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8 09:55 (목)
제안 -물이 부족하다. 진도에 물 때가 온다
제안 -물이 부족하다. 진도에 물 때가 온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2.02.03 15: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물을 가져와야 농사를 짓는다

진도는 물부족지자체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진도 지방자치제 의원들은 저수지 만드는 것을 가장 큰 사업으로 여겼다. 간척사업은 진도의 일대가 지도가 변하는 일이었다.

흔히 진도군은 물이 풍족한 섬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진도는 물이 부족하다. 농사도 맑은 물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가사도는 그 전형이다. 군내호 긴척지 농수로는 여름만 되면 갈증에 시달린다. 논바닥이 갈라진다. 만호바다 물김도 민물이 절대적이다. 한국도 UN이 지정한 부부족 국가이다. 지구는 말할 필요도 없다. 난민국가들은 식수가 없어 빈국을 이루고 지중해를 떠다닌다.

조도면 가사도는 결코 아직 에너지 자립섬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작은 저수지는 둠벙이 그친다. 급수선은 그 상징이다. 가장 수원이 좋다는 의신면 작은당 아래 청용 수원지는 여분이 없는 제한된 저수지다. 회동 저수지는 그저 외진 작은 저수지에 불과하다. 탐이 나지만 임회면 용산 저수지도 수질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돼지 축사가 들어오면서 마을 주민들이 결사저지로 서명을 받기도 했다. 식수에 농업용수까지 부족하니 농민 수산어민들은 늘 불안해 한다.

금호방조재에서 진도군내 저수지 로

진도군과 농어촌공사는 장흥 유치댐 물을 끌어 오기로 했지만 남의 밭 관정이야기일 뿐이다. 금호호 농수로도 마찬가지다. 물은 생명이다. 이제 농업도 수산업도 민물이 풍붛지 못하면 더 이상 농사도 짓지 못한다. 일만 호가 먹는 다는 만호바다 김 바다농사도 물이 풍부해야 한다. 사천저수짇를 여차하면 급수로 한다지만 의신면 농사 농업인들으 생각이 다르다.

첨찰산 운장골(고군면 석현)에 수원지를 만들어놓자. 그 옆 백포농장도 살아날 것이다. 호박 모기에서 추출한 쥬라기 공룡 화석이 돌아다닌다. 화가 곽남배선생 평생의 소망 백포공원은 물이 맑다. 수량도 좋다. 저수지를 더 늘려야 한다. 조도(육동)와 관매도 상조도에도 급수시설이 들어서야 제대로 살 수가 있다 톳과 섬쑥 가공시설이 들오소렴변 육동 수원자는 유일무이한 수원지다.

진도의 섬(특히 조도면)이 진정한 오아시스가 되려면 수자원이 풍부해야 한다. 21세기는 최고의 유기농을 위한 말고 풍부한 물을 자원화해야 한다. 재활용은 너무 당연하다, 영산강에서 거대한 탱크선이 상조도에 물을 저장토록 해놓자. 곳곳에 가공저수시설을 만들어 식농수로 비축해놓아야 한다. 하조도 저수지를 가보라. 악취가 넘쳐난다. 곤우마을에도 사방댐 둠벙이 필요하다. 해수욕장이 아깝다.

나는 명지리와 맹성리 엣 관방에서 호미로 모심기를 해 보았다. 청동오리도 물이 부족허면 섬을 떠난다. 주전자로 물을 뿌리며 모종을 심던 기억. 독거도는 대한민국 최고의 품질 갯닦이 돌미역으로 청와대까지 소문이 났다. 그러나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섬한 가운데 샘이 있지만 마을 종이 울릴 뿐이다.

5만톤의 급수선이 정기적으로 입항하여 저수지를 채우자. 상조도 가사도 서거차도를 돌자. 당장 올 해부터 저수지를 만들자. 진도항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섬진흥원은 문화연구만 할 일이 아니다. 일반 급수선은 갈증만 높여준다. 마중몰도 못된다. 홍수가 ㅂ범람할 때 그 물들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나는 작년 여름에 큰 수해를 입었다. 전남도 하천공사는 도로아비타불이다. 바닷물을 민물로 바꾸는 이적이 일어나야 할까. 첨찰산 사천저수지는 단지 지나가는 물일 뿐이다. 청소년 물놀이장 주변 사방댐도 마찬가자디.

상조도 도리산 정상에 30m 마리아상을 세우자. 돈대봉에 해수관음상을 높게 세워 늘 아픔에 시달리는 섬 주민들을 치유토록 하는 기도를 하자. 도한 도리산 버실 홀의 여행기에 나는 지금도 여미마을과 외병도는 여전히 목이 마르다. 마리아상을 전신탑 주변에 세우자. 153개의 섬을 바라보는 365℃로 바라볼 수 있는 천헤의 경관지. 섬등포와 라배도 뒷개에서 우럭을 키우던 박남배씨. 서진도농협 가스배 선착장. 조도에서 나는 동백나무 기름을 짜자. 만두나무도 활용방안을 연구해 내놓자.

관사도와 진목도 소마도도 마찬가지다. 한해가 시작되면 급수선은 조도를 가야 한다. 모든 섬들이 목이 마르다. 톳과 미역을 위해 나갈 수도 없다. 지산면 부근 체도에 자수지 하나를 점지해놓자. 급수선 없는 조도는 사막을 걷는 코끼리가 된다. 진도읍 해창마을까지 밤낮으로 흘러내리던 성죽골 냇물은 성죽제에 모여 농사철에 방류하지만 축조를 해도 물이 부족하다. 위의 가축사를 옮기고 수원지용으로 대비해야 한다.

‘트롯의 여왕’ 마음이 고은 송가은의 고향을 찾는 전국의 수많은 팬들은 그 마을 앞이 개펄이었음을 알지 못한다. 넓은 개펄이었다. 갈마음수형 풍수지형이 진도에는 많다. 앵무리 수로 앞 옛 뻘밭에서 낙지를 잡고 바지락을 캐며 진도 소리를 불렀을 송순단 여사는 그 인생 여정은 얼척없이 힘들었겠지만 송가인을 보면 안다. 앵무리 수로는 민물고기잡이 명소로 전국에 알려져 있다. 갈대숲을 보라.

한마음 다잡아 천하에 인기를 누리고 ‘진도 여자와 살면 한 살림 그저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라는 속담처럼 진도 여자들은 누구보다도 억척스러운 성정을 내보인다.

송순단씻김굿

고려 후기 780년 전 삼별초 항쟁의 중심에서 끌려가 아득한 초원의 땅으로 끌려가 살다 돌아온 진도사람들. 임진왜란 당시 명량대첩의 이면에는 진도 여자들의 목숨을 건 적극적 참여와 성원이 민속학적으로 승화되어 진도 강강술래와 진도만가놀이 호상꾼 역할을 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고군면 마산 내동 왜덕산 전설과 정유재란 순절묘역의 수많은 죽음을 위로하고 묻어주는데 당시 진도 여자들의 몫은 엄청난 것이었다. 진도의 상장례 문화는 당연히 여성들이 주도하는 민속이 된 것이다.

지금은 진도사내들이 서화를 한다며 거들먹거리지만 그 먹물을 대는 데 진도 여자들은 똥빠지게 밭을 매야 했다. 산타령도 마찬가지였다. 동네 도깨비굿까지 도맡아 아귀를 쫒아냈다.

오늘날의 남도 수묵화 문화를 장착시키고 부흥케 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은 이견이 없이 소치 허련 선생을 앞세운다. 그의 후손도 화가로서 5대를 이어가고 있지만 진도 출신 화가, 서예 작가들이 전국대회 특선입상한 전업 작가가 수백 명이 배출된 지역은 오직 진도만이 있을 뿐이다. 앞으로도 그런 문화 바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운림산방

허 소치는 당시 나이 오십 세에 도성의 문화 르네상스 인연들을 벗어나 과감하게 귀향을 선택해 진도 첨찰산 아래에 조그마한 화실(雲林閣)을 짓고 살았다. 두륜산 일지암 초의가 차를 나누는 벗으로 삼았다. 스승 추사 김정희는 세상을 풍미하던 완당바람을 뒤로하고 ‘산숭해심’(山崇海深)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예산에서 생을 마치자 허 련은 진도로 귀향했다. 물을 찾듯이 운림산방을 짓는다. 소치는 평생 세속의 부와 명예에 연연하지 않았다. 또 한 분의 스승이자 꿈의 인연이었던 대둔사 일지암 초의선사의 그 어떤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선풍 소식을 얻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요즘 말로 치자면 전 국민에게 트랜드로 떠오른 ‘자연인’의 남도의 비조 중의 한 분이 소치 허마힐이었다. 운림십경은 곧 물의 십경이다. 그에게도 깊고 지울 수 없는 시련이 없지 않았다. 그토록 아끼던 큰아들로 애제자이기도 했던 미산 허은이 요절한 것이었다. 소치는 진도사람들의 여덟 가지 변속을 한탄하였지만, 그 자신도 운림산방 앞에 존경하던 집안 형님의 묘소를 쓰게 하였으며 그는 고군면 황조마을 부근 선산에 묻혔다.

살아서 운림동 석문을 오가며 송대의 시인 나대경의 ‘산정일장(山靜日長)을 읊으며 배롱나무 가지처럼 세속의 무게를 비욱 산책을 즐기며 연운 공양 조식으로 미수(米壽)에 다다르게 천수를 살았다.

예나 지금이나 진도에서 산다는 것은 누구나 ‘자연인’으로 되돌아가 사는 철학을 나누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이 마르다. 조신시대는 벼슬에 대한 제한으,로 목이 탔다. 진도는 오히려 두 번씩이나 공도(空島)가 되면서 유자밭이 되었다. 산에 낙엽이 쌓였다.

소리는 경전이자 향약이었다. 박덕인, 아리랑을 저율한 대금국수 박종기. 진도사람들은 수천 년 그들만의 원시공동체 사회를 구축하며 사람 간의 높낮이를 허물어낸 민본주의를 구현하며 이상향을 만들고자 했다. 고된 일속에서도 선조들은 유배자들에게 서당을 열어주었으며 글과 그림을 즐겨 배우고 아꼈다. 이런 바탕에서 의도인 의재(毅齋) 허백련과 소전(素全) 손재형이, 대금국수 박종기와 무송(舞松) 박병천이 민속예술계에 걸출한 거두요 명인으로 자리 잡게 되어 오늘의 ‘진도’를 이룬 것이다.

지금도 진도사람들은 목이 마르다. 옥주고을이 낙타처럼 갈증에 시달린다. 다음 진도군수는 물의 섬 물의 이상향을 만들어야 한다. 관정으로먼 먹고 살 수는 없다. 북상리 주민들 먹이던 구기자우물은 어디로 갔는가. 상정리 통정리 통샘거리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남천교나 욕실은 그 지명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시대에 맞게 차라리 역간척을 시도하자. 수원지를 찾아 진도 전역을 샅샅이 살펴야 한다. 진도에서 나지 않으면 진도것이 아닌 것이다. 군수를 꾸어다 시킬 것인가.

강강술래는 江江水運來다. 물의 때가 온 것이다. 이 충무공도 정유년 진도에 왔을 때 그 물대를 가장 먼저 살핀 것이다. 진도의 운 수가 왔다. 만호바다 물이 진도로 흐른다. 사람의 큰 마음이 흐르는 시대가 조도를 거쳐 서거차도 제주도 또는 만재도 동아시아로 항진할 것이다. 그 흐름을 아는 자가 새로운 진도군수가 된다. 몇 번이라도 녹진 전망대에 오르고 첨찰산 봉수대를 오르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