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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블루오션/ 진도바다의 섬을 찾아서
남도의 블루오션/ 진도바다의 섬을 찾아서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09.05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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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처럼 모여앉은 154개 오아시스 진도 ‘조도’

  “나도 저 새섬들과 함께 천년의 비상 꿈꾸어볼까”    섬마다 전설이 옹기종기 서린 새섬무리 낙원     19세기 초 영국 해군이 군사기지로 탐내    돌미역에 멸치, 모자반·톳 등 영양 높은 해조류 풍부   

                                                                   도리산 전망대 (진도군청 제공)

 “하늘에서 귀양을 온 섬과 신선들이 사는 것”
 신비의 섬 진도에서도 가장 보배로운 섬들리 보석처럼 수놓은 다도해에 자리잡은 진도군 조도. 돌미역 이야기면 침을 튀기며 자랑을 그치지 않던 조도(鳥島)사람들. 그러나 이 섬 이야기를 하려면 아직도 슬픔이 앞선다. 지난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참사 해역이 바로 앞이기 때문이다. 지구사람들의 눈물을 쏟아내게 했던 팽목항에서 불과 8~9㎞밖에 떨어진 곳 조도(鳥島). 새들의 섬이 정작 절박할 때 날아오르지 못한 아이들. 조도면은 대한민국에서 면 단위로는 섬이 가장 많은 곳이다. 하조도를 비롯한 유인도 35개, 무인도 119개 등 모두 154개나 되는 섬이 옹기종기 모여 조도군도를 이룬다. 면 소재지인 하조도가 이 중 가장 크다. 상조도와는 연도교가 이어진 지도 오래다. 늘 섬 생활이나 외부와의 교통편도 모두 내도 하조도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조도와 관련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19세기 초 영국 함대와 관련된 것이 있다. 지금부터 200년 전인 1816년. 청나라 위해(威海. 지금은 결기도와 매일 여객선이 오간다)에 갔다가 제 나라로 돌아가던 영국 함대 3척이 이곳(외병도)을 잠시 들른 적이 있다. 함대 중 리라호 선장바실 홀)은 지금의 상조도 도리산 전망대가 서 있는 곳에 올라 주변을 살폈다고 한다. 작은 섬들이 마치 새가 모여 있듯이 곳곳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감탄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간 뒤 보고서를 써서 이곳이 “동양에서 항구 건설에 가장 좋은 후보지”라고 극찬했다.
 조도란 이름이 붙은 사연도 새가 모여 앉아 있는 모양새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선장 바실홀이 남긴 <항해기>(1818년)엔 이런 구절이 있다. “산마루에서 주위를 바라보니 섬들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섬들을 세어보려 애를 썼으나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20개는 되는 듯했다. 경치는 황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조도(주로 현재의 여미와 율목, 섬등포. 동구리)에 사흘간 머물면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조도 말과 생활습관을 기록해뒀다. 자기네들 마음대로 섬의 이름도 붙였다. 하조도는 앰허스트섬, 상조도는 몬트럴섬, 외병도는 샴록섬, 내병도는 지스틀섬 등이다. 이처럼 조도는 일찍부터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탄 섬이 되어버렸다.
 그로부터 70년쯤 지난 1885년(고종),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뒤엔 군사적 요충지로 조도를 중심으로 한 진도 일대를 정식으로 빌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조선의 응답(흥선대원군)은 진도를 ‘진도도호부’로 승격시켜 쇄국(鎖國)의 길로 들어간다. 만일 당시 조선 왕실이 영국에 진도 일대를 내주었다면, 지금의 홍콩이나 마카오와 같은 운명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하지만 인간은 상상력을 먹고 산다. 우리는 꿈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진도는 그 자체가 꿈이요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조도 어부들이 조기잡이를 하며 부르던 ‘닻배노래 모습)
 구멍 통과해야 오를 수 있는 구멍바위
 조도의 역사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 하조도에 처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건 1700년대 중반으로 알려져 있다.(이해준 공주대 명예교수) 진도군 의신면에서 인동 장씨 장동보란 사람이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훨씬 이전 시기의 흔적도 남아 있긴 하다. 읍구 고개에 지석묘 3기가 남아 있고, 유토동네 앞엔 선돌도 있다. 조개무지도 있었다. 이 일대에서 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점에 미뤄볼 때, 적어도 하조도의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조도 신육(신전 육동) 리 입구에는 고려 시대 고분도 있고, 조선 중기엔 남도 만호진 별장이 배치돼 신금산이 돈대(조도관방)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조도 돈대산 구릉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면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 장죽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맹골수도로 가는 해로이다. 등대 앞바다 물살이 요동치며 세차게 흘러가는 광경은 놀랍만 하다. 조류의 세기가 어찌나 센지, 진도대교 울돌목과 호형호제를 거부할 정도다. 하조도 등대는 목포와 제주도, 인천으로 향하는 삼거리이자 분기점으로, 등대 앞바다는 여객선과 화물선, 멸치잡이 어선들이 쉴새없이 오가며 북새통을 이룬다. 1270년에도 인천 강화도에서 서해안을 거쳐 3개월여의 항진해 1천 여척의 배가 진도로 들어온다. 진도 고군면 연동마을애서는 주민(한석호 도에가 등)들이 자발적으로 그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해마다 열고 있다. 바로 뒷산이 용장성 성황산이다.
 조도바다는 봄부터 진도연안에서 나온 꽃게잡이·멸치잡이 배들이 뿜어내는 불빛이 장관을 이룬다. 꽃은 곶(串)이다. 하조도 등대는 1909년 2월 일본이 조선을 수탈할 목적으로 세웠으나, 관광지로 거듭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하조도엔 산이 두 개 있다. 최고봉은 동쪽에 있는 신금산(234m)이고, 서쪽 끝에는 돈대봉(231m)이 있다. 돈대란 높은 언덕에 옹벽을 쌓은 곳이나, 성벽을 쌓아 왜구와 적의 침입 등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던 곳을 말한다. 이곳에서 봉화를 올려 다른 지역으로 위험을 전하는 구실도 했다. 손가락바위는 켜켜이 쌓인 퇴적암 덩어리로 돼 있다. 정면에서 보면 얼핏 엄지손가락 모양처럼 보이지만 세 개의 봉우리가 의좋은 삼형제처럼 달라붙어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손가락바위의 다른 이름은 일명 구멍바위. 통나무 사다리를 타고 바위에 올라선 다음에 구멍을 통과해야 바위 정상에 이를 수 있다. 바위에 난 구멍을 통해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와 섬들은 잠시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게 했다. 산길을 계속 걷다 보면 지천으로 피어 있는 예쁜 들꽃들이 반갑게 맞이하며 자꾸 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희고 노란 들꽃이 앞다퉈 피어 있으니 알프스의 여름 못지않은 절경이다. 돈대봉 정상에서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와 투스타바위 밑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읍구마을로 가는 방향을 따라 접어들면 숲길을 지나 돌무더기가 있는 작은 봉우리 넘어 마침내 신금산 정상에 다다른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진도토요민속여행 공연모습)
 흔들리며 피는꽃 ’진도‘는 향기롭다.◇남종화의 본향 운림산방(雲林山房)=“노치(老癡. 요즘으로는 중년 50 초반이다)가 한가로이 고향의 옛 동산에 돌아와 지내니 만 가지 사념(思念)은 모두 사라졌다. 오직 한 개의 소나무 베개를 옆에 두고 있으니, 몇 권의 책들은 한쪽에 치워 놓은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김영호 편역 ‘소치실록’(小癡實錄) 서문당 刊)
 소치(小癡) 허련(1808~1893)이 고향 진도로 돌아와 첨찰산 자락에 화실 ‘운림산방’을 지은 때는 1856년, 그의 나이 48살 때였다. 소치의 행적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데 자서전인 ‘소치실록(實錄)’을 후세에 남겼기 때문이다. 원방각을 이룬 연지(蓮池)에서 바라보는 운림산방은 첨찰산과 어우러진 한 폭의 선경(仙境) 그 자체다. 나대경의 시 ‘소년에게 여름은 길고’가 절로 떠오른다. 인기척에 연못 비단잉어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연못 중앙의 동그란 작은 섬에는 배롱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있다. 소치는 매화나무와 백일홍, 자목련 등 갖가지 화훼(花卉)들을 먼 곳에서 구해와 집 주변에 심고 길렀다고 한다. 1839년 음력 8월, 추사는 첫 대면한 허련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화가의 삼매(三昧)에 있어서 천리길에 겨우 세 걸음을 옮기어 놓은 것과 같네.” 소치의 서화실력은 나날이 늘었다. 추사는 원나라 화가 대치(大痴) 황공망을 염두에 두고 소치라는 호를 지어주었고, “우리나라의 누추한 습관을 깨끗이 씻어 버렸으니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을 것입니다”라며 극찬했다.

                                                                        운림산방 소치

소치는 널리 화명을 날리면서 헌종의 부름을 받고 5차례나 궁궐에 들어가 어연(御硯)에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운림산방은 200여년 화맥(畵脈)의 산실이다. 소치의 뒤를 이어 2대 미산(米山) 허형, 3대 남농(南農) 허건·임인(林人) 허림, 4대 임전(林田) 허문, 5대 허진·허재·허준, 허청규 등 200여 년 동안 5대가 화맥을 이어가며 한국 근·현대 회화사의 장대한 산맥을 이뤘다.
 ◇구름도 쉬어가는 운림에서 득도의 길로 ‘세방 낙조’=“나는 알았네/ 세방리에 와서/ 섬과 섬이 저문 하늘을 내려 받아/ 바다의 무릎에 눕히는 순간/ 천지는 홀연히 풍경이 되고/ 홍주빛 장엄한 침묵이 되고/ 어디선가 울려오는 아라리 가락에/ 일렁이며 잠겨드는 섬의 그림자/ 때로는 꿈도 꽃이 되는가/ 저 놀빛에 붉게 젖어/ 한 생에 황홀한 발자국을 찍네.” 세방 전망대 오른쪽 동그란 돌에 새겨져있는 진도출신 하순명 시인의 ‘세방낙조’이다. 왼쪽부터 각흘도, 곡섬, 솔섬, 잠두도, 가사도, 장도 등이 바다에 흩뿌려져 있다. 주지도(손가락섬), 양덕도(발가락섬), 방구도와 같은 재미난 이름의 섬들도 자리하고 있다. 세방리(細方里)라는 지명도 독특하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방처럼 생긴 작은 땅에 자리한 동네’라 해서 속명이 ‘시방’이었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마침내 해넘이 시간, 탁 트인 바다와 짙어오는 섬그림자를 보며 한결 여유로워진 나를 만난다.  ‘2021 전남 국제 수묵비엔날레’가 2년 전에 이어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운림산방 일원에서 열린다. ‘오채찬란(五彩燦爛) 모노크롬’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수묵비엔날레를 통해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수묵창작의 세계가 발산되기를 기대해본다.

                                    모자반 대량 양식에 성공한, 신지식인 김향동씨
 해수욕장이 있는 신전마을엔 ‘신지식인’이란 이름에 걸맞은 해문수산 김향동씨가 살고 있다. 그는 1948년생으로 아버지 뒤를 이어 평생을 수산업에 몸담았다. 그의 부친인 고 김석두씨는 국내 최초로 미역 양식에 성공한 인물이다. 김향동씨는 한때 미역을 양식해 일본으로 수출해왔으나 처음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뚝심 하나는 알아주는 그는 이후 10년 이상을 모자반 연구에 몰두했다. 톳과 비슷한 모자반은 경상도와 제주도에서 많이 찾는 해조류인데, 초기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양식이 불가능했었다. 그런데 한 개인의 노력으로 결국 까다로운 모자반 대량 양식의 길이 열렸다. 참모자반은 성숙된 모조에서 어린(곤봉형) 배를 추출해 육상배양장에 옮겨 약 2개월 정도 성장시켜 양식한다. 참모자반은 칼슘, 당질, 회분, 비타민 등이 풍부한 웰빙식품이다. 현재 아들 김성환(37살)씨를 후계자로 삼고 모자반 양식의 대중화를 위해 몰두하고 있는 김향동(전 진도군수협조합장)씨는 신전마을 앞바다에 떠 있는 모자반과 톳의 부표를 가리키며 “푸른 바다에서 건져내는 해조류 덕으로 살고 있다”며 웃었다.
 20년 전 길이 510m 조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조도의 일상도 꽤 바뀌었다. 멸치와 꽃게 그리고 톳, 요즘에는 해풍 조도쑥이 각괃을 받고 있다. 차를 타거나 자전거 해안일주, 걸어서 상조도로 옮겨갈 수 있어 상조도까지 둘러보는 관광객이 늘었다. 옥도 출렁다리를 당장 걸어던게 하자. 좁은도에. 조도다리가 시작되는 하조도 끝자락엔 공원화가 진행되고 있다. 예전부터 이곳은 상조도와 당도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다. 이곳 도리산 주변에 바실 홀 상륙 기념공원을 조성하면 어떨까. 박지성 손흥민 커다란 브로마이드를 걸어놓고 유럽 천주교인들의 이곳 소작인들에 대한 배려 알리기, 누누군가 ‘한국의 하롱베이’라 이름붙인 조도도 이제 세월호 아픔을 걷어내고 뭍사람들의 마음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박종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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