19.06.1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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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래기와 기생충 이야기

2세대로 새로 장착된 정기발표회 ‘눈길’

세상의 기생충 ‘공공의 적’은 누구인가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

이 간절한 소망은 실망스럽게도 어느 경전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내 삶속에서 이뤄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매우 부정적으로 주절거리게 된다. 그래. 광고 카피 한 줄에 감동을 먹을 수는 없는 것. 나는 누구(박사장)네 집 딸이거나 집 아들일 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숙주인줄 알고 살아간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성(姓)과 이름을 붙여 받는다. 부모도 당연히 정해져 있다. 3대독자라고 아무리 으스대며 울어봤자 보자기 속의 아이에 불과하다. 성장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면 누구는 좌절하거나 어떤 이는 이미 주어진 조건에 기대여 숙주노릇을 하게 된다.

어느 논문 제목에서 후설은 “살아있는 현재의 세계와 몸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주변세계”라는 알 듯 말 듯 보행의 중요한 경험, 곧 우리가 우리 몸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데 필요한 경험으로 그리고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우리 몸은 ‘늘 여기에 있음’의 경험이라고 했다. 나는 걷기 위해서 영화를 보러 갔다. 몸과 여기. 몸은 곧 실존이다. 운명이다. 섬 무속에서는 몸이 없는 영혼은 혼과 백으로 나뉘어 허공을 떠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떤 인연을 만나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이 뻔한 줄거리가 바로 진도의 ‘다시래기’이다.

사람은 하나의 나무이다. 걸어 다니는 나무. 끊임없이 사유하는 나무. 어떤 사람은 꽃을 피우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다. 나무와 나무가 연결되어 성장하면 이를 ‘연리목’이라 한다. 뿌리와 뿌리가 얽히면 연리근이 되고 가지가 서로 닿아 수액을 주고받으면 연리지라고 부른다.

나무는 비록 그 자리에 머물지만 그 씨앗들은 천지간을 돌아다니다 제 자리를 잡는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요즘 영화 ‘기생충’이 대단한 집착력을 내보이고 있다. 그럭저럭한 내 영혼의 허술한 사고를 여지없이 파고드는 예리한 통찰력(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빨리 자본주의의 계단 오르기에서 물러서고 햇살에 눈이 멀지 않으려 미리 자포자기 한 것은 아닐까? 자기보호 반응은 겨우 비닐로 견디며 우리들의 삶은 늘 반지하의 암울한 각도에서 블랙코미디의 각본을 따라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불쾌하지 않게 배려하며 통렬하게 증명해준다. 그래 다혜야. 24번이 틀릴 수도 있어. 인생에서 한 문제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는거야. 어떤 형상들은 꿈이 되거나 블랙홀이 되기도 한다. 괜찮아. 자의식마저도 금방 주입시켜주면 안전하거든 응? 모든 스크랩은 포장재에 불과하다. 집사는 ‘집사’라는 포장재가 매미의 날개라고 꼬집는 의외로 부드러운 시선. 봉준호는 분명 테이프를 돌리고 있다. 그도 거대한 기계의 부속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포자기 할 때 담대해진다. 대패질이 끝난 목재가구에서 미네랄의 향을 킁킁거리듯이.

죽음의 냄새는 도처에 있지만 죽음의 방정식은 아주 간단하게 풀리기 전까지는 너무 많은 황소의 길을 숨겨놓는다. 미노스궁을 누구나 꿈꾼다.

대한민국 무형문화재 81호 진도다시래기 발표회를 먼저 보고 칸느에서 수입된 ‘기생충’을 맛본다. 다시래기는 연희극이다. 애초에 대본은 없었다. 어떤 ‘계획’은, 기생충 영화처럼 ‘계획’은 더더구나 있을 리가 없었다. 한바탕 먹는 것이 중요했을 뿐이다. 다시래기는 상갓집에 가서 마을 주민들로부터 인정을 받고서 아주 걸판지게 상주의 ‘애달픈 정서’를 달래주는 놀이로 모처럼 돼지고기와 닭죽을 얻어먹는 과정이다. 중이 동네 유부녀와 놀아나고 그 남편 풍수 점쟁이는 진도개가 새끼 났다고 경을 외러 돌아다닌다.

이런 풍자는 유난히 진도에서 성행하였다. 조선 말 까지. 그 저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벼슬길이 제도적으로 막혀버린 섬사람들. 사회복지는커녕 온갖 과제를 엮어놓은 수탈. 거주이전의 자유도 박탈당한 무당박수들은 삼별초 시절처럼 그들만의 사회공동체를 꿈꾼다. 지하세계의 하룻밤의 연회장과 같은 상갓집 다시래기판. 풍경이 흔들거리듯 내 마음도 그렇게 흔들거린다. 기족의 기원이 별거더냐. 못에 찔린 도마뱀 남편을 버리지 못하고 먹이를 입에 물고 돌봄이를 하는 암컷 도마뱀의 일화가 지하방을 멤돈다. 모르스 부호처럼.

요즘 “니들 내 덕분에 산다.”라는 갑부들의 갑질이 갈수록 늘어난다. 골프채가 유흥장에서 춤을 춘다. 1만 명, 2만명을 순전히 내가 살려먹는다는 기업가들. 이 게으른 것들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이야. 그 글로벌한 오만함은 대기업의 노동자 직원들을 파리나 기생충으로 멸시하며 사회구조 계단의 각도를 아슬아슬하게 치켜 올리려는데 혈안이 된다. 그들에게도 다송이같은 사랑이 푸른 그늘을 드리우기도 한다. 그들은 티브이 카메라 앞에서, 강남스타일 주간지에서 칸느영화제 주연상을 웃도는 연기를 내보인다. “나는 누구보다도 독실한 애국자입니다!” 그 어떤 난관도 오직 사랑으로.

남쪽나라 다시래기판은 애초부터 치밀한 각본이 없다. 그런데도 모두가 승자다. 태어나는 아기도 처음부터 축복을 받는다. 버젓한 불륜은 종족번성의 활력소 그 이하가 아니다. 봉사가 맡는 냄새는 격이 다르다. 모든 것이 계획에서 실행되어도 안심을 하지 못하는 계단 위의 족속들과는 그 칼의 쓰임새가 애초에 달랐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생충임을 자주 까먹는다. 다시래기판의 가상제로 착각하면서. 택시운전사가 행방불명 수명지배자로 전국에 알려야 한다는 지만원. 가장 건실한 자수성가 아이티분야 CEO. 제 가슴속의 동굴을 슬쩍 도려내 숨긴 아티스트 건축가의 지하공간. 온 몸을, 미리 와 기다리는 미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싶은 반지하방의 가장. 그에게서 언뜻 ‘살인의 추억’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은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한국의 자본주의. 일면 가족근본주의. 정원의 나뭇잎들은 수시로 시를 속삭인다. 모르스 부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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