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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포신당에서 고산 윤선도 기리사적지비. 시비. 제 올려
굴포신당에서 고산 윤선도 기리사적지비. 시비. 제 올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11.2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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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회 4개 마을 먹거리 해결한 간척사업 주도한 공로 기려

 

임회면 굴포리 고산 윤선도 사적비. 사당
윤씨 종친회 전국회장

 

지난 11월 18.(목) 11시 임회면 굴포리(고산 윤선도 사당) 고산사에서 고산 감사 당제가 굴포 사적비· 시비 건립추진위원회 주관으로 열렸다.

이날 식전 마을주민들의 축하 풍물 길놀이가 열렸으며 이동진 군수를 비롯해 100여명이 참석 성황을 이뤘다. 특히 윤재갑 국회의원, 박금례 군의회의장, 김희동도의원, 박주언 진도문화원장, 해남윤씨 대종회(회장 윤영수), 고산공 15대 윤성철 종손, 윤주빈 진도종친회장· 시군 종친대표, 마을주민(굴포 이장 김병문) 등이 참석하였다.

국회의원 윤재갑

김영록 전남지사는 “고산선생은 의곡을 두어 가난한 백성들을 도우며 애민정신을 실천한 분”이라고 기리며 축사를 했다. 윤재갑 국회의원은 『고산 윤선도선생 당제 보존회』와 박기이 당제위원장, 강대홍 추진위원윤정현 진도종친회 사무국장님께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이동진 군수는 ”고산선생은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 조선가사의 대가로 진도에 머무는 동안 백동 앞 갯벌을 농토로 만들어 지역 10개마을 주민에 임대 생활개선에 크게 개선“했다고 알렸다.

굴포리 간척은 우리나라 민간간척 1호로 기록되어지고 있다. 고산 사당은 새롭게 사적비, 홍의제, 머물렀던 집터 표지석(굴포 102번지) 어부사시사비 오우가를 세웠다. 굴포리 고산선생 당제의 문화재 신청(진도군수)을 낸 상태다.

역사는 말이 없지만 풍화에 따라 인물에 따라 시대의 평가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배중손도 그러하였고 고산 윤선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진도는 반역의 당이었다. 유배의 땅이었다. 유랑민, 농어민들은 숨어있는 이상향이었다. 중앙정부 봉건제도가 및치지 않는 곳이 바로 천국이었다.

한 인물에 대한 이같은 역사적 빛과 그림자가 선명하게 대비해 볼 수 있는 곳이 고산 윤선도의 간척사업과 관련하여 그의 공적비와 사당이 세워져 있던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다. 이곳 임회면 굴포리에는 고산의 간척사업을 기념하여 만든 사당과 기념비가 있었던 곳이나 한동안 삼별초 장군 배중손을 기리는 사당이 들어서 전국의 배씨문중이 모여들어 제를 모셨다. 그러나 또 다시 고산이 본래 머물던 굴포에 돌아왔다. 고산은 일찍부터 간척을 통해 황무지의 땅을 개간하여 입안(立案)을 받아 자신의 재산으로 만든 인물인데 적극적인 간척사업은 조선시대의 인구증가로 인한 토지의 부족, 임란과 호란등 양대전란으로 인해 양안(토지대장)이 갑자기 줄어들어 정부에서 적극 간척을 권장하는 등 사회적인 요인과 고산의 안목과 개척(도전)정신도 곁들어 있기 마련이다. 다산은 공재 윤두서의 외손으로 학문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공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산은 1818년(순조18) <목민심서>에 "간척사업을 위한 방조제 및 배수문 축조 방법" 등 간척에 관한 기술을 수록할 만큼 간척에 관심이 많았다. 굴포리는 진도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마한 포구마을로 바닷가와 면하고 있지만 마을 앞으로는 꽤 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의 일부가 고산이 간척했다는 농토이다. 이곳에는 고산이 간척하기 위해 쌓았다는 제방 둑 약 300여 미터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 약 200정보가량을 간척하였다. 이곳에는 수십 년전 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고산의 간척에 대한 은혜를 기리는 동제를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굴포, 남선, 백동, 신동 마을 주민들이 모여 고산을 신위로 제를 지내왔다. 고산은 60세(1646, 인조 24)때 진도에 유배되어 있던 백강 이경여와 시를 주고받은 것으로 보아 아마 이 시기에 진도에 잠시 머물면서 간척을 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하고 있다. 고산은 이곳 굴포리에 머물면서 경주설씨를 만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고산이 이곳에 원둑(제방)을 쌓으면서 생긴 일화(전설)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제방을 쌓고 있는 곳으로 큰 구렁이가 기어가고 있는 꿈을 꾸게 되었다. 고산은 이를 이상히 생각하고 구렁이가 지나간 자리에 제방을 쌓으라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여 그곳에 뱀의 지나간 형상대로 석축을 쌓도록 하였는데 그 이후부터는 둑이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날 행사에는 임회면장 박태식, 문화해설사 장재호, 굴포이장 김병문, 전 이장 박기이, 선순규, 노인회장 강대홍, 남선 전 청년회장 강진간, 김인정군의원, 윤주빈 진도종친회장, 윤정현 사무국장이 감사패를 받았다. 이곳에 있는 굴포신당유적비(屈浦神堂遺蹟碑)는 1986년 음 4월 18일 신당을 재건하고 신당유적비와 장승을 세웠다. 또한 고산윤공선도 선생 사적비(孤山尹公善道 先生 史蹟碑)는 굴포, 신동, 남선, 백동 주민 일동이 1991년 4월 6일 건립한 것이다.(박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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