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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비를 수용하라
님비를 수용하라
  • 藝鄕진도신문
  • 승인 2022.11.03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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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는 청정지역이라고 자랑을 한다. 적조현상이 일지 않는 바다나 화학공장 대형 축산시설 등이 아직 들아오지 않은 천혜의 땅에서 산다는 자긍심도 갖는다. 진도물김이나 미역, 각종 해산물, 꽃게 등이 무진장 잡히거나 자연양식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해상 풍력발전단지나 핵폐기장 유치 등은 여론이 밀려 물 건너가곤 한다.

가공공장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가내업소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많은 물김은 어디로 가는가? 꽃게는? 현대인의 특히 성장기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톳과 모자반, 울금, 검정쌀 등은 반짝하다 떠밀리거나 아예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지원사업도 전무하다시피 해 늘 가난한 농촌 지자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구는 3만시대가 허물어지고 오직 노인을 위한 노인의 외딴 섬이 되고 있다. 노래도 맞장구를 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조선의 워런 피렛

- 선비의 나라 조선시대, 실제로는 왕부터 천민까지 모두 돈 벌기 위해 고군분투- 퇴계 이황, 조선시대 재테크 달인... 땅 사고팔고, 농사일 관리하고 농업에 투자하는 등 관리- 조선시대 쌀 매점매석, 독과점으로 쌀가게 문 닫기도... 사람들 폭동 일으키고 경강상인들은 처형당해

◇김방희> 주식과 부동산 시장 모두 하락세가 이어지다 보니까 그때 살 걸, 팔 걸, 아예 뺄 걸 하면서 과거 후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진짜 시간을 돌려서 한 500년 전 조선시대로 돌아가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떼돈 벌 수 있을까요. 지금도 플랫폼 기업들은 수수료 올리는 방식의 독점 폭리를 취하니까 방법은 매한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조선시대 역시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거죠. 그때 그분들도 한양의 자가. 집 한 채 마련하는 걸 꿈꿨고 집값이 오른다는 소문에 대박을 노리면서 영끌을 하기도 했습니다. 임금부터 양반, 상인, 천민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는데요. 조선시대에 재테크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퇴계 이황을 연구하는 분들한테는 꽤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논문도 많이 나왔고. 그 퇴계 이황 분이 워낙에 이제 7형제 중에 마지막으로 태어나고 그다음에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홀어머니가 키우면서 굉장히 가난하게 살았거든요. 그런데 이분이 똑똑하시잖아요. 그래서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장가를 잘 가십니다. 그래서 결혼을 두 번을 하셨는데 그 부인이 일찍 돌아가서 한 번은 김해허 씨 그다음에 안동권 씨하고 결혼을 하셨는데 결혼하면서 부인들이 가져온 지참금이 꽤 많이 됐어요. 그래서 그 부인들이 가져온 재산이 따지면 지금 이 논밭이 대략 1500마지기 정도였는데.

그랬는데 이분이 이황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 자식들이 또 재산들을 모아다가 나누기 위해서 분재기라는 걸 작성했거든요. 분재기를 보면 재산이 한 3000마지기로 늘어나 있고요. 노비도 한 300명 정도로 늘어나 있어서 굉장히 큰 부자가 됐죠. 따지고 보면 아시겠지만 재산은 쓰면 쓰면 줄어들지 절대로 저절로 늘어나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그걸 쓰면서 또 퇴계 이황 선생님은 큰 사업도 벌이셨어요. 바로 도산서원이라고. 그렇죠. 그런 걸 하면서도 재산이 거의 2배로 불어났으니까 아주 이거는 투자를 재산을 아주 잘 굴리신 거죠.

뭐 해서 그렇게 벌었을까요.

◆이한> 그렇죠. 그래서 저도 그랬는데 퇴계 이황 선생님이 벼슬을 또 오래 하신 건 아니에요. 벼슬을 하다가 지방에 내려가고 지방에 내려가고 그러셨는데. 이분이 남긴 글이 물론 도산전서 같은 거 보면 편지 같은 거 많이 남아 있기는 한데. 또한 가서라고 해서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특히 그 아들인 준에게 보낸 편지가 많이 남아 있는데 그 내용 대부분이 농사지었니, 씨는 뿌렸니, 피는 뽑았니 그리고 추수한 건 얼마나 되니. 그다음에 어디 가서 무슨 땅 샀니. 그래서 계속 살림을 챙깁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농사일을 잘 아세요. 그리고, 그러니까 농사일 이때에 뭐해야 된다는 것도 다 아시고, 그다음에 그 당시에 유망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농업에 투자도 하세요.

◇김방희> 작물도 잘 골랐군요.

◆이한> 네. 목화, 그 당시에 목화가 귀하죠. 그런데 목화를 심는데 목화를 그냥 심으면 사람들이 훔쳐가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목화를 심을 만큼 비옥한 땅을 만들어 놓고, 그래서 거기다 씨를 뿌리게 하고 그다음에 하인들 시켜서 지키게 하고, 다 거둔 다음에 얼마나 되니, 그 양도 전부 다 체크를 합니다.

◇김방희> 꼼꼼한 사업가이기도 하셨군요.

◆이한> 정작 그분의 그런 철학에 대한 글을 보면 정말로 정갈하고 아랫사람들한테 참 상냥하고 그렇게 참 고아한 유학자이셨는데요. 그러니까 아들들한테 보낸 편지로 보면 이제 그냥 정갈한데. 만약에 본인이 안동에 직접 계셨으면 아마 이 일을 다 하고 다녔겠죠. 왜냐하면 그 당시에 농사라는 게 양반이 그냥 앉아서 보내주는 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하인들, 노비들 시키고 잘하는지 감시하고 그런 것도 다 해야 되니까요. 그렇게 했는데 또 돈 버는 데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서울에 있는 중요한 물자들, 중요한 귀중한 물건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눠줘요. 자기 친척들은 물론이거니와 노비들한테도 쌀, 곡식 얼마나 보냈니. 그걸 또 다 편지로 써서 보내서 자식한테 누구한테 보내고 누구한테 보내고 이렇게 굉장히 많은 물건들을 사 와서 사람들한테 선물도 해주고.

◇김방희>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퇴계 이황 선생은 농사를 통해서 아주 성실하게 축적을 한 거니까 이거는 오히려 본 받을 일입니다.

◇김방희> 사무역이 금지된 상황이었으니까, 조선시대 밀수를 통해서 부를 획득하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중국 쪽으로 갖고 간 건 인삼 계통이었을 테고. 중국 쪽에서는 좀 나은 문물들을 갖고 들어온 걸 텐데.

◆이한> 네, 귀중품이나 책들.

◇김방희> 바로 인삼 얘기를 하셨으니까 임상옥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죠. 뭐 드라마도 되고 조선시대 최고 거부로 알려진 분인데 인삼이 결정적이었습니까?

◆이한> 아무래도 인삼이 거의 중국과 일본, 일본에서도 굉장히 여겨지는 만병통치약이고 심지어 유럽까지도 건너가서 루소나 그런 사람이 이게 바로 동양에서 온 명약이다라고 인삼을 줄 정도로 유명했거든요. 그래서 한 16세기, 17세기 정도 되면 산삼이 씨가 마르면서 인삼 무역의 위기를 맞습니다만 인삼 재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또 전설 임상옥의 전설이 인삼을 쪄서 홍삼으로 만들어냈다는 게 임상옥이라는 전설이 정확합니다. 진실인지는 알 수 없고요. 그래서 홍삼이라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내면서 인기가 더 높아져서 인삼이 거의 동아시아의 엄청난 돈을 끌어올 정도로 굉장히 인기를 끌었습니다.

◇김방희> 전혀 맥락은 다릅니다마는 고 이건희 회장이 애니콜 화형식도 좀 생각나네요.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 한 거고 임상옥은 가격을 높이기 위해서 한 건데 이 돈을 많이 번 사람들 아무래도 역관 중심의 밀수업을 통해서 많이 걸었다는 얘기까지 했는데 보통 사람들, 보통 농민이죠. 사실은 농민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농민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어떤 재테크를 했을까가 궁금한데 조선 후반기가 되면 워낙 신분 제도에 대한 불만도 높아지고, 전봉준의 동학 혁명도 벌어지고 이 얘기는 거꾸로 농민들을 아주 착취하는 세력들, 탐관오리라고 지칭되기는 했습니다마는 있었다는 반증이겠죠.

◆이한> 그렇죠. 사실 탐관오리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고요. 농민들은 사실 언제나 힘든 사람들이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좀 농민들도 항상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이익을 추구하잖아요. 농민들도 더 큰 돈을 벌고 싶어 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모내기 이앙법입니다. 왜냐하면 모내기를 하면 물이 가득 차기 때문에 잡초 뽑는 일이 줄어들어요. 잡초 뽑는 일이 줄어들면 이 잡초 뽑을 시간에 다른 거, 담배를 씹는다든가 투명 작물을 심는다든가 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가 있는 거죠. 그리고 쌀의 생산량도 많이 올라가고요. 그래서 그 이앙법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물이죠. 그래서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보를 쌓는데 그런데 이 보를 쌓는 게 문제는 이 보를 쌓으려고 농민들을 착취하는 탐관오리가 있었는데 그 바로 그 대표적인 사람이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됐던 바로 조병갑이었습니다. 이 조병갑이라는 사람은 아주 굉장한 탐관오리였는데요. 일단 백성들은 온갖 말도 안 되는 세금을 만들어서 착취합니다. 효도세라든지, 불효세라든지 자기 어머니 상 당했으니까 부의금 내라고 해서 백성들한테 또 한 번 돈을 주르륵 걷는다든지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백성들이 좋은 쌀을 세금으로 바치면 이걸 나쁜 쌀로 바꿔서 나라에 바치고 좋은 쌀은 자기가 먹고 그리고 가장 유명한 게 바로 만석보였습니다. 사실 저도 어렸을 때 만석보를 배우면서 이 보를 왜 무너뜨리는 거야라고 생각했더니 사연이 있더라고요. 워낙 그 지역에 이미 보들이 많이 있었는데 조병갑이 만석보를 하나 더 새로 쌓아야겠다고 하면서 농민들을 억지로 동원한 거예요. 동원하면서 약속을 했죠. 이 보에 물을 받은 논은 첫 해에는 세금을 안 걷어줄게 농민들이 그걸 믿고 열심히 힘들게 보를 쌓았죠. 그런데 그 보가 만들어지고 농사를 거둘 때 되니까 당연히 조병갑은 입을 싹 씻고 세금 내놔, 많이 내놔 그렇게 되니까 사람들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거 그리고 폭발하자마자 그 보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던 거더라고요.

◆이한> 조선시대 때는 주로 이제 가장 유명한 게 바로 국토 종단항이라고 하는 나진항의 사태입니다. 그 당시에 기뢰선이라고 해서 길림성에서부터 회령까지 이어진 철도가 만들어지고 또 일본이 생각한 거예요. 저쪽이 조선통을 위로 해서 아래로 종단을 하고 있는 항구를 만들면 딱 좋겠다. 부산과 연결되는 위쪽의 항구를. 그래서 어디다 만드느냐 때문에 후보지가 3곳이 됐는데 그러니까 어딘가에 여기가 걸리면 그쪽 땅을 산 사람은 대박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후보지가 세 곳이었어요. 청진, 웅주 그리고 맨 마지막이 지금은 나선이 된 나진. 그런데 그래서 사람들이 전부 여기가 유망해 여기가 유망해 여기가 유망해.

◇김방희> 베팅을 하는 거죠.

◆이한> 네, 각자 자기 주식을 열심히 샀습니다. 그리고 계속 오보가 나와요. 여기가 됐다. 여기가 됐다. 그래서 사람들이 벌렁벌렁하는 마음을 잡고 기다렸는데 결국 선정된 건 나진이었습니다. 나진이 갑자기 땅 가격이 300배, 1000배 그렇게 오를 정도로 마구 올라갔고 다른 쪽 산 사람들은 전부 망해서 그것 때문에 쓰러져서 죽은 사람이 있을 정도로 쪽박과 대박이 극과 극으로 나뉘어서요. 그리고 또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고 해서 이 나진은 맨 처음에 한 20~30가구가 살 정도로 아주 작은 어촌이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온 동아시아의 투기꾼들이 몰려들어와서 땅을 사기 시작해요. 그래서 원래 살던 사람들 그리고 여기다 싶어서 찍어서 샀던 사람들은 김가진 같은 사람들이 대박이 났고요. 김가진은 아니지만. 김기덕이었습니다.

◇김방희> 그거는 지금이나 예전이랑 똑같은 거군요. 또 하나 저도 부모님한테 들은 얘기인데 일제강점기 전부터 만주를 많이 향했다는 거거든요. 한국 사람들 부동산 투기의 역사를 얘기할 때 만주 얘기를 아버님도 가끔 하셨는데. 만주로 몰려간 분들 중에서 물론 독립운동을 하러 가신 분들이야 본인의 의지 때문에 그렇지만 돈 때문에 가신 분들도 많았습니까?

◆이한> 사실 그거는 일본이 일단 잘못한 걸 먼저 얘기해야 되는데요. 일단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우는 토지조사 있었지 않습니까? 그 당시 일본은 자기들이 선진국이라는 생각에 딱 있어서 너희 같은 미개한 조선을 뿌리 끝까지 고쳐주겠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너희들의 미개한 토지 제도를 바꿔주겠다 하면서 토지 조사를 하면서 신고를 하게 했거든요. 그런데 이미 조선시대에도 자기들만의 토지 제도가 있었죠. 그랬는데 이걸 갑자기 근대화하겠다. 서구하겠다고 했는데 일단 조선 사람들은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었고 또 일본을 못 믿겠다. 세금 왕창 먹인다더라. 그래서 일부러 신고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그리고 신고 기간도 짧았어요. 그래서 신고 조사가 끝난 다음에 신고한 사람들은 그래, 신고한 사람들은 너희들은 땅주인이고 신고 안 한 땅은 전부 우리 거라고 해서 갑자기 일본이 조선 땅의 50%를 차지하는 대지주가 됩니다. 그러니까 원래 땅을 가졌던 사람이 전부 소작농으로 굴러 떨어지고 소작료도 어마어마하게 비싸져요. 그렇게 되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때 갑자기 만주 이야기가 들려오는 거죠. 만주는 비옥한 땅이고 거기에 가서 5년만 농사지으면 너희 땅을 가질 수 있다.

정약용의 재테크 조언

"작은 돈은 아끼고 큰 돈은 과감히 써라"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을 집대성한 조선시대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였다. 개혁 군주인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승승장구했던 다산은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면서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났고 이듬해 신유사화가 터지자 18년 동안의 강진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다산의 나이는 겨우 39살이었다. 그러나 다산에게 권력의 핵심에서 쫓겨나 유배생활을 보낸 인생 후반기가 없었다면 그가 남긴 5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도 없었을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서 보낸 인생 전반기와 18년의 유배생활을 보낸 인생 후반기를 통해서 다산은 세상을 통합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다산은 자식들에게 여러 차례 근(勤), 검(儉)을 강조했다. 집안이 풍비박산된 폐족으로서 자식들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조차 하지 못할 것이라고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산의 편지를 보면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선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1810년 다산이 강진에서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 중 "뽕나무를 심어라"라는 내용이 있다. 다산은 “생계를 꾸리는 방법에 대해서 밤낮으로 생각해도 뽕나무를 키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며 제갈공명이 은거할 때 뽕나무를 심어서 생활을 꾸려간 게 큰 지혜임을 깨달았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선비로서의 체면을 완전히 버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산은 “과일 장사는 다른 장사보다 깨끗하고 점잖지만 어차피 장사”라면서 뽕나무를 심어서 누에치는 일은 선비의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 큰 이익도 남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고 반문했다.

다산의 말 중 “큰 돈을 과감하게 쓰고 작은 돈은 아껴써야 한다”는 말은 더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다산은 유배지인 강진에서 가르친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 “큰 것을 아끼는 사람은 큰 이익을 꾀하지 못하고, 작은 것을 손쉽게 여기는 사람은 헛된 낭비를 줄이지 못할 것이니, 이런 점을 잘 살펴야 한다."

지난해 기획재정부는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천 냥의 가치는?”이라는 글에서 18세기 후기와 지금의 쌀값을 비교해 당시 엽전 1문의 가치는 지금 돈으로 약 688원이라고 계산했다. 이렇게 따지면, 엽전 열 꿰미는 약 688만원에 달하는 큰 돈이다. 아마 조선시대 경작할 논을 사거나 뽕나무를 심을 땅을 사기에는 충분한 금액이었을 것이다.​

다산의 말을 곰곰이 씹어보면, 작은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큰 돈을 아끼지 않고 과감하게 투자하는 일이다.

만약 작은 돈을 허투루 낭비해 왔다면 지금부터는 아껴 쓰고, 큰 돈을 아꼈다면 이제부터는 좋은 기회다 싶을 때 과감하게 투자해 보자. 젊었을 때 큰 돈을 과감하게 쓰지 못하면 나이 들어서 후회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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