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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병마을 충제
덕병마을 충제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19.07.1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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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풍년 기원하며 병충해 방제를 위한 충제(蟲祭)

군내면 덕병리는 장승제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의외로 여러 민속자원이 보존 진행형인 마을로 눈여겨 볼 가치가 있다. 마을의 지형과 지형도 마찬가지다. 마을세도 예년같지 않지만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으며 자부심이 강한 전통을 자랑한다.

동절기의 마을신앙이 망제로 모셔진다면, 하절기에 모시는 마을신앙은 충제이다. 지금까지도 매년 제관을 뽑고 제물을 장만하여 음력으로 6월 1일이 되면 마을에서는 충제를 모셔오고 있다. 올해도 7월 3일(음 6월 1일)에 맞춰 충제가 열린다.

제관을 뽑을 때 생기복덕을 보아서 연령에 맞는 사람 중 두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대문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아 다른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제사 비용은 마을자금으로 충당을 한다. 대략 10여만원 정도 소요된다.

이웃마을인 군내면 정자리에서도 역시 매년 충제를 모시고 있다. 정자리에서는 오래 전에 마을에서 협의를 하여 충제를 모시지 않기로 하였다.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 충제를 모시는 것이 너무 미개한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충제를 그치던 그해 마을에서 부부가 독사에 물려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충제를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이 돌았다. 정자리에서는 이 일이 있고나서 바로 다시 충제를 모시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아무도 충제를 그만두자는 말을 꺼내는 사람들이 없다고 한다. 이웃마을에서 일어난 일도 중요한 경험의 하나이다.

덕병마을이 속한 군내면에서는 몇 마을만 충제를 전통적으로 모셔왔다. 예의 덕병마을, 정자마을, 용장마을, 분토마을, 월가마을 등이다. 지금은 다만 덕병마을과 정자마을만 충제를 모시고 있다. 용장마을은 2005년까지는 모셨지만, 2006년도부터는 모시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충제를 모시는 마을에서는 반드시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반촌만 예전부터 충제를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위 마을들은 전통적으로 반촌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런 점에서 충제를 모시는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충제 역시 망제에 못지않게 엄숙하다. 오히려 망제보다 마을사람들에 대한 금기는 심한 편이다. 충제를 모시는 날은 어떤 사람도 들에 나가 일을 해서는 안된다. 또 집에서 흰빨래를 하여 밖에 걸어두어도 안된다. 설혹 아기 기저귀 빨래를 하였더라도 집안에서 말려야 한다.

 

충제는 마을 인근의 달마산에 매년 모시는 충제터에서 모신다. 음력으로 5월 말일 오전에 제관과 도움을 주는 마을사람들이 충제터에 올라가 차일을 치고, 제물을 장만하기 위해 간단히 취사 설치를 했다. 준비가 끝나면 마을사람들은 내려오고 제관 2명만 제사가 모두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머문다. 제터에서 20여m 위쪽에 샘이 있다. 그 샘을 정갈히 청소를 한 후 그 주변에 화덕을 마련하여 제물을 조리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미리 마을에서 제물을 마련하여 저녁 무렵 가지고 올라간다고 한다. 원래는 저녁 10시경에 제사를 모셨다. 그러나 2005년부터는 마을에서 협의를 통해서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에 앞당겨 모시도록 했다. 제관들이 제터에 도착하면 먼저 제상을 준비하면서 제상 앞에 지방을 붙이는 일부터 한다. 지방은 “달마산지신위(達馬山之神位)”라고 적혀 있다.

제물은 간단하다. 제주, 과일, 오징어포, 생선 및 메와 탕을 올린다. 예전에는 산 닭의 목을 쳐서 주변에 피를 뿌렸더라고 한다. 또 예전에는 생선을 놓지 않았지만 지금은 제물이 너무 간단하여 추가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삶은 닭을 제물로 올린다. 제물이 진설이 되면 제관이 절을 하고, 독축을, 소지를 한다. 축문은 아래와 같다.

소지는 9장을 올린다. 소지를 올리면서는 마을의 평안과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말로 빌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제상에 올렸던 제물들로 주변에 헌식을 한다. 예전에는 제사를 모시고 나서 제관들은 하룻밤을 그곳에서 지새우고나서 아침이 되면 마을로 내려온다.

농약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이렇게라도 하여 해충을 방제하고자 했던 종교주술적 사고가 읽혀지는 의례유산이다. 물론 지금까지 충제를 모셔서 해충을 방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마을에 아무도 없다. 다만 그것을 그치게 되면 닥쳐올지도 모르는 재앙을 무서워하여 하루를 고생하여 삼백육십일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다.(최평근 기자)

덕병리 인구와 조직(놀이)

마을 앞에는 갯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었다. '솔목'이라고 부르는 이 방풍림은 어느 시기에 조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나무, 팽나무 특히 대나무가 많았다. 그리고 바다 쪽으로는 모래사장이 발달해 학생들의 대표적인 소풍 장소였고 놀이터였다. 이곳 방풍림을 지키는 일은 구장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이었다. 나무가 귀하던 시절에 방풍림을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홍역을 앓다 죽은 아이를 이곳에 묻어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기도 했다.

덕병리는 고군면 석현리 벅수거리 장승, 임회면 굴포리 목장승 등과 함께 진도의 대표적인 장승이 있다. 이 장승은 마을로 들어오는 구도로인 '진살등' 또는 '진살뫼들'이라 부르는 들판에 2기가 마주보며 서 있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지내는 덕병의 장승제, 유두날 용왕제, 6월 충제 등 다양한 마을 공동제의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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