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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을 변호했던 인연으로” 박연철려변호사
“박노해 시인을 변호했던 인연으로” 박연철려변호사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2.09.1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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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철 법무법인 JP 고문변호사, 권정생 동화작가 변호사

 

박연철 변호사님과 나눔문화의 인연은 깊고 오래되었습니다.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이었던 1991년, 박연철님(진도읍 동외리 출신)은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변호인으로 고난의 시절을 함께 했습니다. 변호사님은 1998년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박노해 시인이 출소한 후부터 지금까지 나눔문화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권정생 어린이문화재단〉 등을 이끌며 노동자· 빈민 인권 변호에 힘써 온 박연철 변호사님.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길목마다 헌신해 온 박연철 변호사님.

박노해 사진전에서 〈권정생 어린이문화재단〉의 최윤환 이사, 강정규 이사, 박연철 변호사와 임소희 나눔문화 이사장.  본 기자와는 특별한 인연을 갖고 연락중.(법무법인 JP 고문변호사) 

박변호사님은 민변창립위원으로 참여하고 지금까지 활동하는 분이죠.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대학시절, 박정희의 삼선개헌 이후 학교는 아수라장이었어요. 저는 서울대학교 법대 학보 편집위원으로 투쟁에 계속 참여했었죠. 1970년 제가 4학년 때, ‘전태일’ 그분이 분신을 했어요. 그 시기에 ‘사법고시를 볼 거냐 말 거냐’ 방황이 깊었습니다. 제가 1978년 말 어릴 적 자란 광주에 취직해서 내려가 있는 동안 5.18이 일어났어요. 시민시위대에 참여했고 ‘총을 들 것이냐 말 것이냐’를 매일같이 고민하는 날들이었죠. 당시 겪은 일들을 일기로 기록해두었는데, 『시민의 날들』이라는 제목으로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에 시민기록물로 기증되어있어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생각했죠. 5.18 이후 뒤늦게 사법고시를 봤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여 수많은 시국사건을 변호해왔습니다.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을 변호하셨었죠.

그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안 좋습니다. 91년 김기설 씨가 정권에 저항, 분신을 했는데 운동단체에 있던 강기훈 씨가 유서를 대필해줬다며 중앙정보부와 검찰에서 사건을 만들었죠. 당시 많은 증거와 증인을 제시하고 자정까지 재판을 이어갔지만 실패한 변론이 되었어요. 죄 없는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만기출소했어요. 2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재심으로 진실이 밝혀졌지만, 그 세월을 무엇으로 보상받죠? 진실과 정의를 밝혀내는데 너무 오래 걸렸어요. 눈물이 나죠.

‘사노맹 사건’과 박노해 시인의 변호도 하셨죠.

당시 대형급 국보법 위반 사건이 많았는데 박노해 시인은 김창국, 이석태님과 제가 변호했어요. 91년 시인이 체포되어 남산 중앙정보부에 있을 때, 찾아가서 만났어요. 그들도 박노해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걸 보여줘야 했으니까 만나게 해준 거죠. 한 번은 시인이 전하고 싶은 말을 담뱃갑 껍데기 같은 아주 작은 종이에 정말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어서 제게 전해줬어요. 그 글씨가 굉장히 반듯한 정자체라 인상깊었습니다.

박 시인이 출소 후 어떤 길로 갈지 큰 관심사였죠. 나눔문화라는 쉽지 않은 조직을 만들어서 일궈나가는 모습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걷는 독서』의 글 하나만 봐도 갈고닦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것들입니다.

『강아지똥』의 권정생 작가가 유언장에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라며 변호사님께 사후를 부탁했었지요. 권정생 선생은 가난한 삶을 바꾸지 않고 인세로  모여진 예금 11억여원을 남겼어요. 일관되게 살다가신 분으로 늘 제 마음에 있는 분입니다.

그 기금으로 팔레스타인 아이들도 후원하고 계시죠. 가장 중요한 원칙은 ‘현장에 정확히 전달되어 실제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난민촌 현장에 갔던 박노해 시인과 나눔문화를 통해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도울 수 있게 된 거지요.

저는 제가 마지막까지 일관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민주와 정의를 우리 삶 곳곳에 실현한다는 것은 단숨에 되지 않는 일입니다. 원래의 뜻이 변질되고 위험에 빠질 수도 있어요. 고쳐 나가면서 퇴색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은퇴하면 농사 지으며 살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지금도 텃밭을 빌려 농사짓고 있어요. 앞으로는 나무도 심고 작은 도서관이 있는 그런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집은 작게, 공용 공간은 넓게 만들어 이웃들과 사이좋게 오고 가며 살고 싶습니다.(박종호 기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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