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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인의 섬에서 보내는 편지 / 다시 찾아야 할 공동체의식
박남인의 섬에서 보내는 편지 / 다시 찾아야 할 공동체의식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2.07.1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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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진보란 무엇일까. 나도 ‘그들만의 공동체’ 프레임에 갇혀 사고하고 은근히 즐기는 지도 모른다. 끼리끼리 의식이 나타나는 현상에 감염된 것일까.

덴마크 작가 악셀 산데모세가 쓴 소설에 “보통 사람들의 법칙”이라는 10가지 법칙이 소개되었는데, 북유럽 국가 사람들의 보편적 도덕 관습, 우리로 치면 ‘장유유서’, ‘붕우유친’처럼 대부분 당연히 받아들이는 윤리 규범을 소개한다.

족쇄처럼 ‘사군이충’과 ‘사친이효’라는 구호는 들리지 않는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든가 ‘충신출어효자지문(忠臣出於孝子之門)’을 금과옥조로 삼은 옛선인들의 마음은 그나마 순수했다.

그 북유럽 법칙에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든 가르치려 들지 마라”,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등이 있는데 이 10가지 법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우리는 특별하지 않고 모두 평등하며 그래서 협동해야 한다’이다.

그래서 북유럽 사람들은 돈이 많다고 지위가 높다고 더 똑똑하다고, 과시하지도 또 부러워하지도 않는고 소개한다. 간혹 어느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상을 받은 사람이 공개 석상에서 박수를 받을 때, 수상자들은 오히려 쑥스러워하고 미안해하기도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를 과시하고 자랑하고 다닌다면, 우리로 치면 어린 중학생이 나이 지긋한 일흔살 노인에게 반말하는 정도의 느낌을 서로 갖게 된다고 알려준다. 이런 그들만의 도덕적 규범이 혹독한 기후속에서도 북유럽 공동체가 협동하고 같이 잘 살 수 있는 그 토대, 즉 보편적 복지제도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시골살이에 안주하며 한편 초조감도 감추지 못하는 나는 마음속으로 부러움과 어색한 공감이 교차되기도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슈화되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현상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경쟁을 통해 소수의 승자를 길러내는 미국식 영웅주의와 서로 협동하고 연대하는 우리만의 공동체 의식,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경쟁을 통해 순위가 정해지는 것이 익숙하고 더 좋은 스펙을 만들어 남들보다 조금 더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10대, 20대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당연시한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도움닫기 지렛대역할을 못하는 부모는 무능력의 전형이 되고 만다. 국민평균소득은 높아지고 우울증은 더 많아진다.

낙오한 젊은이들은 절망에 빠지기 쉽고, 절망에 빠진 사람은 안 좋은 유혹에 넘어가기 쉽고, 안 좋은 선택을 하기 쉽다. 반대로 우리만의 공동체 의식이 빛나는 순간도 많았다. 강원도 산불을 진압하기 위해 전국의 소방차들이 달려가는 모습이라든가, 세월호 때 전국의 민간 잠수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달려가는 모습이라든가, 조금 더 멀리는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이라든가, 모두 공동체를 위해 연대하고 협동하는 우리의 모습이었다. 지하철 파견노동자의 안타가운 죽음에 분노와 반성으로 꽃을 바치는 시민들이 아직은 많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는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까? 무한경쟁을 통한 성장일까, 연대를 통한 평등한 공동체 구축을 추구해야 할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순간(너무 가파른 절벽)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사회복지제도를 만들고 공동체가 연대하고 협동하는 그런 보통 사람들의 세상의 꿈을 간직해야 할 것인가.

지역에 사는 사람(젊은이들은 당연)들은 세가지 편견과 차별에 시달린다. 태어나고 산다는 것 자체가 3류라는 개천과 우물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집값은 아예 천국과 연옥의 차이보다 더 높은 신기루와 같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대학종합병원은 죽음까지도 확고한 등급으로 구분한다. 그나마 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그 시골집안의 경사가 된다. 읍사거리에 버젓이 축하 현수막이 몇 개나 걸린다.

1천만원도 안되는 LH공공주택 1차 순위로 당첨되는 것은 홀로사는 이들에겐 행운이나 다름없다. 1~2억 전세, 5억에서 15억까지 타워팰리스를 ‘엄마 찬스’를 통해 젊은 시절에 확보해놓지 않으면 유망한, 능력있는 젊은이로 행세하지 못한다. 반지하에서 가족들이 ‘기생충처럼’ 오줌냄새를 창문으로 맡으며 사는 이들도 결코 세계10대 강국 대한민국 수도 ‘특별시민’의 지위를 결코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물론 더 어두운 곳에서 절대빈곤에 시달리다 마지막 선택으로 내몰리는 서민들도 부지기수다. 정부는 재벌이나 하루 몇만원 밥벌이 일용노동자에게 똑같은 긴급지원금을 주겠다고 한다. 그 알량한 형평성이 갑자기 작용된 것일까. 여야당 막론하고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라는 어색한 탈을 쓰고 버젓이 국회에서 담론화하고 있다.

조도 나배도연도교

대통령은 과연 그들만의 전유물인가. 이런 대통령제는 지속 계속되어야 하는가?

섬과 섬 사이 다리하나 놓아달라고 수십년 애걸복걸해도 강남거리와 똑같은 잣대로 인구비례에 비해 ‘부당하다’, ‘예산낭비’라며 국가균형발전의 헌법 정신을 구겨버린다. 우리는 이렇게 세계 10대강국에 진입할 수 있었다며. 우리는 싱가포르같은 도시국가가 아니다. 아름다운 홍익인간 정신이 담긴 민본주의가 1천 여년 동안 이어져 온 공동체사회를 이루어 왔다. 한류는 여기에서 그 가치를 일궈낸 것임을 알지 못하는가. 백두산 천지를 올라가 아리랑을 불러보라.

지방이 위축되고 지역이 왜소해지다 소멸해지면 서울은 소화불량의 개구리처럼 표본실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인구의 집중화는 포화상태를 이루었지만 그만큼 정부예산이 요즘 장마철과같이 물폭탄 세례를 퍼붓는다. 고려와 조선이 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지방과 섬, 바다를 소외하고 쇄환정책으로 사지를 묶어버려 국토 혈관이 막혀버린 탓이었다. 한양도성과 강화도나 남한산성만을 고집하는 개구리식 의식이 나라를 절단내고 만 것이다.

이미 이 나라는 ‘민란’의 시대에 들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현 정부는 ‘왕자의난’에 시달린다. 마침내 삼별초가 봉기하고 이순신이 다시 열 두척의 배를 이끌고 정유재란에서 순절한 병사들과 함께 입에 화염을 물고 서해바다를 가르며 북상하고 있는 모습이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미국 영주권을 가진 친미정권이나 친몽세력이나 친일파들의 세계인식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날마다 서민과 수많은 젊은이들을 총알받이 전쟁터로 내몰고 있다. 살아남은 희귀종을 찾아내 조중동 종편방송들은 ‘기회균등의 사회한국’을 홍보하고 강조한다. 서진 룸살롱사건이나 지존파의 악마성을 흥미롭게 방영하는 프로그램에는 또 다른 악마성이 흐르고 있다.

진도아리랑의 가사는 시대의 현상을 반영해 바뀌고 있다. 다시래기도 바뀔 것이다. 그 어떤 희극도 가까이보면 지독한 비극이리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지금 세익스피어 희곡 무대에 오른 꼭두각시인가. 아득한 이상향 율도국으로 떠나야 하는 홍길동의 신세인가.

진도북소리가 서울 ‘한국의 집’ 한옥무대에서만 똑 같은 프레임 주문에 따라 공연되지 않고 갑오년 동학군 진군의 신호소리가 될것인지 한국공동체를 벗어나려는 우월한(?) 변이종들에게 경고를 보낸다. 이미 한국사회 저변에서는 특별한 계급 귀족 진골, 육두품들에게 수십번의 경고알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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