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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유배지 한춤」을 보고 나서
진도 유배지 한춤」을 보고 나서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10.15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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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관박사

사단법인 진도한춤보존회(이사장 김해숙, 72)는 39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스라하게 간신히 맥을 이어 온 「진도 유배지 한춤」을 고 김부자 선생의 뒤를 이어 김해숙 이사장의 절치부심으로 이어가고 있다.

진도 유배지 한춤[恨舞(한무)] 유래에 대해 민속학자 김미경 문학박사는 “조선 시대 진도로 유배 온 유배자들을 위해 진도 예술인들이 추던 춤을 계승한 것이다. 진도 사람들은 온갖 심리적 압박과 상실감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유배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춤과 노래로 함께 했다. 그때 추던 춤이 오늘날까지 진도에서는 「진도 유배지 한춤」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배지 한춤에 대한 연원을 유추해보면, 진도는 300여명의 유배자가 왔던 곳이다. 그중 대표적인 유배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1534년(20세, 중종 29) 20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29세 때인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545년 을사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547년(33세, 명종 2) 3월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진도로 이배되어 유배생활을 하였다.

진도에서 19년 동안 적거 생활을 하면서 진도의 풍속에 예속을 심어 ‘진도개화지조(珍島開化之祖)’로 불린다. 진도에 들어온 지 5년 만에 지산면 안치에 초가 삼 간을 지어 ‘소재(蘇齋)’라 이름 짓고 정좌하여 경사[經史,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연구하였다. 그가 남긴 1,449수의 시중에는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을 비롯한 1,023수에 이르는 대부분의 시를 유배지에서 지어 유배 시인으로 통한다. 노수신은 유배 생활 중에 향교 뜰의 유배대(流配臺)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고, 지력산 동쪽 거제에 있는 지씨들의 정원에서 시를 읊으며 거닐었다 한다. 진도 유배지에서 지은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에서 “마침내 깊은 겨울 홀로 지내며, 안거(安居)에서 상유를 보전하리라[兀兀遂深冬(올올수심동), 安居保桑楡(안거보상유)”라고 노래했다.

위 시는 1547년 무렵 지은 시인데 살펴보면 이가(俚歌))란 시어가 나온다. 통속적인 천근[(淺近):지식이나 생각 따위가 깊지 아니하고 얕다]한 민간 가요를 말한다. 민간 가요를 채집하여 민정(民情)을 살피겠다는 의미이다. 이 당시에도 진도지방에는 민요가 전해져 내려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민요가 있었다면 춤도 덩달아 전승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가(俚歌)가 유배인들의 한을 가락 속에 담아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한마당으로 자리매김 되어 춤으로 승화되어 「진도 유배지 한춤」으로 이어졌으리라 추정한다. 진도의 문화는 유배인들이 역사의 지하수가 되어 음으로 양으로 끼쳐 문화의 터전을 일궈냈다. 유배인들은 그들의 한을 시로 노래하였고 진도 사람들은 그 시어에 맞는 행동이 춤으로 연행되어 함께 어울리며 세대를 이어가는 역사의 지하수가 되었으리라고 유추(類推)해본다.

뚜렷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진도 유배지 한춤」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 구한말까지 천여 년이 흐르는 동안 왕족, 관료, 사대부들이 진도로 300여 명이 유배됐다. 「진도 유배지 한춤」은 그들의 삶의 모습과 한을 누군가에 의해서 춤사위로 남겨진 작품이 실낱같은 희망으로 진도에만 유일하게 이어져 내려온 춤이다.

옥주골문화복지센터 액자에 걸린 삼별초 유배지 춤의 기록을 옮기면,

<삼별초 유배지 춤>

삼국시대부터 전래 되어온 민중의 춤으로서 항상 흰옷의 단아함과 우아함 그리고 한스런 표정에서 선율이 이루어지는 전통 한국무용으로 삼별초 근거지였던 용장사 인근 마을에서 채록한 농촌 여노인들의 춤사위에서 발굴된 것이다.

주로 무속가에서 전래되어온 가무로서 인생의 죽음을 극락전으로 인도하는 몸짓으로 죽음과 고뇌, 환생하는 희로애락의 가락을 슬픈 부음에 맞추어 살풀이 형식으로 어울림을 한다.

상가에서 전래되어 이어오는 무속의 한춤으로 살아서 고뇌하는 인간사의 모습과 죽음으로 후회하는 생자의 모습, 그리고 죽은 자를 환생하여 만나는 환희의 역동작 몸놀림이 빠른 휘모리 장단에 부음 소리와 함께 가슴에 오는 전율을 느낀다.

「진도 유배지 한춤」에는 유배자들의 한과 설움을 토해내며 진도 지역민과 함께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는 모습이 그대로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지역민들은 그들의 애환을 위로하고 염려하는 간절한 마음이 춤사위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진도는 상실감이 큰 유배지역으로 자리매김되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추슬러야만 했던 삶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가슴으로 이어지는 춤사위와 반주, 구음에 이은 한과 흥이 연행되어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릿하다.

진도군에는 씻김굿, 다시래기,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등 국가지정 무형문화재와 북놀이 등의 무형문화재가 있다. 중요한 것은 모두 무형문화재라는 것인데 무형문화재가 무엇인가. 무형문화재는 사람이 중심이다. 사람에 의해서만 계승하는 것이며 유형문화재나 사적과 같이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이의 계승을 위해서는 후계자를 양성하는 전수교육이 필수적이다.

군에서는 건물을 매입하여 이렇게 전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고 연행을 위해 끊임없이 연습하는 회원들의 노력에 정감이 깊어진다. 문화는 말로만 해서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여 지역과 한 나라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김해숙 이사장은 중년까지는 사업을 하였지만 이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업도 포기하고 오로지 진도 유배지 한춤의 전수에만 몰두하고 있다. 특히 김해숙 이사장은 자비 삼천만원을 발전기금으로 기탁하여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는 데도 일조하였다. 회원들은 33세부터 78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되어 있고 회원 수가 차츰 늘어나고 있다. 「진도 유배지 한춤」의 춤사위를 홀로 연구하다가 12시를 훌쩍 넘기는 때가 허다하다고 한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 오후 2시∼4시까지를 기다리는 회원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생각하며 박수로 응원한다.

코로나19 펜데믹 시대를 맞아 우리의 전통 춤사위인 「진도 유배지 한춤」을 이처럼 애써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기에 진도 문화예술이 날로 넉넉해지고 아름다움을 더해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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