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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아름다운 풍경
[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아름다운 풍경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2.09.18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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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숙(전남 진도)

들녘이 충만하다. 분얼을 마친 벼 포기에서는 좁쌀만 한 이삭이 만들어지고 있다. 무엇이라도 심을 수 있는 작은 땅뙈기마다 참깨가 꽃을 피워대면서 여물어가고 콩이며 들깨도 영역을 넓혀서 빈 땅을 채웠다.

밭농사로 대파가 많은 이곳은 고추를 심은 농가를 제외하면 비교적 느슨한 시기이다. 가을농사, 겨울배추 파종하기 전 틈새인 셈이다.

해마다 작목반에서 피서를 가는데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각 가정의 온 식구가 다 모였다. 바닷가에서 물놀이도 하고 씨름이나 사람 업고 달리기 시합 같은 경기를 하면서 오랜만에 많이 웃곤 했다. 올해는 다리 밑에 자리를 펼쳤는데 더위를 피하러 간 것이 아니라 마중하러 간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온몸에서 땀이 뿜어져 나오는데 총무 부인은 전날부터 명태조림이며 고사리나물 등 반찬을 수십 명 치 준비하느라 얼마나 땀을 흘렸을지.

남자들은 탁자와 의자를 트럭에서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술추렴을 시작했다. 돼지고기를 더 썰어 와라, 김치가 없네, 초장이 떨어졌다 하면서 여자들을 불러댔다. 의자가 부족해서 여자들은 앉지도 못하고 음식들 앞에서 대기 상태로 소주나 맥주를 마셨다. 참깨는 좀 거두었는지 제초제 통은 몇십 번 짊어졌는지 그런 몇 마디 물어볼 새도 없이 맥주 한 모금 마시다 말고 술과 안주로 상을 거듭 채웠다.

남자들의 배가 채워지자 주문이 뜸해져서 여자들도 밥을 먹자며 한쪽에 상을 차리고 있는데 군의원과 도의원들이 우르르 왔다. 여자들은 밥숟가락을 들지도 못하고 곧바로 먼저 먹던 자리 치우고 상을 차렸다. 이제는 우리도 밥 먹자 하고 돌아서는데 농협 직원들이 한 무더기로 몰려왔다. 다시 또 상을 차렸다. 접시에 명태조림을 담고 있는 총무 부인한테 소주 한 컵 따라 주고 안주로 명태조림을 찢어서 먹여줬다. 여자들은 상차림 하면서 서로에게 술과 안주를 나눴다. 상을 치우고 음식을 나르느라 옷이 축축할 정도로 땀이 나왔는데 빈속에 급하게 들이킨 소주 몇 잔으로 몸에서 김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새벽에 나가서 참깨를 베다가 왔고 다른 여자들 또한 밭을 매든 고추를 따든 서너 시간은 들일을 하고 서둘러 왔으니 다들 배가 고팠다. 그래도 남자들 뱃속 사정이나 손님이 우선이었다.

저수지 물이 바닥나서 논에 물을 대지 못해 발 동동 구르고 있을 때는 군청 안에서 업무 보느라 바쁘다던 군수까지 직원들을 데리고 왔다. 한가한 민의를 살피러 온 모양이었다. 총무 부인이 직접 꺾어서 만든 고사리나물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 밥상을 또 차렸다.

농사꾼들이 모처럼 짬을 내서 가족 동반으로 모여 음식을 나눠 먹고, 군수는 군민들 격려차 방문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이리라. 먼 곳에서 봤을 때는. 이런 모임들이 유지되면서 농촌의 공동체는 가느다란 명맥이나마 이어갈 수 있다고.

그러나 여성의 입장에서는 쉬거나 놀러 온 게 아니라 장소만 바뀐 일터였다. 동네잔치든 작목반 야유회든 남성들은 밥상을 받고 여성들은 차린다. 농촌의 공동체라는 풍경, 그 기저엔 ‘만만한’ 여성들의 노동이 가치조차 평가받지 못한 채 숨어있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이전과는 다른 이상한 변화를 느꼈다. 여성들이 누구 엄마로 부르지 않고 정화언니 김치 좀 썰어 줘, 미영아 저기 상 좀 치우자 이렇게 그녀들의 원래 이름들을 불렀다는 것이다. 각자의 이름을 부르자고 의논한 적이 없는데 반가운 조짐이었다. 게다가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다른 여성의 이름을 불렀고 다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렀을 때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익숙한 듯 자연스러웠다는 사실에 뒤늦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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