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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가족맞춤산행 1번지 / 예술과 역사가 숨쉬는 금골산
이 가을 가족맞춤산행 1번지 / 예술과 역사가 숨쉬는 금골산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11.1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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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소금강···풍화혈 구멍 숭숭

'비현실적 절경'금골은 속세 벗어난 부처의 형상 문신 이주 기록

진도는 예로부터 민속의 고향이며, 진돗개로도 유명한 섬이다. 지금도 트로트 가수 송가인의 고향인 지산면 소앵무리(小鸚鵡里)를 찾고 있다.

진도에는 첨찰산(尖察山·485m), 여귀산(女貴山·457m), 지력산(智力山·328m), 동석산(銅錫山·240m), 금골산(金骨山·195m), 남망산(南望山·164m) 등 산세가 아름답고 전망이 좋은 산들이 많다. 진도를 이루는 산줄기 진도지맥(珍島枝脈)은 진도대교 남단의 망금산과 도암산, 금골산, 고두산, 챙재, 철천산, 선황산, 상봉, 출입봉, 첨찰산, 제봉, 수리봉, 남산, 문마산, 삼막봉, 대학봉, 봉호산, 여귀산, 연대산, 월출산, 희여산, 한복산 등 고만고만한 산과 봉우리들을 지나 진도 남단의 서망항에서 끝을 맺는다.

금골산은 높이는 낮지만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조각가가 바위에 예술작품을 조각해 놓은 것 같다. 수십 길 절벽, 층리를 이룬 곳에 지붕 바위가 마치 동굴처럼 파여 있고, 동굴 안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금골산 정상 부근의 석굴에는 금골산 마애여래좌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이 새겨져 있다. 마애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이 굴속에는 늙은 스님과 상좌한 사람이 살았는데 바위 구멍에서 매일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만 나왔고 식객이 더 늘더라도 절대 욕심을 버리고 그 나온 쌀만으로 먹고 살아야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의외로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두 사람분 쌀만 가지고는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늙은 중이 화를 내며 '이놈의 구멍은 인정사정도 없더란 말이냐'하면서 더 많은 쌀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쌀구멍을 쑤셨다. 그러나 쌀은 더 나오지 않고 홧김에 쑤신 구멍만 망가지고 그 이후로는 구멍에서 한 톨의 쌀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금골산 자락에 있는 해언사(海堰寺)는 해원사(海院寺)라고도 불리우며,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기록이 없어 확인하기는 어렵다. 지금의 해언사는 태고종 소속으로 한동안 금골사로 불리어 온 절인데 주지인 지수(智洙) 스님이 옛날 이름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몇 년 전 개칭했다고 한다. 해언사는 옛날 도선국사가 3천800 군데의 사찰을 정할 때 그중 한 곳으로 정한 곳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둔전리 해언사 아래 금성초등학교 내에 있는 금골산 오층석탑(보물 제529호)은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백제계 석탑으로는 가장 남쪽에 건립된 석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성 시기는 돌을 다듬은 수법이나 각 부분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말기로 추정된다.

 

금골산은 상골산으로 불리워졌으나, 어느땐가 금골산으로 산이름이 불리워졌다고 한다. 금골(金骨)은 귀중한 물건을 뜻하며 속세를 벗어난 고상한 풍채와 골격, 즉 부처의 골격을 의미한다. 금골산의 아름다움은 속동문선 제21권 녹(錄)편에 이주(李胄)가 쓴 금골산록(金骨山錄)에 기록되어져 있다. 이주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갔으며, 1504년 갑자사화 때 사형되었다.

"중봉이 가장 높고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바라보면 옥부용(玉芙蓉)과 같다. 지맥이 남으로 달려 2마장쯤 가서 또 동으로 2마장쯤 가서 용장산(龍莊山)이 되어 벽파도(碧波渡)에 이르러 그쳤다. 산의 주위는 모두 30여 리인데, 아래는 큰 절터가 있고 이름은 해원사(海院寺)다. 굴 북쪽 비탈을 깎아서 미륵불(彌勒佛)을 만들었는데, 옛날 군수 유호지(柳好池)가 만든 것이다. 불가에서 전해 오기를, "이 산이 옛날에는 영검이 많아서 매년마다 방광(放光)을 해서 신기한 점을 보이고, 유행병이나 수한(水旱)의 재앙에도 기도를 드리면 반드시 효과가 나타났는데, 미륵불을 만들어 놓은 뒤부터는 산이 다시 방광한 일이 없었다." …중략.

금골산록은 이주가 1502년 9월 유배지인 진도의 금골산에 23일간 머물 때의 기록이다. 이주는 금골산에 머무르면서 '망헌집'에 '밤에 앉아서(夜坐)' 시를 남겼다.

금골산 산행은 둔전리 금성초등학교에서 시작된다. 교정의 왼쪽에서 서있는 5층 석탑에서 바라본 금골산은 웅장하고 기묘하게 보인다.

금골산 자락 가까이 자리한 신동마을에서 한국문인화화의 대가 금봉 박행보선생이 태어났다. 광주에 이어 진도군에 많은 수작들을 기증하였다. 시창청공의 3절을 익힌 수묵문인화의 대가로 미수에 이르렀지만 정정한 작품활동을 한다. 최소심(둔전리) 강강술래명인 평전을 쓴 김미경작가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풀무원의 산증인인 유기농 대부 김종복씨도 연산리에 계신다. 다석 유영모, 씨알 함석헌선생 정신도 만난다. 김학래 소설가, 김흥래 전 차관, 이백만 현 방송진흥사장(전 교황청대사)도 금골정기를 탄 분이다. 민선 1기군수를 역임한 박승만씨. 양인섭 전 군수도 이곳 출신이다.

멀리 조도의 가사군도와 신안군의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앞으로 금골산과 한줄기인 도암산이 전기송신탑과 맞물려 어지럽게 보인다.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10여분쯤 어렵사리 내려가면, 마치 지붕처럼 생긴 굴이 나타난다. 굴의 천정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 있다. 물의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지형인데 풍화혈(타포니·tafoni)이라고 한다. 천정의 비스듬 한 면에는 마애여래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북쪽으로는 월출산·흑석산이, 동쪽으로는 주작산·두륜산· 달마산·완도 상왕봉이, 서쪽으로는 양덕도·주지도·가사도·신의도·하의도·장산도·안좌도·팔금도·암태도·자은도가, 남쪽으로는 첨찰산이 다가온다.(편집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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