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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다음 번에 피우면 안될까
담배, 다음 번에 피우면 안될까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19.06.10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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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담배의 값어치는?


“무게로 쳐서 은값과 같았다.”(

남아메리카 열대지대가 원산지인 담배는 한국(조선)으로 수입되는 과정에서 남만(베트남)의 상선을 타고 16세기 후반 공납방식으로 일본에 전파된다. 이후 담배는 일본 열도에 급속도로 번져 나갔고 현해탄을 건너 조선으로 전파되었다. 그 시기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담배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풀인데 그 잎이 큰 것은 7~8촌쯤 된다. 가늘게 썰어 대나무 통에 담거나 혹은 은이나 주석으로 통을 만들어 담아서 불을 붙여 빨아들이는데, 맛은 쓰고 맵다.…

이 풀은 병진(1616)정사(17) 연간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와 피우는 자가 있었으나 많지 않았는데, 신유(1621) 임술년 이래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하면 번번이 차와 술을 담배로 대신하기 때문에 혹은 연다(煙茶)라고 하고 혹은 연주9연주)라고도 하였다. 심지어는 종자를 받아서 서로 교역까지 하였다.”(인조실록 37권)

이처럼 담배가 조선에 전파된 지 십 년도 안 돼서 온 국토가 자욱한 담배연기로 물들게 되엇다. 이제 PC방을 겨우 빠져나온 담배연기는 골목길로 모여든다. 학생들이 담배를 피는 것은 이제 거의 당연지사로 인식된다. 어른들이 지나가도 보는둥 마는둥 하며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다. 학교에서도 어떻게 교육하는지 절로 연상이 된다.

조선시대 후반 담배 밀무역이 성행할 정도로 담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게 되자 농민들은 벼를 비롯한 먹을거리 작물들까지 뒤로 하고 담배를 중심으로 농사를 지어서 국가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기도 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곰방대를 물고 담배를 피워 이에 대한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조는 식후연초를 즐겨하며 특히 화장실에서의 탁월한 담배의 효과는 지금도 애연가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정조와 달리 청장관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담배의 백해무익을 강조한다.

△참고사항: 조선시대 담배의 값어치는?

“무게로 쳐서 은값과 같았다.”(비변사 등록)

“판서에게 담배를 뇌물로 주고 현감직을 매직했다.”(숙종실록)

“외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노잣돈 대신 담배를 가지고 갔다.”(통문관지)

술을 좋아하는 이들은 대개 폭사를 하게 된다. 술독이 오장 육부에 스며들어 하루아침에 썩기 시작하면 온몸이 무너지고 만다.(정약용) 아들에게 보내는 잔소리 편지.

다산은 페족의 한 사람으로서 못된 술주정뱅이라는 이름이 더 붙게 된다면 앞으로 어떤 등급의 사람이 되겠느냐 경계하여 등창 황달 등 괴괴한 병이 일어나니.

고라는 술잔.

"이덕리는 '기다'에서 농한기 유휴 인력을 활용해 차를 생산하고 국가가 전매해 국부를 쌓자고 제안했고, '기연다'에서는 금연 정책을 시행해 담배로 인해 재화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현실을 바로잡자고 했다"고 설명한다.

문인 이덕리는 1776년 4월 전남 진도로 귀양을 갔다가 1795년 영암으로 거처를 옮겼고, 결국 2년 뒤에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

그러면 이덕리는 왜 동다기라는 걸출한 서적을 남기고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까.

실마리는 이덕리가 유배된 시점에 있다. 1776년은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즉위한 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직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면서도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해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다"고 밝혔다. 9세에 죽은 효장세자는 영조 맏아들이자 사도세자의 이복형이다. 노론의 집중적 견제를 받은 정조가 불안정한 정치 기반을 고려해 어중간한 태도를 취한 셈이다.

하지만 이덕리의 형인 이덕사(李德師)는 그해 4월 1일 정조 친부인 사도세자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튿날 동소문 밖에서 극형에 처해졌다. 이어 의금부는 4월 3일 이덕사 아들도 교수형에 처하거나 종으로 보내야 한다면서 "아우 덕리(德履)는 3천 리 떨어진 진도군으로 유배 보내 안치한다"는 계청(啓請)을 올렸다.

약 220년 전에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사망한 이덕리는 동다기의 자매편이라고 할 만한 '상두지'(桑土志)라는 책도 썼다. 상두지는 다산이 편찬한 '경세유표'(經世遺表), 대동수경(大東水經), 민보의(民堡議)에 등장하는 서적이다.

문제는 상두지도 동다기처럼 후대에 다산 저술로 둔갑했다는 점이다. 정 교수는 "구한말 김윤식(1835∼1922)도 상두지 저자를 다산으로 소개한 점으로 미뤄 애초부터 잘못 알려진 듯하다"면서도 다산이 상두지를 인용할 때 이덕리가 지었다는 점을 명시했다고 지적한다.

동다기와 상두지에서 이덕리는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인다. 동다기는 차에 관한 책이지만, 핵심 내용은 차로 부를 창출하자는 것이었다.

정 교수는 "이덕리는 '기다'에서 농한기 유휴 인력을 활용해 차를 생산하고 국가가 전매해 국부를 쌓자고 제안했고, '기연다'에서는 금연 정책을 시행해 담배로 인해 재화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현실을 바로잡자고 했다"고 설명한다.

이어 상두지는 변방의 둔전 경영과 축성, 도로와 수로 운영, 화포와 수레 제도를 꼼꼼하게 정리한 군사 서적이라면서 이덕리가 국방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는 방안으로 차 전매를 제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본래는 동다기를 꼼꼼하게 교주(校註)해 학계에 소개하려 했으나, 실학자 이덕리를 드러내 올바로 자리매김해야겠다는 책무를 느꼈다"며 "이덕리가 18세기 지성사의 한 인물로 새롭게 위치 지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 교수는 책에서 이덕리 생애와 저작, 그가 차와 인연을 맺은 과정, 동다기 이본(異本) 분석에 대해 상세히 다룬 뒤 동다기 원전 교감(校勘·여러 판본을 대조해 정확한 원문을 복원하는 작업)과 주해를 싣고 여러 고서의 영인본을 부록으로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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