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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종화 영원한 수묵대가 남농 허 건 초대전
한국 남종화 영원한 수묵대가 남농 허 건 초대전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1.12.19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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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산방을 복원한 실질적인 3대주인

  가장 독창적인 삼송도 구도 ‘원중근 수묵산수
 “남도의 정서 형상화 고난속에서도 ’낙지론‘ 펼쳐

 남농(南農)이 왔다.
 남농기념관에는 허건의 ‘낙지론’이라는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남농화백의 화론이 압축된 단어다.  ‘낙지론’은 후한(後漢)시대의 학자가 쓴 문장으로, 허건은 이 글을 화제시로 써놓고 그림을 그렸다.  ”내가 사는 곳에 좋은 밭과 넓은 집이 있으니 산을 등지고 냇물을 굽어보며 도랑과 연못이 둘러 있다. 주위는 대나무와 나무들이 둘러싸고 앞에는 타작마당과 채소밭이 있으며 뒤쪽에는 과수들이 심어져 있다.
 걷거나 건너는 것을 대신해 배와 수레가 있고 수고를 대신해 줄 하인들이 있으며 부모님을 봉양할 맛있는 음식이 있고 처와 자식을 수고롭게 할 일이 없다. 좋은 벗들이 모이면 술과 안주를 차려 즐기고 동산 위를 거닐기도 하고 숲에서 놀이를 즐기기도 한다. 기우제 제단 아래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방안에선 정신을 가다듬고 노자의 현허(玄虛)를 생각하고 조화의 정기를 호흡하며 지인(至人)의 경지를 구한다.
 깨달은 몇몇 사람과 도를 논하고 책을 강론하며 고금의 역사와 인물을 평한다. ‘남풍가’의 우아한 곡조를 연주하고 청음(淸音)과 상음(商音)의 오묘한 가락을 연주하며, 한 세상을 유유히 살며 천지 만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대의 책임을 맡지 않고 타고난 생명을 길이 보존한다. 이와 같이 한다면 하늘을 넘어 우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제왕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부러워하랴!“ -운림산방 주인 남농
 어디서 읽은 글일까? 바로 할아버지 허 소치의 운림각도(운림산방도. 서울대 규장각 소장) 화제(나대경의 ‘신거’)가 아닌가.

   ‘남쪽에서 농사짓는 이’ 남농 허건- 허건은 할아버지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9-1892)과 아버지 미산 허형(米山 許灐, 1862-1938)의 영향 아래 전통화의 계승과 더불어 새로운 화풍을 수용해 목포화단의 축을 이뤘다고 평가된다. 화가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허건은 의재 허백련의 스승이었던 무정 정만조로부터 ‘남쪽에서 농사짓는 이’, 즉 ‘남농’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동양화부에 입선하여 화단에 이름을 알린 허건은 1944년에는 ‘목포일우’로 선전 총독상을 수상했다. 해방 이듬해(1946년)는 ‘남화연구원(南畵硏究院)’을 열어 후진을 양성했다.  아산 조방원(趙邦元, 1926-2014), 청당 김명제(金明濟, 1922-1992), 도촌 신영복(稻村 辛永卜, 1933-2013) 등 걸출한 화가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됐다. 허건은 제자들에게 ‘내 그림을 본뜨지 말고 개성 있는 자신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하는데, 제자들 역시 허건의 필법과는 다른 각자의 개성을 보여주는 중견작가로 성장했다. 또한 각자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화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이와 함께 1957년 창립회원으로 참여한 ‘백양회’를 비롯 경향 각지에서 개인전 혹은 초대전을 통해 전시활동을 왕성하게 했다. 말년에는 예술원 회원이 됐다. 전라남도 문화상(1956), 목포문화상(1960), 5·16민족상(1977) 등 많은 상도 수상했다. 전통산수를 비롯한 고사인물, 화조, 영모, 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다뤘다. 일본에서 유학한 동생 허림의 영향으로 채색 위주의 분위기 묘사에 뛰어난 작품을 제작하였다.
 

 55년 지금의 죽교동 집을 사기전까지만 해도 그는 너무 가난했다. 그리고 그 가난했던 지난날의 가슴 아픈 기억들이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는 가난의 굴레를 벗기 위해 급증된 그림의 수요에 따라 다작을 했으며, 그 결과 6·25이후 그의 필선은 좋은 의미에서 단순화되어 갔다. 단순화되었다는 것은 곧 선이 강해 졌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오히려 빠른 붓의 움직임으로 맑은 묵색과 새롭고 섬세한 문기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붓을 빨리 움직이는 그는 언제나 『붓이 굳어지면 끝난다. 언제나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대성한 화가로서 장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농과 가까웠던 작고한 청전(이상범)이나 소정은 늘 『빠른 붓으로 데생을 빨리 끝내는 것은 국중에서 남농을 당할 화가가 없다』고 까지 했다. 그는 전체의 데생을 빨리 끝낸 다음 주점을 살리면서, 태점으로 작품을 정리하는데, 산수에서 필선이 강한 피마준을 즐겨 썼다. 또한 붓끝이 뭉뚱한 붓끝으로 다양한 선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머리속에 가득한 실경의 대상은 주로 농촌풍경이나 목포해변이며, 특히 진도와 운린산방에서의 어렸을 때 기억에 남은 동심의 농촌풍경이라고 한다. 그의 선전, 특선작품인 『목포일우』역시 유달산 뒤 『뒷계』의 실경을 그린 것이다. 이와 같은 동심의 농촌 풍경은 곧 그의 작품에서 한국적인 센티멘탈로 표현되고 있다. 묵색으로 다양한 색감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필법과 그림 전체가 단순화되면서 필선이 강해지고 두꺼워져 중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남농소나무는 그 굳세고 웅자함을 충분히 맛볼 수가 있으며 이와 같은 강한 필선은 나이가 들면서부터 한결 더 단순화된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남농은 지금의 개성이 강한 스타일로 성가를 했는데, 많은 제자들은 각기 다른 자기 나름대로의 작품세계를 전개시키고 있다. 그가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내 그림을 본뜨지 말고 개성있는 자기 그림을 그려라』고 강조해온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의 전정, 임농의 작품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남농자신도 청말의 오창석이나, 일본의 소실취운, 조선의 겸재 정선, 오원 장승업 등의 그림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결코 그 그림들을 본뜨지 않고 순수한 자기 그림을 만들었다고 한다.  허건이 그려낸 ‘낙지론’은 어쩌면 너무나도 평범한 전원의 일상일 수도 있다. 비록 이상적인 선비의 은일하고 여유로운 삶이 아닐지라도, 허건의 그림에는 나지막한 민가와 배를 저어가는 뱃사공의 일화가 담겨있다. 우리네 정겨운 삶터를 낙지론에 빌려 이상화시켜낸 셈이다.

                                                                          산에 사네(山居)
        -나대경(羅大經)
 
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기도 하네(山靜似太古 日長如小年)
내 집은 깊은 산 속에 있어 매년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때면(余家深山之中 每春夏之交) 푸른 이끼 섬돌에 차오르고 떨어진 꽃이 길바닥에 가득하네(蒼蘚盈堦 落花滿徑)
문에는 두드리는 사람 없고 솔 그림자 들쑥날쑥한데(門無剝啄 松影參差)
새 소리 위 아래로 오르내릴 제 낮잠이 막 깊이 드네(禽聲上下 午睡初足) 돌아가 산골 샘물 긷고 솔가지 주어와 쓴 차를 끓여 마시네(旋汲山泉 拾松枝 煮苦茗啜之)
마음 가는대로『주역(周易)』『국풍(國風)』『좌씨전(左氏傳)』『이소(離騷)』『사기(史記)』 그리고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의 시, 한유(韓愈)와 소동파(蘇東坡)의 문장 몇 편을 읽네(隨意讀周易 國風 左氏傳 離騷 太史公書 及陶杜詩 韓蘇文數篇)
한가로이 산길을 거닐며 소나무 대나무를 쓰다듬고(從容步山徑 撫松竹) 새끼사슴과 송아지와 더불어 긴 숲, 우거진 풀 사이에 함께 누워 쉬기도 하고(與麛犢 共偃息於長林豊草間)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찰랑이며 양치질도 하고 발도 씻네(坐弄流泉 漱齒濯足) 대나무 그늘진 창 아래로 돌아오면 촌티 나는 아내와 자식들이(旣歸竹窗下 則山妻稚子) 죽순과 고사리 반찬에 보리밥 지어내니 기쁜 마음으로 배불리 먹는다네(作筍蕨 供麥飯 欣然一飽) 창가에 앉아 글씨를 쓰되 크기에 따라 수십 자를 써보기도 하고(弄筆窗間 隨大小作數十字) 간직한 법첩(法帖)·필적(筆跡)·화권(畵卷)을 펴놓고 마음껏 보다가(展所藏法帖 墨跡 畵卷 縱觀之) 흥이 나면 짤막한 시도 읊조리고 옥로시 한 두 단락 초 잡기도 하네(興到則吟小詩 或艸玉露一兩段)
다시 쓴 차 달여 한 잔 마시고 집밖으로 나가 시냇가를 걷다보면(再烹苦茗一杯 出步溪邊) 밭둑의 노인이나 냇가의 벗들과 만나 뽕나무와 삼베 농사를 묻고 벼농사를 얘기하네(邂逅園翁溪友 問桑麻說秔稻)
소 잔등에서 피리 불며 짝지어 돌아올 때면(牛背篴聲 兩兩來歸) 달빛은 앞 시내에 뚜렷이 떠오르네(而月印前溪矣)
 산정일장 산수화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조선의 많은 화가들이 ‘산거’를 이상향으로 삼아 그렸다.
 할아버지와 손자 남농. 목포에는 지금 남농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 자처하는 전정 박항환, 또 주말이면 목포를 들리는 제자이자 외소자인 임농 하철경, 모두 그립작업을 농사를 천하지대본으로 삼아 그 뜻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박남인 편집 정리)

미래를 아닌 이는 불행해진다고 햇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작가미래를 알면 좋을 것 같은가? 아니다. 빨리 죽을수 있다.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는게 일급 도사이다. 그러나 모르는척 하는게 어렵다. 입이 근질거리기 때문이다. 내 뱉어야 직성이 풀리는 기질은 도사 못 된다. 이급 도사는 아는체 하다가 명 재촉하고 만다. ‘아는 체’하고 싶은 욕망도 끊기 힘든 욕망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깨닫게 되는 사실은 영양가 없는 일에는 될수 있으면 나서지 않는게 지혜로운 태도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게 명철보신(明哲保身)이자 도가에서 말하는 경물중생(輕物重生)이다. 물질을 가볍게 여기고 자기 인생을 중하게 여긴다. 늙고 병들어야만 쉰다. 사회가 잘못되는 것을 어떻게 그냥 놓아 두냐고? 이건 처리할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정치에 뛰어들 사람들은 줄서 있다. 어느 시대에나 사회를 위해서 일할 사람은 차고 넘쳤다. 결국에는 하늘에 계신 신이 정리한다고 본다. 인도의 베단타 학파에서도 자비로운 신이 역사에 개입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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