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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方外之士 기천문(氣天門) 2대 문주 박사규
한국의 方外之士 기천문(氣天門) 2대 문주 박사규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2.01.1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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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걸음은 나는 구름이요, 한 주먹으로 魔를 타파하니…”

 

                                                                                                                  방외지사 진도인
 세간에서 ‘산중무예’로 알려진 기천문(氣天門)이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전통 무술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해 여러 대학에 기천문이라는 동아리가 결성되기도 했다. ‘보보비운(步步飛雲) 일권타마(一拳打魔)’라는 문구는 대학가 기천문 동아리의 슬로건이다. ‘걸음걸음은 나는 구름이요, 한 주먹으로 마를 타파한다’는 문구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통쾌함과 그 어떤 신비함을 느끼게 한다. 기천의 기원은 5000년 전 단군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고조선에서 시작해 고구려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를 이어 현재에 이어졌다는 것. 우리나라 상고사의 전통과 궤를 같이하는 만큼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문파다. 상고사의 중요한 경전으로 여기는 ‘천부경’과 ‘한단고기’는 기천의 이론적 배경이다. 기천은 겉으로 보면 무술이지만 한 단계 더 들어가면 한민족에게 면면히 내려온 마음 닦는 법이기도 하다.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말이 있듯 안으로는 심성을 닦고 밖으로는 몸을 닦는다. 먼저 몸을 강철같이 단련하고 그 과정에서 몸의 모든 기맥이 뚫리면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비우면 부수적으로 몸은 저절로 닦아진다고 본다. 하지만 기천은 몸이 먼저고 마음이 그 다음이다. 꽉 막힌 사무실에서 만성운동부족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기천의 몸 닦는 노하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천의 유래가 단군까지 소급된다고 하셨는데, 그걸 입증할 만한 근거가 있습니까? “문헌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문파에서 사용하는 기본예법 중 ‘단배공(檀拜功)’이라는 인사법이 있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단군배공(檀君拜功)’으로 단군에게 올리는 인사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단군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 때문에 ‘단군배공’을 ‘단배공’으로 줄여서 불렀던 것이죠. 기천에서 스승께 인사드릴 때 취하는 인사법이 바로 단배공입니다. 기천을 지켜온 역대 지킴이들로부터 쭉 내려온 인사법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기천은 단군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수박도’의 자세.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한다. 마침 문하생 2명이 박 문주에게 장중하면서도 복잡한 절차를 따라 하직 인사를 했다. 양손과 양발 끝에 기를 모아서 태산이 엎드린다는 심정으로 하는 인사로 4∼5분이 걸렸다. 인사하는 문하생의 무릎과 발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자체가 엄청난 수련으로 보였다. 저절로 단전에 에너지가 모아질 것 같았다. 박 문주는 이것이 바로 단배공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부터 무예의 전통 단절 -단군 이래로 기천이 전해져왔다는 또 다른 근거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납니다. 벽화에 수렵도가 있어요. 말을 타고 활을 겨누면서 사냥하는 모습이죠. 그 반대편에 보통 ‘수박도’라고 부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남자가 웃통을 벗고 두 손을 들어 상대방과 겨루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자세가 기천에서 연습하는 자세 중 하나입니다. 이 한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기천에서는 이 자세를 ‘범도자세(虎勢)’라고 불러요. 범이 웅크리고 있는 자세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저희도 이 자세를 많이 연습합니다. 그런데 그 자세가 벽화에 나와 있는 겁니다. 기천을 모르는 사람은 벽화를 보아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천을 아는 사람은 대번에 그 의미를 알아차리죠.

 이걸로 보아 기천은 고구려 시대에도 행해졌던 겁니다. 한쪽에는 수렵도, 다른 한쪽에는 범도자세가 그려져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고구려 남자들의 상무정신(尙武精神)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고구려 시대를 대표하는 놀이가 ‘수렵’과 ‘기천’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수렵이 일종의 군사훈련이었다면 기천은 개인 차원의 무술연마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기천 동작 하나하나는 바로 전쟁터에 투입될 수 있어요. 칼을 잡으면 곧바로 검법이 됩니다.

 
 반탄(反彈)의 민족무예 기천문(氣天門)
 십팔기(十八技)가 우리의 족보 있는 무예의 보고라면 기천문(氣天門)은 족보가 제대로 없이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내려온 선가(仙家)의 보고이다. 때때로 문화는 족보가 없이도 면면히 내려와 문화인자(文化因子)로 인하여 새롭게 재생되고 부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천문에도 권법을 비롯하여 검법과 창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며 우리 민족 특유의 단전호흡법인 기법(氣法)마저도 계승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기천문에서는 대륙의 기질과 사나운 북풍과 맞서 싸우면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삶을 읽을 수 있다. 택견이 유희적 성격이 강하였다면 기천은 살수(殺手)로 바로 이어지는 무예였다.

 ◇박사규 기천문 2대 문주가 단군에게 예를 올리는 단배공 자세를 하고 있다.
 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을 거점으로 형성된 한민족 고유의 무예 기천문(氣天門). 그동안 말로만 전해오고 귀로만 들려오던 산중무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기천은 설악산에서 수련해 오던 1대 문주(門主) 박대양(朴大洋) 진인(眞人)이 1970년대 시중에 내려옴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그동안 기천은 산에서 산으로 옮겨가면서 비전으로 전해왔는데 백두산에서 태백산으로, 태백산에서 설악산으로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왔다. 백두산 시대는 전설 같은 시대이고, 태백산 시대는 박대양 진인의 스승인 원혜상인(元慧上人)의 시대이고, 그 이전은 민족의 지킴이가 전해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지킴이는 글자 그대로 이 땅의 지킴이다. 지킴이는 민족의 위기 때마다 홀연히 나타나서 장수들을 도와주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기천문을 비유하자면 바로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옛날 백두산은 대풍산(大風山)이었다. ‘큰 바람 산’이다. 그래서 기천의 일곱 가지 보배 같은 절권(七寶切拳)에서 그 처음이 바로 대풍(大風)이다. 대풍이란 싸움에서 상대방의 몸에 바짝 붙어서 벌이는 역수(逆手)이다. 여기서 웬만한 무예는 모두 나가떨어진다. 그 다음이 풍수(風手)이다. 풍수는 반탄(反彈)의 수로 원으로 감아서 치는 것을 말한다. 반탄이란 항상 힘을 쓰려는 방향과 반대로 역근(逆筋)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목표인 합(合)에 도달하는, 공격의 탄력성을 높이는 것이다. 또 끊어서 치는 것이 아니라 물 흐르듯이 연결하며 쭉쭉 밀어서 찔러주는 솜씨는 엄청난 파괴력과 함께 언제나 예상 밖의 권법(拳法)을 하나 더 가지고 있어서 상대의 허점을 공격한다.  쉽게 말하면 반탄이란 움직이려는 방향과 반대로 먼저 움직여서 반작용의 힘을 사용하여 계속 탄력성을 잃지 않고 공격할 수 있는 원(圓)의 무예이다. 이것은 공격이 실패하였을 때 방어에도 효과적이고 다시 다른 수를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수이다. 기천에서 비연수(飛燕手)는 정말 살수(殺手)이다. 상대를 한 방에 눕히는 수이다. 산에 가면 돌제비라는 것이 있다. 돌제비는 몸집이 작지만 몇 마리가 모이면 독수리도 막아낸다. 그 돌제비가 날개를 치면서 독수리를 막아내는 것에 비유한 수이다. 이 비연수는 현재 2대 문주인 박사규(朴士奎·60세) 도인(道人)이 자신의 합기도 실력으로 1대 문주인 박대양 진인에게 승부를 걸었다가 순식간에 나가떨어지고 무릎을 꿇음으로써 기천에 입문하게 된 문제의 살수이다.
 기천문이 문주(門主)라는 직함을 쓰는 것은 중국의 소림파, 무당파, 화산파처럼 독립된 무술체계를 가진 무문(武門)임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계룡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동학사(東鶴寺)와 신원사(新元寺)로 가는 삼거리에서 신원사 쪽으로 한 100여m 올라가니 기천문으로 올라가는 팻말이 보였다. 입구에서 차로 10여분 들어가니 ‘氣天門’이라는 큼지막한 입석이 보였다. 주변에는 암자, 당집이 산기슭에 늘어서 있었다. 계룡산 동쪽에는 동학사, 서쪽에는 갑사(甲寺), 남쪽에는 신원사가 있다. 북쪽에도 원래 절이 있었지만 폐사되어 현재는 비어 있다. 북쪽을 상신리(上莘里)라 부른다. 소설 ‘단’의 주인공 봉우 권태훈(1900∼1994) 옹이 상신리에서 오래 살았다고 한다.  신원사 오른쪽에 ‘중악단’(中岳壇)’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시대 국가적인 차원에서 산신을 모신 곳이 세 군데 있었다. 묘향산의 상악단(上岳壇), 계룡산의 중악단, 지리산의 하악단(下岳壇)이 그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상악단과 하악산은 사라졌지만, 계룡산 신원사의 중악단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만큼 백두대간에서 비중 있는 포인트가 계룡산이다. 5000년 민족 정신사의 뿌리가 보존된 곳이 바로 계룡산 중악단이다. 계룡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변혁의 산은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김해 모악산(母岳山)이다. 이들 산들은 모두 평지에 솟아 있는 산이다.  박사규 문주가 계룡산에서 머무른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그는 갑사에 5년, 신원사에 2년 머물렀던 적이 있으며 여기에 ‘기천문 계룡본산’(鷄龍本山, 충남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 1구 191-1번지)을 잡은 것은 5년 전(단기 4540년 4월 24일)이다. 계룡산 일대에 머문 것은 12년째다. 바람의 무예, 가장 탄력성이 높은 무예, 기천은 선가(仙家)나 도가(道家)의 특성상 기록을 회피하고 산중비전(山中秘傳)으로 전해왔기에 오직 무예의 실증으로 민족의 주인임을 당당히 내세울 수밖에 없다. 기천문인이면 누구나 “말이나 글에 집착하지 말고 몸으로만 수행하라”는 좌우명을 잊지 않고 있다. 내가신장(內家神將)은 기천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고 무게도 형체도 이름도 없는 것에 도전하는 도반들은 처음이자 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가신장의 자세를 통해 기(氣)의 오묘한 세계에 접한다.
 기천문 2대 문주인 박사규씨는 진도 옥대출신으로 본디 서울에서 잘 나가던 의류계의 사업가였다. 그러나 늘 동경했던 무술을 찾아다니던 기천문과 만난 것이다. 그의 스승은 박대양 진인을 만나 한 수가 무릎을 꿇었다. 그 때부터 새로운 수련에 들어갔다.
 당장 계룡산으로 들어갔다. 치열한 수련과 연마의 길을 걸었다. 수많은 제자들을 길렀다. 자연스레 기천문주에 추대되었다. 방외의 고수가 된 것이다. 태양혈이 우둑 나오고 형형한 눈빛에서 금방 깊은 내공을 알아 불 수 있게 한다. 그는 부드럽다. 그러나 빠르다.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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