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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배문화에 대한 재인식 필요하다
 유배문화에 대한 재인식 필요하다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2.06.25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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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와 진도는 조선시대 유배자들이 가장 많이 온 곳이다. 경남 남해군은 대교를 지나면 서포 김만중을 기리는 문학관이 있다. 제주도는 추사 김정희의 유배관이 성산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포항은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장기로 결정된 유배인은 모두 149회 200여 명에 이른다. 대표적인 인물로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있으며, 이들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고자 유배문화체험촌을 기획하게 되었다.

몇 년 전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 향토문화연구 심포지움에서 ‘호남의 유배문화와 그 활용 방안 모색’이라는 주제로 호남 유배인들의 남긴 문학작품과 사상을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유배문화의 중요성과 역사적 사실을 스토리텔링하여 보급하고 기념관을 조성하여 유배문화 콘덴츠를 개발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어 왔다. 조선시대 유배형은 유배대상자가 사는 곳에서 유배를 보내는 거리가 멀수록 중형이었다. 가장 험한 곳은 한양에서 멀기도 하면서 살기가 힘든 남서해안 섬이나 함경·평안도 북쪽 변방이었다. 한양에서 거리가 멀고 산골과 섬이 많았던 전라도는 유배지로서는 가장 적당한 지역이었다. 조선 8도중 전라도로 가장 많은 이들이 유배를 떠났다.지난해 호남지방문헌연구소가 출판한 <호남유배인 기초목록>에는 호남으로 유배를 온 사람들이 모두 928명이었다.

의신면 금갑진성복원중

조선시대에 유배자들이 가장 많이 보내졌던 장소로 등장하고 있는 전라도 지역은 단일 장소는 진도(70회)를 필두로 해 흑산도(68회), 해남(58회), 강진(38회), 추자도(31회), 영암(28회), 순천(27회), 흥양(26회), 고금도(26회), 광양(24회), 장흥(22회) 등이다. 그 중에서도 유배자 수로 보면 신안(160명), 진도(109명), 완도(98명)순이다. 완도 문화인들은 완도는 유배의 섬이고 소외의 땅으로 조선은 명나라 법률에 근거하여 3천리 유배를 실시했는데 땅덩어리가 좁아 3천리 유배를 실시할 수가 없어 고안한 것이 바다를 한 번 건너면 천리를 쳐주어 고금도는 2천리, 신지도는 3천리 유배로 가장 절해고도로 간주되었다.

조선시대 수많은 벼슬아치와 사대부가 고금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그중에 추사체로 널리 이름을 떨친 완당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있다. 완당이 귀양살이하는 아버지 김노경을 찾아뵈려 고금도에 와 잠시 지내면서 한양의 아내에게 한글로 써 보낸 편지가 전한다. 추사 김는 제주도. 북청을 포함 총 13년여 동안 귀양살이를 했으나 귀양살이 기간에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하는 등 학문적 연구 업적을 남겼다. 지도 유배인물 가운데 기록상으로 처음 확인되는 인물은 원교 이광사(1705~1777), 윤행임(1762~1801), 이세보(1762~1801) 등이다.

벽파정

진도안에서 금기시되는 무정 정만조의 유배영향

진도가 유배지로 악명을 날린 데는 일단 한반도 끝자락에 있는 섬이라는 이유를 들 수 있다. 그리고 해남과 진도 사이 좁은 해역에 놓인 ‘울돌목’, 그곳 거친 물살은 유배인에게 차마 살아 돌아올 엄두가 나지 않을 영혼의 담장이었을 것이다. 공동체는 공공성이 사라지면 지옥이 된다

섬은 그 문화가 양면성을 갖는다. 폐쇄성과 대양이라는 열린 문이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섬은 나라가 위태할 때 항전(사실 피신이다)의 거점 역할을 했다. 대표적으로 강화도를 떠올리게 된다. 진도 또한 삼별초 항쟁 당시 주력군이 용장성에서 대항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섬은 유배지로서 이용되었다. 섬 자체가 형무소나 다름없었다. 군수나 관리들은 교도관의 역할을 했다.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하고 왜구들의 침략이 활발해지면 주저없이 공도화를 시행했다. 땅의 소중함을 외면하고 목숨 하나 하나가 단지 세금과 부역의 대상으로만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요동을 잃고 만주와 간도를 떼어주고 대마도를 정벌해놓고도 귀찮아서 일본으로 넘겨버렸다. 독도도 민간이이 지켰지 정부는 오히려 처벌을 하려 했다.

진도는 섬이다. 진도대교가 쌍무지개처럼 걸려 있어도 한 방향으로만 드나들 수 있는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팽목항을 찾아들던 그 많은 발걸음들도 조금은 의아해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진도 본섬과 부속 섬들과의 교통은 오직 배뿐이다. 세월호 승객들을 구조한 이들도 인근 동거차 서거차 관매도 등 배를 생계로 하는 어민들이었다.

진도는 유독 문화와 예술의 고장으로 이름 높다. 진도는 한국의 대표적 민요인 ‘진도아리랑’의 고향이다. 이 섬 어디를 가나 부녀자들의 구성진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진도 사람치고 노래 한마디 못하는 사람 없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진도향현사 

강강술래에 관한 기록을 보면 1896년 진도로 유배된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가 12년간 머물면서 남긴 은파유필 恩波濡筆에 써놓은 글 중 각종 풍습 및 놀이에 대한 기록에 강강술래도 포함되어 있다. 무정의 대표적 저서인 은파유필은 그가 진도에서 접한 인물, 풍속, 고적 등을 시와 부賦로 표현하고 일기체 형식으로 엮은 것인데 350여 수의 시로 진도의 풍습을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 기록된 강강술래强强須來라는 명칭의 사용과 뜻풀이는 강강술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인정되고 있다. 당시 무정은 한시를 통해 <높고 낮은 소리 내며 느릿느릿 몰고 돌아/ 한동안 서 있다가 이리저리 움직이네/ 여자들의 마음에는 사내들 오기를 기다린 것/ 강강술래 부를 때 사내들역시 찾아드네>라고 표현, 강강술래의 어원이 사내들을 부르는 뜻이라고 보았다. 무정 정만조는 여기에 주를 달아 이날 밤 여러 집안 여자들이 달을 밟고 돌며 노래할 때, 한 여자가 선창하면 여러 여자들이 느릿느릿 받는데 이 놀이를 강강술래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강강술래의 노랫말을 보면 지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하고 선소리(앞소리)하는 사람에 의해 즉흥적으로 불리어 지기도 한다. 박병훈 전 진도문화원장(현 진도아리랑보존회장)은 “전문가를 통해 보다 구체적인 해석으로 이전 책자와의 차이와 추가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면서 중국 연경 사절단 관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미경씨에게 번역을 의뢰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김미경(문학박사.한문학 전공)씨는 “향전(鄕田) 박병훈(朴秉訓) 선생이 기존에 『은파유필(恩波濡筆)』과 필체(筆體)도 내용(內容)도 완전히 다른 『은파유필(恩波濡筆)』을 가지고 와서 검토를 의뢰했다. 얼마 전, 서울에 사는 모 서지학자로부터 입수했다는 『은파유필(恩波濡筆)』은 기존의 것과 내용은 모두 달랐지만, 공통점은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858~1936]가 자신이 유배오게 된 상황을 짤막하게 설명한 “正月十一日直 宮內府被拿”라는 부분의 내용만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단오날을 읊은 글에서는 진도사람들이 사치를 좋아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또한 진도에서 일찍이 만호(萬戶)를 지낸 사람들이 많아 진(鎭)을 혁파한 것을 아쉬어한다고 했다. 이들은 월급이 적어 배곯는 걱정 잊기 어렵고 퇴직한 뒤 하는 수 없어 어부생활을 한다고 읊었다.

수가수수귤천두라며 집집마다 유자나무가 주렁거린다고 감탄한다. 번역집 20쪽에는 금호루를 소개한다. 아마도 고군면 금호도 정자보다 교관청엔 뽕나무뿌리 들어왔고, 병기고 안에는 사슴떼가 논다 했으니 파진된 금갑진성을 일컫는 듯하다.

‘초복에 각헌이 찾아와 허미산과 함께 지음’에는 미산을 채산(采山)으로 적고 있다. 이런 오기가 자주 뜨인다. 등운림산(登雲林山)은 운림산방 뒤 옥순봉을 표기한 듯하다. 등사루는 당연히 쌍계사 쌍계루(雨花樓)일텐데 복원된지는 몇 십년 되지 않는다. 황운경이 제자와 함께 방문하여 서로 시를 나눈다. 운경은 바로 매천 황현이다.

‘명월사와 쌍계사의 옛 두 절 누각’의 명월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무엇보다 추석잡절(秋夕雜絶)에 소개된 추석놀이는 진도의 120년 전 민속을 매우 구체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해배되어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뒤에는 친일적인 경향을 띠어 이왕직전사관과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촉탁, 그리고 조선사편수회의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의 강사가 되었고, 1929년에는 경학원의 대제학이 되어 명륜학원의 총재를 겸임하였다. 이왕가실록의 실록편찬위원이 되어 『고종실록』․『순종실록』의 편찬사무를 주재하였다.

압구정 유적비 (군내면 정자리)

〈은파유필(恩波濡筆)〉

무정 정만조는 궁내부 참의관 시절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이에 관계되었다는 혐의로 1896년 진도 금갑도에 유배되어 1907년까지 12년간 진도에서 생활하였다. 이기간동안 정만조는 진도에서의 생활을 기록하였다. 은파유필은 일기체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는 진도의 독특한 풍속들이 기록되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강강술래, 차첨지놀이, 씨름, 수건놓기, 외따기 놀이 등에 대해 묘사하고 있어 조선시대 진도 민속과 풍속을 알려주고 있다.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운림산방’은 허련이 말년에 기거하며 자신의 화풍을 완성한 곳이다. 운림산방에서 허련의 후손들이 5대 200년에 걸쳐 화업(畵業)을 이어갔기 때문에, 조선의 남종화가 꽃필 수 있는 요람으로 역할을 했다.

무정은 이곳 관란정에서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주 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의 문우였던 매천 황현이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무정의 진도인들에 대한 영향과 보은은 지극했다. 해배되어 서울에 살면서도 찾아오는 진도 사람들을 대접하고 향현사 소현당 내 팔현사 비를 쓰기도 했다. 유달산의 목포시사도 마찬가지다. 지역에 대한 민속문화의 영향력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는 이완용이나 윤치호와는 달랐다. 김옥균도 아니었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흔적은 현지에서 찾기는 어렵다. 노수신은 조선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으로 다스리던 시기에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노수신은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됐고, 1547년(명종 2)에는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뒤이어 양재역 벽서사건에 장인이자 스승인 이연경이 연루되면서 노수신의 죄목도 가중돼 진도로 이배(유배지를 옮김)됐다.

당대의 진도 식자들과 오늘의 수 많은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들에게 가장, 숨은 덕을 남긴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무정이었다. 단지 시를 논한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많은 청소년들의 학문 교양을 숙련시켰다. 기록도 매우 실질적이다. 남들이 욕하니까 덩달아 도매금으로 친일파로 모는 인식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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